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사도행전 05행20강(27:1-28:31)/ 로마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바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14회 작성일 05-02-27 09:19

본문

2005년 사도행전 제 20 강                                                        539
말씀 / 사도행전 27:1-28:31
요절 / 사도행전 28:30,31

로마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바울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다가 로마에 있는 황제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석방을 주장하기보다 로마에 가서 선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가이사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라도 세계 선교를 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사도 바울이 로마 셋집에서 일대일 말씀 공부를 꾸준히 감당하는 가운데 이룬 로마 개척 역사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Ⅰ. 로마로 호송되는 바울(27:1-28:15)

  바울이 이탈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었습니다. 호송 장교로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데리고 아드라뭇데노 배에 올라 행선을 했습니다. 이때 의사 누가,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이튿날 시돈에 들렀다가 떠나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이탈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전형적인 곡물 운반선이었지만 여객선 역할도 하여 무려 276명이나 태울 수 있는 큰 배였습니다. 그런데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태풍으로 인하여 그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미항은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여 에게해를 가로질러 가려는 배들이 마지막으로 기항하는 항구였습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10).” 바울은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이 있었고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위험을 몸소 체험했습니다(고후11:25). 그래서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낸 후에 다시 항해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종보다 전문가를 더 신뢰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서 민주적인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된 많은 카운슬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하게 서 있는 한 사람에게 듣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면 배가 출항했을 때에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처음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항해하기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살랑살랑 순풍이 불자 배는 미끄러지듯 지중해 바다를 가로질러 나아갔습니다. 선장과 백부장은 바울을 향해 “봐라, 죄수인 주제에 니가 뭘 알어” 하는 눈빛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며 득의만만해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영어성경에 보면 유라굴로를 허리케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살랑살랑 불던 순풍이 갑자기 무서운 태풍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맑은 하늘은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어 버렸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잔잔한 물결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뱃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튼튼했던 돛대도 부러졌습니다. 강한 바람에 못 이겨 두꺼운 천으로 만든 돛도 찢어져서 나풀거렸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가 기우는 쪽으로 이리 밀렸다 저리 밀렸다 짐짝처럼 굴러 다녔습니다. 선장은 아무리 키를 조종하며 배의 중심을 잡고자 노력을 해 보았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경험 많고 노련한 선장이라도 이처럼 무섭게 몰아치는 광풍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1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쫓겨가더가.” 평상시 바람이 적당히 불 때는 배가 사람의 기술과 능력에 따라 빨리 가기도 하고 늦게 가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가기도 하고 왼쪽으로 가기도 하고. 얼마든지 사람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선장이 가고자 하는 쪽으로 배를 항해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배가 중심이 되고, 바람이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광풍이 불어닥치게 되면 배가 밀려서 더 이상 바람에 맞추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선장의 기술도, 항해술도, 선원들의 노력과 수고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바람이 주가 되고, 배는 그저 망망대해에 일엽편주, 훅 불면 뒤집어지는 나뭇잎에 불과합니다. 그때는 사람이 배를 어떻게 조정할 수도 없고, 오직 바람이 부는 대로 배가 밀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평소에 순풍이 불 때는 얼마든지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머리와 능력과 경험과 상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좌지우지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미래의 진로도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바람이 순풍이나 강풍일 때에 통하는 말입니다. 인생의 항해 속에서 광풍이 불어닥칠 때에, 무서운 폭풍이 몰아닥칠 때에, 그때가 되면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 부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처럼 “배가 밀려가는 대로 쫓겨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자네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나도 몰라 어쩌다보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밀려 왔어” “아니, 자네처럼 사업도 잘되고 그렇게 잘나간다고 하더니” “낸들 어찌 알았겠나, 그놈의 문제가 그때 터질 줄을."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 왜 광풍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과 재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이 사람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세로 말미암아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과 재주로만 모든 일이 잘 되고 잘 풀리면 얼마나 우쭐대고 뻐기고 교만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능력 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득의만만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소에는 가만히 놔두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면 그때에 광풍으로 내리치십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그 광풍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17절부터 20절에 보면 사람들이 별의 별 수를 다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사방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칠흙 같은 밤만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비바람이 내리치고 파도는 밀려오고 깜깜한 밤이 계속될 때에 얼마나 두렵고 무섭겠습니까? 