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05행15강(17:1-18:22)/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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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사도행전 제 15 강
말씀 / 사도행전 17:1-18:22
요절 / 사도행전 18:9,10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후반부를 배우고자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에서 전도했습니다. 특히 그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면서 영적 침체에 빠졌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큰 일을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전도(17:1-9).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규례대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영광 가운데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바울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에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핍박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시장의 깡패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당시 시장 바닥에서 놀고 있던 건달들인 구마적, 신마적, 시라소니, 김두한 등을 다 동원해서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그리고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러자 야손과 및 그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렀습니다. “이 놈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있소. 이들이 가이사의 명을 어기고 다른 임금, 곧 예수를 선전하고 있소. 이들을 당장 쫓아내지 않으면 이 도시가 완전히 예수판이 될 것이요.” 그들은 바울 일행이 반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리와 읍장들이 소동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은 어떤 점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합니까? 어떤 시대든지 그 시대는 나름대로의 가치관, 생활양식, 전통이 있습니다. 우상문화, 미신문화가 있고 그런 것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전함으로 그 시대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존 사회 질서에 도전장을 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존 사회를 떠받들던 근간을 흔들기도 하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려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시 노예 제도가 있었는데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평등의 관계를 주장합니다. 조상신 숭배를 부정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도록 가르칩니다. 이기적인 삶을 회개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섬기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반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세계관을 바꾸지 아니하면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 자기 중심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게 하고 참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며 죄의 세력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둘째, 베뢰아 전도(17:10-15). 핍박을 많이 받게 되자 형제들이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여기서 ‘신사적이었다’는 말을 공동번역에서 보면 ‘open minded’로서, ‘트인 마음을 가졌다’ ‘겸손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산상보훈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로서, 절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영적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단지 신사적이고 간절한 심령으로 말씀을 받는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은 학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묻힌 보화와도 같습니다. 말씀 안에는 무궁무진하고 진기한 보화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골로새서 2:3절에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말씀 속에 있는 보화를 캐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말씀의 세계로 파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누가 말씀을 요리해서 입에 떠 넣어 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고, 자신이 직접 말씀을 요리해서 먹어봐야만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은 대로 실생활에서 순종할 때 말씀의 깊은 맛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말씀을 받지 않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했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아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덴을 개척하는 바울(17:16-34)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공식적인 우상만 3백개, 이런저런 신상은 무려 3만여 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우상들과 신상들은 모두 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바울의 눈에는 이것들이 모두 가증스런 우상들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바울은 분노를 어떻게 승화시켰습니까?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과도 쟁론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로서 쾌락주의자들이고,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로서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쾌락주의는 죽으면 끝이라는 사상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또한 금욕주의자들은 육체의 욕구를 제어함으로써 행복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내부에서만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즉 감옥 안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 한들 무슨 구원이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영접해야만 근본문제를 해결받고, 참된 행복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했습니다. 당시 아레오바고는 재판 기능이 확대되어 교육의 감독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새 철학과 종교의 도입을 관제하는 권위를 포함하고, 그 선교자를 회의에 호출하여 신분 심사를 행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2,23). 아덴 사람들의 신관은 범신론이자, 다신교였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모든 세계에 다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주의 신 제우스를 비롯해서, 태양에는 아폴론, 바다에는 포세이돈, 술에는 박카스, 지혜의 신 아테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신들은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동물이 되기도 하고, 생명 없는 물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덴의 신관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그저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신들에게 그대로 투영시켜 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사랑과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철학과 사상과 변론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들이 난무하고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덴사람들은 저마다 철학자들이요, 변론가들이요, 교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테네 시가지를 걸을 때에 철학자를 만나지 않고는 10m를 전진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말쟁이들, 철학자들, 변론가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덴은 날이 갈수록 우상들이 많아지고 이상한 종교들과 변론가들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헷갈려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를 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다” “그 분이 모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들을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절대 유일하신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왔고 지금도 그 분께서 이 세상만물들을 다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주장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 사상이었습니다. 신명기 6:4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당시 아덴 사람들은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인들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 새로운 노래, 새로운 TV프로, 새로운 패션, 새로운 종교,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찾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파고드는 대중문화는 아예 문화의 수준을 뛰어 넘어서 이 시대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서태지, HOT등이 설치더니, 요즘은 god, 신화, 동방신기, 보아 등 이상한 이름의 연예인들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6,70년대가 산업화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민주화의 시대였고, 90년대 이후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오락적인 대중문화에 젖어 들어가 있습니다. 1986년에 미국의 문화 비평가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이라는 사람이 미국 문화를 가리켜서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문화가 되어 버렸다고 혹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죽도록 쾌락을 즐기는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오염이 심각하다고 말하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화 오염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무리 죄악된 것이라도 그 위에다가 문화라는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덮어놓으면 합리화가 됩니다. 신세대문화, 페미니즘 문화, 동성애문화, 인터넷문화, 동거문화, 십대 문화 등등 이런 식으로 포장을 합니다. 전혀 죄의식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사상과 철학과 종교와 쓰레기 문화들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물질과 쾌락과 연예스타들이 우상처럼 군림하며 이 시대의 타락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27b,28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셔서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동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같이 30,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전에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거짓우상을 섬기고, 무지하게 행했을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회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저희들이 아덴사람들과 같이 뭐 새로운 것이 없는가 끊임없이 새로운 재미와 새로운 지적 유희와 새로운 쾌락을 찾아 방황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인생의 참다운 목적을 회복해야만 되겠습니다.
