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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창2강(1:26-2:3)/ 사람,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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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77회 작성일 05-03-1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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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학기 창세기 제 2 강                                                       
말씀 / 창세기 1:26-2:3
요절/ 창세기 1:27

사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를 왜 이 세상에 보내셨는가? 이런 중요한 질문에 오늘 본문은 명쾌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쭐대거나 주눅 들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여 참된 나를 세워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존귀한 삶, 고상한 삶,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희의 마음 눈을 밝히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나를 발견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26,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어떤 특별한 뜻을 두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성 삼위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명령으로만 창조 작업을 하셨지만 특별한 존재를 만드시기 위해서 특별히 의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맹목적인 생물을 만들어 그들의 생을 살게 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특별한 피조물을 만드심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임 통치자요 하나님과 교제할 탁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할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모든 만물과 그 후손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칠 존재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인격을 말합니다. 인격은 자기의식과 자기결정의 주체입니다. 인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성과 의지입니다.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무엇을 배우면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허락하사 인격이 되게 하셨습니다. 의지에는 도덕적 성품이 필수적입니다. 레위기 11:4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본래 거룩한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도덕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도덕성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면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사랑은 감정의 영역이라기보다 의지의 영역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을 베풀고 싶고,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은 선한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전쟁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병사가 크게 부상을 당하여 목이 심히 탔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병사가 자기 물통에 조금 남은 물을 건네주었습니다. 물을 마시려던 부상병은 자기를 바라보는 전우들을 바라 볼 때 차마 마실 수가 없어서 물통을 중대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물을 마시는 척하며 꿀꺽 꿀꺽 소리를 내고는 다른 병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병사도 또 그렇게 하고 다른 동료에게 물통을 건넸습니다. 이렇게 해서 물통이 마지막까지 돌아왔지만 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 병사들은 서로서로 큰 감동을 받았고 위기의 순간을 잘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 희로애락을 아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4:24).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바라게 되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은 사람과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제는 인격 사이에 가능합니다. 또 교제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언어는 인격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말하여 대화를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창조의 비밀과 창조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거룩함을 추구합니까? 희생적인 사랑을 베풉니까? 영성이 있습니까? 창조적인 지성으로 좋은 일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좋은 머리로 사기를 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일진회를 만들어서 순진한 학생들을 괴롭힙니다. 컴퓨터 음란사이트를 만들어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병 들여 놓습니다. 시대가 갈수록 점점 더 사람들은 영성과 도덕성을 상실하고 짐승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유일한 길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배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힘써 닮고 본받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4:13-15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닮고자 투쟁하게 될 때 어린 아이와 같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으로 사명을 주셨습니다(28).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많이 낳고 기르고 퍼뜨리라는 것입니다. 다산은 축복입니다. 우리 나라는 인구 폭발을 염려하여 40년 전에 가족계획을 했습니다. 그것이 잘 되어서 경제 부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아이를 낳지 않아 노령 인구가 많아지고 생산을 감당할 인구가 적어짐으로 국가의 장래가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를 적극적으로 낳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최소한 7천만이 되어야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큰 민족이 되고 큰 나라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자녀도 많이 낳아서 인재로 키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가득하도록 전도하고 제자 양성을 하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이것은 창12:1,2절과 마29:18-20절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시고 그 백성들을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을 복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육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많이 나아서 땅에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또 땅을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땅에 속한 모든 것을 활용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창조의 비밀을 탐구하고 캐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지혜를 이용하고 재창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과 질서 그리고 창조의 무궁한 신비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질병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하고, 학문의 영역을 정복하여 이 땅에서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모든 환경을 살펴서 보호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바다 속에 고기를 어떻게 다스릴까요? 아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말씀으로 고기들을 모으신 것처럼 말로 다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들 위에 지배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타락으로 사람은 그 지배권을 상실하여 말로 물고기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기구들을 이용하여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해양학에 대한 연구는 땅에 대한 연구만큼이나 신비롭고 풍부합니다. 공중의 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이 공중의 새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름을 짓고 그들을 부르기만 하면 새들이 왔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방주를 짓고 새들을 그 안으로 불러 넣을 때 잘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하면 새들이 달아나는 것도 타락으로 사람이 지배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전에는 사람이 말을 하면 새들이 오는 것이 새들을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육축과 짐승은 사람과 같은 날 창조되었으므로 매우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 창조 시에는 맹수들도 다 순한 양과 같아서 아담과 함께 지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또 아담의 명령에 잘 순종하였습니다. 또한 아담도 이런 피조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잠12:10). 우리가 무조건 사명만 감당하고자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사명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서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먹는 것이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모든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먹거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밤, 감, 배, 사과, 귤, 파인애플, 배추, 당근, 오이, 무, 시금치, 고추, 감자, 고구마, 쌀, 밀, 조, 수수, 보리 등등 풍성한 곡식과 과일로 산과 들을 채워주셨습니다. 열매와 씨와 뿌리 열매는 사람에게 주신 건강식품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습니다.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처음 창조질서가 아니었습니다. 푸른 풀을 먹는 짐승들은 다 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6: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히 기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심히’라는 부사를 넣으셨습니다. 만물이 아무리 보기 좋아도 인간이 들어가야 심히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1) 인간의 존재 의미
  인간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귀하게 여기고 기뻐해 주면 행복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들이 인정해 주고 기뻐할 때 만족과 행복을 느낍니다. 살맛이 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스바냐 3:17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수고에 비해 열매가 없었지만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5)”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사43:4).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나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학대하고 운명의 쇠사슬에 얽매여 신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자아 발견을 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가치관으로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맛을 잃어버립니다. 또 쉽게 교만해집니다. 요즈음 영웅시대 드라마가 한참 인기가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시대인지라 경제성장에 공헌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었습니다. 또 빌게이츠 같은 갑부들이 영웅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설령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적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아 발견입니다.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스스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안다면 더 많은 것을 창조해낼 힘이 생깁니다. 자신이 우주에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룩하고 숭고한 기쁨이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지으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2) 인간이 가져야 할 가치관
 인간이 가져야할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의식에 시달리며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어떤 사람은 남이 보는 데서는 착하고 의로운 척하지만 은밀한 곳에서는 온갖 죄를 다 짓습니다. 밖에서는 선한데 집에 가면 폭군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는 데 보지 않으면 적당히 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는 사람이 보나 안 보나 충성스럽게 일합니다.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때 사람들의 거짓 고소를 이기고 의로움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사 외교부장관상을 타게 하셨습니다. 