20절을 보면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며칠을 굶었는데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먹으면 뭐합니까? 곧 죽을 것인데. 그러면 이때에, 절대절망의 순간에 일어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21,22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죄수라고, 엉뚱한 제안을 한다고, 이렇게 바람이 좋은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무시를 당했던 바울이 이제는 무리들 가운데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런 리더쉽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어디서 이런 위기관리능력이 나온 것입니까? 바울은 하도 배를 많이 타서 좀처럼 겁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역경의 때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든 것뿐입니다. 역경의 순간에 빛이 난 것은 바로 하나님이요,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 즉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광풍 가운데서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우리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공부해야지, 취직 준비 해야지, 실력을 쌓아야지. 맞습니다. 우리는 공부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실력이 무엇입니까? 학점만이 실력이 아닙니다. 토익점수만이 실력이 아닙니다. 진정한 실력은 어떤 위기상황이 닥쳐와도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가 학문이 부족해서, 외국어실력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광야훈련을 시키셨겠습니까? 바울이 아는 것이 부족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과 환란의 터널을 거쳐왔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나 바울이나 많은 연단을 통해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 광풍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은 위기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젊은 날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음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기의 때에 반드시 들어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맨 날 세상욕심, 자기 계획, 자매 사귈 생각, 그런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바울과 같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비전에 불타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 거룩한 꿈을 꾸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에 말씀을 품고, 믿음의 항해를 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광풍을 만난 지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이었습니다. 배는 아드리해 남쪽으로 표류하다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이 물을 재어 보니 점점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를 안 사공들은 닻을 내리는 체 하면서 몰래 구명보트를 내렸습니다. 이는 몰래 자기들만 도망가고자 한 속셈이었습니다. 이들은 대구지하철 사고 때 자기만 살려고 마스터키를 뽑은 채 출입문을 다 닫아두고 혼자 도망친 1080호 기관사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백부장에게 권면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자 백부장이 군사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거룻배를 끊어버리도록 함으로서 사공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백부장은 이제 하나님의 종 바울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배에 탄 276명의 진정한 목자였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자 바울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다 살 것이니 안심하고 음식을 먹도록 믿음을 심었습니다. 배가 점점 육지에 가까워오자 이번에는 군사들이 죄수들을 죽일 계략을 꾸몄습니다. 죄수들이 육지에 상륙하게 되면 도망할지 모른다는 염려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하여 이 군사들의 무리한 행동을 제재하였습니다. 44절에 보면 마침내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 없이 276명 전원이 다 육지에 상륙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20절에서 ‘광풍 때문에 구원의 여망이 없었다’고 했는데 44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바울 한 사람의 믿음 때문이요, 영적인 리더쉽때문이었습니다. 위기의 때에 자기 혼자만 살고자 하지 아니하고 배에 탄 276명의 승객전원을 자신의 양으로 삼고 어찌하든지 그들을 살리고자 섬세하게 돌보고 보살핀 바울의 목자의 심정때문이었습니다. 무디 신학교에 학장을 지낸 죠지 스위팅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그 사람이 위기에 처해봐야 드러나는 법이다.”  사람이 평소에는 다 인격이 훌륭한 것 같고, 믿음이 좋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위기가 닥칠 때에 평소 그의 믿음이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28:1절을 보십시오. 바울일행은 마침내 멜리데라는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또는 널조각을 의지하여 상륙을 하였기 때문에 몸이 다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차기 때문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비까지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불을 피워 몸을 녹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때 무엇을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바울은 자기 몸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이 유모와 같이 양들을 위해서 나뭇 가지를 거두어다가 불을 때는 일을 거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존경을 받고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섬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나뭇가지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가 마음을 다해서 섬기고 있는데 나뭇단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움을 인하여 나오다가 바울의 손을 물고 있었습니다.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놀라 서로 말했습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바울도 이때 운명적인 생각을 하기 쉬웠습니다. “로마를 코 앞에 놓고 죽다니 원통하다. 바다의 광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독사에 물려 죽어가다니! 또는 나는 살인자다. 내가 스데반을 죽인 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갚으시는구나.“ 그러나 바울에게는 어떤 운명주의적인 생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독사를 탈탈 털어 버렸고, 독사는 즉석뱀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복음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막16:18a절은 말씀합니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이 약속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바울을 보고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또한 열병과 이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추장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안수하여 고쳐주었습니다. 막16:18b절은 말씀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받게 하고 섬기고 치료하는 일을 했습니다. 