바울의 아덴사역은 이전에 다른 사역지 만큼의 열매와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덴사람들의 마음 밭은 교만했고, 자기 생각들이 강했고,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레오바고 관원인 디오누시오와 귀족부인 몇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저희들도 오늘날 캠퍼스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학생들이 아덴사람들처럼 자기 생각이 강하고, 그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우상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복음역사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이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대적인 가치관을 심을 때에 몇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넷째, 고린도를 개척하는 바울(18:1-22)
바울은 이후에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거기서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브리스길라인데 그들은 글라우디오 때에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이탈리야로부터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습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들로 인해서 힘을 얻고 말씀 연구에 전념하자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말씀에 충만하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밝히 전한 것입니다. 그러자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회당 옆이었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앞에서는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증거했는데 갑자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요? 왜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것이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두려움이 바울을 심하게 위축시켰습니다. 그 두려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과연 고린도 사람들, 유럽 사회 사람들에게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유럽 첫 도시 빌립보로부터 시작하여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실라는 너무 고생했습니다. 유럽 사회의 물질주의, 우상문화에 부딪쳤고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에 부딪쳤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유럽 사회의 대표적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는 철학의 도시요, 우상 숭배의 도시, 물질적 번영의 도시, 그로 인한 쾌락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교회 내에서도 정욕의 문제가 심각했을 정도로 도시 자체가 정욕이 심각했습니다. 고린도는 소돔 고모라 같은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그런 고린도에서 먹혀 들어갈 것인가 두려웠습니다. 바울은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또 바울은 이제까지 복음을 전파해 오다가 도망을 다니고 돌에도 맞고 매를 맞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게 되자 고린도에 와서는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영적 승리를 체험하고 나서 ‘주여 이제는 족하오니 죽여 주옵서소’라고 한 것과 같이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면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게 여겨지고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꾸 숨게 되고, 핸드폰도 꺼놓고 사람들을 피하게 됩니다. 목자님과 말씀공부도 안하고자 합니다. 말씀공부에 와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찬송가도 잘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가만히 잠잠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입을 벌려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태권도할 때도 자꾸만 기합을 지르고 발을 뻗어야만 상대방을 제압할 수가 있습니다. “얏, 오~오~오” 이처럼 우리가 자꾸만 입을 벌려서 말을 할 때에 힘이 나고 스피릿이 생겨서 영적 위기와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힘들수록 더 열심히 1:1을 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동역자들과 대화하며 말을 많이 해야만 합니다. 특히 소리내서 성경을 읽고, 통성으로 기도를 하고,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시편 42:5절에서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찬송을 부르라고 자신의 영혼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소리내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할 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영력이 생겨나서 어려운 환경과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사 위로해 주시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고린도 지역에서 로마서를 집필했는데 로마서 8:31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6,37).”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땅에 복음의 대적자들 보다 오히려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 더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자 마음이 준비된 자들, 복음의 진리에 갈급한 자들, 영적인 소원이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대적자들이 많고, 좋은 양들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오히려 가능성 있는 양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른 볼 때는 내가 처한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고, 어렵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오히려 내가 처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치고 힘들 때 승리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도약의 날개를 펴고 고린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서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지역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영접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영적 위기와 침체를 극복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2절부터 17절에 보면 또다시 유대인들의 핍박이 찾아왔습니다. 아가야 지방에 총독이 교체되는 시기를 틈타 신임총독 갈리오에게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고소사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는 갈리오가 정의로운 재판장이어서 이렇게 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사 대적자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사 바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 에베소로 갔습니다. 에베소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지만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이사랴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날마다 묵상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잠잠하지 말고 전하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보호하시고 은혜와 능력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7:1-18:22
요절 / 사도행전 18:9,10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후반부를 배우고자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에서 전도했습니다. 특히 그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면서 영적 침체에 빠졌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큰 일을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전도(17:1-9).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규례대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영광 가운데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바울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에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핍박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시장의 깡패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당시 시장 바닥에서 놀고 있던 건달들인 구마적, 신마적, 시라소니, 김두한 등을 다 동원해서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그리고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러자 야손과 및 그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렀습니다. “이 놈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있소. 이들이 가이사의 명을 어기고 다른 임금, 곧 예수를 선전하고 있소. 이들을 당장 쫓아내지 않으면 이 도시가 완전히 예수판이 될 것이요.” 그들은 바울 일행이 반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리와 읍장들이 소동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은 어떤 점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합니까? 어떤 시대든지 그 시대는 나름대로의 가치관, 생활양식, 전통이 있습니다. 