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05행14강(15:36-16:40)/ 마게도냐 환상을 본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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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사도행전 제 14 강 492
말씀 / 사도행전 15:36-16:40
요절 / 사도행전 16:9
마게도냐 환상을 본 바울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사도들은 예루살렘 총회를 열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 것을 배웠습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는 우리를 기쁘고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들을 도우면서 바리새파 신자들처럼 알게 모르게 율법을 강요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롭게 성장한 양들은 부담감 때문에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우리가 이전부터 지켜온 율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나 관습을 가르치기보다 복음진리를 가르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그 사람의 심령에 역사 할 때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것은 양들을 자유롭게 돕는다고 방목하지 말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총회 후에 사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지 못하고 단지 순수한 열정만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그의 진로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확장 진로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교 역사의 주체가 되셔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마게도냐 환상을 본 바울(15:36-16:10)
바울은 바나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 바울은 전도하고 끝내지 않고 양들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자 했습니다. 양육하기를 힘씀으로 개척된 교회들의 믿음이 굳어지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로 인해서 초대 교회는 내실이 있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하고 힘들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를 포용하고자 했지만 바울은 그러한 자세를 인간적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앞으로 선교 여행에 닥칠 위험을 생각할 때 힘만 뺄 것이라며 데려가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에게 긍휼이 없는 사람이라며 다투었습니다. 바나바는 감정이 격해져서 바로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버렸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했습니다. 누가가 바울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이후에 바울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면서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때로 교회는 리더들의 다툼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사역을 넘치게 축복하사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목자의 심정을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그를 십자가로 이끌었고, 그는 자기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마가복음을 썼는데 연약한 자를 강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잘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 용기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과 바울에게 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어려운 일들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롬8:28).
바울이 루스드라에 갔을 때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 모친은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신앙유산을 잘 이어받아서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딤후1:5).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칭찬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바울이 전격 스카웃해서 그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열정이 많고, 직선적이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남성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척역사를 이루는데 있어서 강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연약한 자들을 잘 이해하고 감당하는 데는 좀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눈물이 많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여성적 캐릭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배반을 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21절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할 때에 디모데만큼은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 동역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충성스러운 디모데를 바울의 평생 동지요, 영적인 아들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여러 성으로 다녀가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했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는 거짓 선생들로 인해서 혼란에 빠져있던 이방 교회들이 짐을 덜게 되었습니다. 복음 진리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감격하게 됩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 여행에 어떤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은 약소국 유대 청년으로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북쪽 지방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지만 교통이 두절되고 폭설이 생기고 강도를 만나는 등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겨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누가는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일이 원하는 대로 안 되고, 길이 막히자 매우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하다가 잘 되지 아니할 때 절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손으로 턱을 무릎 위에 괴고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안되면 되게 하라’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들이 닫혔습니다. 그들은 낙담하기 쉬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는 문들을 닫으심으로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그들을 막으심으로서 불행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사가 진전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원치 않게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풀리지 않는 일로 인해 고민하다가 깊은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꿈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고 빼빼 마른 손가락을 흔들며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help us! help us!” 마게도니야는 오늘날 그리스지방으로서 바다 건너 유럽 땅을 가리킵니다. 사실 특별한 준비나 물질도 없이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바울로서는 바다 건너 유럽 땅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얼른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마게도냐와 로마 등 유럽국가들은 아시아국가들을 침략해서 지배해 온 강대국들이었습니다. 피지배국이자 약소국 청년인 바울에게 있어서 이처럼 침략국이요, 강대국인 유럽국가들은 별로 상한 심정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보다는 침략과 수탈을 많이 당한 아시아국가들에게 대해서 훨씬 더 마음이 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바울의 행보를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도록 방향을 주셨을까요?