3) 인생의 근본 목적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사43:7).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소요리문답 1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그것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롬1:21은 경고합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마음이 우준하게 되어 금수와 버러지를 섬기는 우상 숭배자가 되느니라.”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인격과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자기 영광을 위해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늘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고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불안합니다. 또 사람들은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삽니다. 이념이나 사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으로 불멸의 가치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불멸의 가치있는 것으로 인생들의 근본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때 힘이 있고, 내면에 참 기쁨과 만족과 자유가 있습니다(고전6:19, 20/ 고전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겸손하고 진실해 지게 됩니다.

넷째, 안식일을 복주신 하나님(2:1-3)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매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의 절정과 완성은 ‘안식’입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후에 7일째인 마지막 날,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셨지만 그것은 가장 위대한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실과 그 위대하신 능력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은 일과 휴식이라는 두 개의 리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일이라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몸도 땅도 고장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2:27)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참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날들을 복 주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일곱째 날만 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복 받는 비결은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신 날을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과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곳에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만 예수 믿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출20:10절을 보십시오.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가족 전체가 예수 믿고 복 받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시간만 안식일이고 예배가 마치면 ‘이 날은 내 날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루 종일 주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창조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요, 사명의 존재요, 심히 기뻐하심을 입은 존재임을 배웠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참된 자아를 세워나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며, 복주신 안식일을 잘 지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의미 있는 인생, 행복을 창조하는 인생,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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