우상문화, 미신문화가 있고 그런 것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전함으로 그 시대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존 사회 질서에 도전장을 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기존 사회를 떠받들던 근간을 흔들기도 하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려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시 노예 제도가 있었는데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평등의 관계를 주장합니다. 조상신 숭배를 부정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도록 가르칩니다. 이기적인 삶을 회개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섬기는 삶을 살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반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세계관을 바꾸지 아니하면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 자기 중심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게 하고 참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며 죄의 세력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둘째, 베뢰아 전도(17:10-15). 핍박을 많이 받게 되자 형제들이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여기서 ‘신사적이었다’는 말을 공동번역에서 보면 ‘open minded’로서, ‘트인 마음을 가졌다’ ‘겸손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산상보훈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로서, 절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영적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단지 신사적이고 간절한 심령으로 말씀을 받는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은 학자적인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이 묻힌 보화와도 같습니다. 말씀 안에는 무궁무진하고 진기한 보화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골로새서 2:3절에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말씀 속에 있는 보화를 캐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말씀의 세계로 파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누가 말씀을 요리해서 입에 떠 넣어 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고, 자신이 직접 말씀을 요리해서 먹어봐야만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은 대로 실생활에서 순종할 때 말씀의 깊은 맛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말씀을 받지 않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했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아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덴을 개척하는 바울(17:16-34)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공식적인 우상만 3백개, 이런저런 신상은 무려 3만여 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우상들과 신상들은 모두 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바울의 눈에는 이것들이 모두 가증스런 우상들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바울은 분노를 어떻게 승화시켰습니까?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과도 쟁론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로서 쾌락주의자들이고,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로서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쾌락주의는 죽으면 끝이라는 사상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또한 금욕주의자들은 육체의 욕구를 제어함으로써 행복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 내부에서만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즉 감옥 안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 한들 무슨 구원이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영접해야만 근본문제를 해결받고, 참된 행복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했습니다. 당시 아레오바고는 재판 기능이 확대되어 교육의 감독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새 철학과 종교의 도입을 관제하는 권위를 포함하고, 그 선교자를 회의에 호출하여 신분 심사를 행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2,23). 아덴 사람들의 신관은 범신론이자, 다신교였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모든 세계에 다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주의 신 제우스를 비롯해서, 태양에는 아폴론, 바다에는 포세이돈, 술에는 박카스, 지혜의 신 아테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신들은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동물이 되기도 하고, 생명 없는 물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덴의 신관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그저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신들에게 그대로 투영시켜 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사랑과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철학과 사상과 변론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들이 난무하고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덴사람들은 저마다 철학자들이요, 변론가들이요, 교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테네 시가지를 걸을 때에 철학자를 만나지 않고는 10m를 전진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말쟁이들, 철학자들, 변론가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덴은 날이 갈수록 우상들이 많아지고 이상한 종교들과 변론가들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헷갈려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를 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다” “그 분이 모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들을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절대 유일하신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왔고 지금도 그 분께서 이 세상만물들을 다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주장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 사상이었습니다. 신명기 6:4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당시 아덴 사람들은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인들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 새로운 노래, 새로운 TV프로, 새로운 패션, 새로운 종교,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찾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파고드는 대중문화는 아예 문화의 수준을 뛰어 넘어서 이 시대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서태지, HOT등이 설치더니, 요즘은 god, 신화, 동방신기, 보아 등 이상한 이름의 연예인들이 청소년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6,70년대가 산업화의 시대였다면, 80년대는 민주화의 시대였고, 90년대 이후는 문화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오락적인 대중문화에 젖어 들어가 있습니다. 1986년에 미국의 문화 비평가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이라는 사람이 미국 문화를 가리켜서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문화가 되어 버렸다고 혹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죽도록 쾌락을 즐기는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오염이 심각하다고 말하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문화 오염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무리 죄악된 것이라도 그 위에다가 문화라는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덮어놓으면 합리화가 됩니다. 신세대문화, 페미니즘 문화, 동성애문화, 인터넷문화, 동거문화, 십대 문화 등등 이런 식으로 포장을 합니다. 전혀 죄의식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사상과 철학과 종교와 쓰레기 문화들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물질과 쾌락과 연예스타들이 우상처럼 군림하며 이 시대의 타락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27b,28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셔서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동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같이 30,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전에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거짓우상을 섬기고, 무지하게 행했을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회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저희들이 아덴사람들과 같이 뭐 새로운 것이 없는가 끊임없이 새로운 재미와 새로운 지적 유희와 새로운 쾌락을 찾아 방황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인생의 참다운 목적을 회복해야만 되겠습니다.