마게도냐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기 직전에 유럽세계를 평정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입니다. 이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럽문화의 한 축을 형성했던 헬레니즘문명을 꽃피웠던 바로 그 진원지였습니다. 헬레니즘 문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본주의 문화입니다. 이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민주주의 정치와 깊이 있는 사상 등으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로마가 정치적으로 세계를 정복한 후에도 헬레니즘 문명은 유럽세계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에서 배출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비롯해서,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등 수학자들은 지금까지도 인류의 정신사 속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 사상으로는 결코 인간의 내면문제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서 철학을 발달시키고, 과학기술과 민주 정치제도를 발달시켜서 어느 정도까지는 풍요로운 인간세상을 만들어 놓았지만, 인간의 내면세계, 영적인 세계는 결코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잘 먹고, 잘 살고, 고상하고, 멋있는 척 하였지만 그들의 내면은 피골이 상접한 빈민과도 같았습니다. 흡사 사도바울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 빼빼 마른 청년과도 같이 영적인 기갈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환상을 통해서 선진국 마게도냐의 영적인 상태를 보게 하시고 그들을 향한 절박한 심정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먼저 복음이 유럽세계를 변화시킴으로서 그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특별한 계획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역사의 계획이자 주권적인 섭리였습니다. 잠언 16: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름대로의 계획과 비젼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고 원대한 청사진을 마련해 놓고 우리 각자를 인도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도 본래는 인도선교사로 나가고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있는지 조차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조선 땅으로 오게 되었고 마침내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심겨지게 된 것입니다. 리빙스턴도 본래는 중국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지만 아편전쟁 때문에 중국에서 더 이상 영국선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프리카 땅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복음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UBF운동도 처음에 동남아선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제주도를 개척하였습니다. 베트남 선교비젼가운데 월남 파병용사를 데려다가 강연을 듣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의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최초의 UBF선교사도 싱가포르로 파송하였습니다. 초기 UBF신문의 제목도 <동남아의 주춧돌>이었습니다. 60년대 UBF 기도제목을 보면 주로 동남아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동남아의 주역이 되자” “동남아는 우리의 밥이라” “동남아가 우리를 부른다” 주로 그런 구호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동남아에 길이 열리지 않았고 싱가포르에 파송한 선교사도 도망가 버렸습니다. 마가와 같이 그는 현재 세계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도 선진국인 서독의 문을 여셨습니다. 당시 서독에서 한국의 간호사들을 이민으로 받아들였는데 바로 그때 우리 UBF선교사들이 거기 끼어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독일어 abcd도 모르는 간호사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한 달 동안 일용할 양식 훈련을 시켜서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크게 축복하사 70년대 중반에 서독UBF 선교사가 100여명에 육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결혼적령기가 되어 본국에 돌아와서 가정을 이루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서독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80년대에는 캐나다와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아메리카대륙과 일본, 90년대에는 러시아와 중국, 중동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등이 차례로 개척되게 하셨습니다. 지난 40년의 UBF선교역사를 자세히 살펴볼 때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개인의 계획과 뜻에 따라 움직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때그때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고 이에 순종하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내어 보내사 광활한 대륙들이 개척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모슬렘이나 힌두나 중국과 북한에 선교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 제목을 주셨습니다. 모슬렘이나 힌두권, 중국 등의 앞문은 닫혀 있지만 뒷문은 열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마게도냐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 마게도냐는 캠퍼스 지성인들입니다. 캠퍼스는 이 민족과 세계의 장래를 좌우하는 선교 전략지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히 새내기들은 당장에는 캠퍼스의 낭만을 찾지만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습니다. 취직하기도 어려운 현실로 인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시간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영혼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겉은 웃지만 죄 문제로 고통 하는 그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서 사랑에 굶주린 그들의 고독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목자님들의 따스한 사랑을 찾고 있는 그들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이들은 속으로 내심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목자님 제발 건너와서 저를 도와주세요.” “제 고민을 말씀으로 해결해 주세요” 우리가 이 절규의 음성을 듣고 양들에게 건너가서 도와 줄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적극적으로 유럽 선교 방향에 순종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는 루디아라는 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16:11-15)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바울은 이 성에서 수일을 지내었습니다. 혹시 환상에서 보던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기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전도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 문을 여십니다. 바울은 유대인 남자로서의 선입견을 버리고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그 중에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성의 염료를 가져와 판매하는 무역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루디아는 이루디아사모님처럼 인상이 좋고, 싹싹하고, 파워풀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본래부터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는 유럽 개척 역사의 여자 조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했습니다. 이로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 개척역사는 순풍의 돛을 단 것처럼 술술술 잘 풀려 나갔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좇아 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환경을 예비하시고 역사를 주관해 가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행하고자 하면 잘 될 것 같지만 이상하게 일이 꼬이고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과 욕심을 부인하고 겸손하게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사 앞서 가시며 우리의 사역과 인생 길을 축복해 주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감옥의 간수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16-40). 