기록에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해 보블리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후에 멜리데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약 석 달 동안 이곳에 머물며 토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 일행이 떠날 때 후한 예로 대접하고 쓸 것을 배에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훈련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고, 위로해 주시고,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곳에서 겨울을 지낸 바울 일행은 다시 항해를 계속하여 수라구사, 레기온, 보디올, 삼관을 거쳐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몇몇 형제들의 환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되사 바울의 길을 친히 앞서가며 예비해 두셨고, 마침내 사명의 땅 로마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분명한 믿음과 소신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여시고, 믿음의 역사, 선교역사를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지 않고 사명보다 물질을 앞세우게 되면 일생 물질에 매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캠퍼스로 나아가고, 선교지로 나가서 복음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에 거기에는 많은 시련과 역경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은 바로 믿음을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는 한 어떤 사단의 세력도, 방해 세력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Ⅱ. 셋집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한 바울(28:16-31)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자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아마 가이사의 정식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로 어느 정도 활동의 자유를 준 것 같습니다. 아마 유대 총독 베스도의 편지에도 바울의 죄목이 유대인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이요 로마 법에 저촉되는 것은 없다고 적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호송을 맡은 백부장 율리오도 바울에 대해 좋게 보고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매인 몸으로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선교사요 복음의 제사장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사흘 후에 유대인 중에서 높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포 사회에 유력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가이사에게 호소하게 된 내력을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족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붙잡아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도록 여러 가지로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뿐이지 동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들을 초청한 목적은 자기를 변명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먼저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메시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대로 예수님을 유대 땅에 보내사 성령을 기름붓듯 부으사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고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성경 선생의 나라요, 목자의 나라요,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그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생명을 바쳐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서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니라 하더라.” 유대인들은 상당히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힘을 얻고 그들과 일대일 말씀 공부를 약속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그의 옥중 증거는 힘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참된 소망, 산 소망을 심었습니다. 그의 셋집은 몰려오는 사람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점점 넓혀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도 있고 듣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듣지 않는 자들에게 실망하지 않고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한 것을 알고 로마 사람들에게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당시 피의자의 법정 구금기간이 18개월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늦어도 2년 안에 가이사의 재판을 받고 풀려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셋집에서 열심히 1:1을 했습니다. 또한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 등 네 편의 옥중서신을 써서 온 세계에 흩어진 교회를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로마의 구석 조그만 셋집 감옥에서 바울이 시작한 복음역사는 지극히 미미해 보였습니다. 수십만 평의 궁전에서 수만 명의 군대와 방백들을 호령하며 로마제국을 다스리던 황제에 비하면 그의 존재는 그야말로 하찮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셋집에서 일어난 바울의 일대일 성경 공부는 로마의 군인들을 변화시키고, 고관들을 변화시키고, 로마 사람들을 구원해 나갔습니다. 누가는 특히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는 말로 사도행전을 끝맺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역사가 30년 만에 세계의 수도 로마에서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는 말씀 가르치는 역사가 그 후에도 계속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행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AD63년에 풀려났다가 66년 네로 황제의 대 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으며, 그 후에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쓰고, AD67년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대일 말씀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네로 황제의 대박해로 인해서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에서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으며, 복음은 누룩과 같이 온 로마에 퍼졌습니다. 그 결과 AD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일대일 제자 양성을 한 지 약 250년 만에 로마는 복음으로 정복되었습니다. 복음은 중세 유럽을 덮었지만 세상과 타협하고 겉모양은 그럴싸 했는데 속까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복음 신앙을 새롭게 덧입고 근세에 독일과 영국, 미국에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은 다시 우리가 파송한 가정 교회들을 통해서 유럽과 미국, 남미, CIS, 중국과 모슬렘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집니다. 저희들이 이 소망을 가지고 생명의 복음,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은 다른 책과 달리 끝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9장부터는 오늘날 우리가 써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사도바울과 같은 믿음의 확신과 뜨거운 열정과 불타는 목자의 심정을 허락해 주셔서 우리를 통해서 봄학기 신사도행전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75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