바울의 아덴사역은 이전에 다른 사역지 만큼의 열매와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아덴사람들의 마음 밭은 교만했고, 자기 생각들이 강했고,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레오바고 관원인 디오누시오와 귀족부인 몇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저희들도 오늘날 캠퍼스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학생들이 아덴사람들처럼 자기 생각이 강하고, 그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우상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복음역사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이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대적인 가치관을 심을 때에 몇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넷째, 고린도를 개척하는 바울(18:1-22)
바울은 이후에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거기서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브리스길라인데 그들은 글라우디오 때에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이탈리야로부터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습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들로 인해서 힘을 얻고 말씀 연구에 전념하자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말씀에 충만하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밝히 전한 것입니다. 그러자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회당 옆이었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앞에서는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증거했는데 갑자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요? 왜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것이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두려움이 바울을 심하게 위축시켰습니다. 그 두려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과연 고린도 사람들, 유럽 사회 사람들에게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유럽 첫 도시 빌립보로부터 시작하여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실라는 너무 고생했습니다. 유럽 사회의 물질주의, 우상문화에 부딪쳤고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에 부딪쳤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유럽 사회의 대표적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는 철학의 도시요, 우상 숭배의 도시, 물질적 번영의 도시, 그로 인한 쾌락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교회 내에서도 정욕의 문제가 심각했을 정도로 도시 자체가 정욕이 심각했습니다. 고린도는 소돔 고모라 같은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그런 고린도에서 먹혀 들어갈 것인가 두려웠습니다. 바울은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또 바울은 이제까지 복음을 전파해 오다가 도망을 다니고 돌에도 맞고 매를 맞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게 되자 고린도에 와서는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영적 승리를 체험하고 나서 ‘주여 이제는 족하오니 죽여 주옵서소’라고 한 것과 같이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면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게 여겨지고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꾸 숨게 되고, 핸드폰도 꺼놓고 사람들을 피하게 됩니다. 목자님과 말씀공부도 안하고자 합니다. 말씀공부에 와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찬송가도 잘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가만히 잠잠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입을 벌려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태권도할 때도 자꾸만 기합을 지르고 발을 뻗어야만 상대방을 제압할 수가 있습니다. “얏, 오~오~오” 이처럼 우리가 자꾸만 입을 벌려서 말을 할 때에 힘이 나고 스피릿이 생겨서 영적 위기와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힘들수록 더 열심히 1:1을 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동역자들과 대화하며 말을 많이 해야만 합니다. 특히 소리내서 성경을 읽고, 통성으로 기도를 하고,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시편 42:5절에서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찬송을 부르라고 자신의 영혼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소리내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할 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영력이 생겨나서 어려운 환경과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사 위로해 주시고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고린도 지역에서 로마서를 집필했는데 로마서 8:31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6,37).”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땅에 복음의 대적자들 보다 오히려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 더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자 마음이 준비된 자들, 복음의 진리에 갈급한 자들, 영적인 소원이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대적자들이 많고, 좋은 양들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오히려 가능성 있는 양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른 볼 때는 내가 처한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고, 어렵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오히려 내가 처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치고 힘들 때 승리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도약의 날개를 펴고 고린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서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지역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영접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영적 위기와 침체를 극복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2절부터 17절에 보면 또다시 유대인들의 핍박이 찾아왔습니다. 아가야 지방에 총독이 교체되는 시기를 틈타 신임총독 갈리오에게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고소사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는 갈리오가 정의로운 재판장이어서 이렇게 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사 대적자들로부터 바울을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볼 때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사 바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 에베소로 갔습니다. 에베소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지만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이사랴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날마다 묵상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잠잠하지 말고 전하여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보호하시고 은혜와 능력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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