이번에도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여종은 점으로 그 주인을 크게 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그 일행을 좇아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날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여자로 인하여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돌이켜 그 귀신에게 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높이고 또 자기를 높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높이는 귀신의 역사로 인하여 심히 괴로워하다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시장의 관원들에게 끌어갔습니다. 그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나음을 받을 때 기뻐해야 했지만 그들은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가치관이 전도되었습니다. 또 영혼을 귀신에게 팔아 돈 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매우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무슨 죄목으로 고소를 했습니까?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21).” 그러자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때에 “주여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마게도냐로 가라고 환상을 보여주실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는 하나도 안 도와주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나 선교사 못해 먹겠습니다.” 하면서 온갖 불평과 불신적인 소리와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 차기 쉬웠을 것입니다. 또한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사람이 이상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깊은 옥에서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운 상태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원망과 불평 대신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기도밖에 할 것이 있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찬미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고난을 당하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12).”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죄수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놀라운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26).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연단 하시고 그들의 기도와 찬미소리를 들으시고 극적인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들어가게 하시고, 감옥 속에서 극적인 기적의 역사를 베푸신 데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수들을 구원코자 하는 놀라운 계획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문득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때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이 말을 듣고 간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옥문이 열렸으면 죄수들은 당연히 도망가야 할텐데 오히려 자결하려는 자신을 걱정하는 죄수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서 바울 앞에 엎드렸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전에는 바울을 매로 때리고 옷을 찢고 감옥에 내동댕이쳤던 간수가 이제는 순한 양이 되어서 바울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바울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바울은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했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바울은 결국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에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로 인해 빌립보에 두 가정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 역사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으면 열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캠퍼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청년 대학생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번 구정 연휴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5:36-16:40
요절 / 사도행전 16:9
마게도냐 환상을 본 바울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사도들은 예루살렘 총회를 열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한 것을 배웠습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는 우리를 기쁘고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들을 도우면서 바리새파 신자들처럼 알게 모르게 율법을 강요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롭게 성장한 양들은 부담감 때문에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우리가 이전부터 지켜온 율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나 관습을 가르치기보다 복음진리를 가르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그 사람의 심령에 역사 할 때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것은 양들을 자유롭게 돕는다고 방목하지 말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총회 후에 사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지 못하고 단지 순수한 열정만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그의 진로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확장 진로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교 역사의 주체가 되셔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마게도냐 환상을 본 바울(15:36-16:10)
바울은 바나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 바울은 전도하고 끝내지 않고 양들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자 했습니다. 양육하기를 힘씀으로 개척된 교회들의 믿음이 굳어지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로 인해서 초대 교회는 내실이 있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하고 힘들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를 포용하고자 했지만 바울은 그러한 자세를 인간적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앞으로 선교 여행에 닥칠 위험을 생각할 때 힘만 뺄 것이라며 데려가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에게 긍휼이 없는 사람이라며 다투었습니다. 바나바는 감정이 격해져서 바로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버렸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했습니다. 누가가 바울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이후에 바울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면서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때로 교회는 리더들의 다툼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사역을 넘치게 축복하사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마가에 대한 바나바의 목자의 심정을 축복하셨습니다. 마가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그를 십자가로 이끌었고, 그는 자기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마가복음을 썼는데 연약한 자를 강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잘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 용기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과 바울에게 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어려운 일들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롬8:28).
바울이 루스드라에 갔을 때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 모친은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신앙유산을 잘 이어받아서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딤후1:5).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칭찬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바울이 전격 스카웃해서 그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열정이 많고, 직선적이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남성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척역사를 이루는데 있어서 강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연약한 자들을 잘 이해하고 감당하는 데는 좀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눈물이 많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여성적 캐릭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배반을 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21절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할 때에 디모데만큼은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 동역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충성스러운 디모데를 바울의 평생 동지요, 영적인 아들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여러 성으로 다녀가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했습니다.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는 거짓 선생들로 인해서 혼란에 빠져있던 이방 교회들이 짐을 덜게 되었습니다. 복음 진리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감격하게 됩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 여행에 어떤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은 약소국 유대 청년으로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북쪽 지방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지만 교통이 두절되고 폭설이 생기고 강도를 만나는 등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겨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누가는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일이 원하는 대로 안 되고, 길이 막히자 매우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하다가 잘 되지 아니할 때 절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손으로 턱을 무릎 위에 괴고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안되면 되게 하라’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들이 닫혔습니다. 그들은 낙담하기 쉬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는 문들을 닫으심으로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그들을 막으심으로서 불행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역사가 진전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원치 않게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풀리지 않는 일로 인해 고민하다가 깊은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꿈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고 빼빼 마른 손가락을 흔들며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세요.” “help us! help us!” 마게도니야는 오늘날 그리스지방으로서 바다 건너 유럽 땅을 가리킵니다. 사실 특별한 준비나 물질도 없이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바울로서는 바다 건너 유럽 땅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얼른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마게도냐와 로마 등 유럽국가들은 아시아국가들을 침략해서 지배해 온 강대국들이었습니다. 피지배국이자 약소국 청년인 바울에게 있어서 이처럼 침략국이요, 강대국인 유럽국가들은 별로 상한 심정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보다는 침략과 수탈을 많이 당한 아시아국가들에게 대해서 훨씬 더 마음이 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바울의 행보를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도록 방향을 주셨을까요?
마게도냐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기 직전에 유럽세계를 평정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입니다. 이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럽문화의 한 축을 형성했던 헬레니즘문명을 꽃피웠던 바로 그 진원지였습니다. 헬레니즘 문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본주의 문화입니다. 이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민주주의 정치와 깊이 있는 사상 등으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로마가 정치적으로 세계를 정복한 후에도 헬레니즘 문명은 유럽세계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헬라에서 배출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을 비롯해서,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등 수학자들은 지금까지도 인류의 정신사 속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 사상으로는 결코 인간의 내면문제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서 철학을 발달시키고, 과학기술과 민주 정치제도를 발달시켜서 어느 정도까지는 풍요로운 인간세상을 만들어 놓았지만, 인간의 내면세계, 영적인 세계는 결코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잘 먹고, 잘 살고, 고상하고, 멋있는 척 하였지만 그들의 내면은 피골이 상접한 빈민과도 같았습니다. 흡사 사도바울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 빼빼 마른 청년과도 같이 영적인 기갈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환상을 통해서 선진국 마게도냐의 영적인 상태를 보게 하시고 그들을 향한 절박한 심정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먼저 복음이 유럽세계를 변화시킴으로서 그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특별한 계획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역사의 계획이자 주권적인 섭리였습니다. 잠언 16: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름대로의 계획과 비젼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고 원대한 청사진을 마련해 놓고 우리 각자를 인도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도 본래는 인도선교사로 나가고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있는지 조차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조선 땅으로 오게 되었고 마침내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심겨지게 된 것입니다. 리빙스턴도 본래는 중국선교사로 가고자 하였지만 아편전쟁 때문에 중국에서 더 이상 영국선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프리카 땅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복음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UBF운동도 처음에 동남아선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제주도를 개척하였습니다. 베트남 선교비젼가운데 월남 파병용사를 데려다가 강연을 듣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의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최초의 UBF선교사도 싱가포르로 파송하였습니다. 초기 UBF신문의 제목도 <동남아의 주춧돌>이었습니다. 60년대 UBF 기도제목을 보면 주로 동남아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동남아의 주역이 되자” “동남아는 우리의 밥이라” “동남아가 우리를 부른다” 주로 그런 구호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동남아에 길이 열리지 않았고 싱가포르에 파송한 선교사도 도망가 버렸습니다. 마가와 같이 그는 현재 세계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도 선진국인 서독의 문을 여셨습니다. 당시 서독에서 한국의 간호사들을 이민으로 받아들였는데 바로 그때 우리 UBF선교사들이 거기 끼어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독일어 abcd도 모르는 간호사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고, 한 달 동안 일용할 양식 훈련을 시켜서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크게 축복하사 70년대 중반에 서독UBF 선교사가 100여명에 육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결혼적령기가 되어 본국에 돌아와서 가정을 이루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서독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80년대에는 캐나다와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아메리카대륙과 일본, 90년대에는 러시아와 중국, 중동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등이 차례로 개척되게 하셨습니다. 지난 40년의 UBF선교역사를 자세히 살펴볼 때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나 개인의 계획과 뜻에 따라 움직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때그때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고 이에 순종하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내어 보내사 광활한 대륙들이 개척되게 하셨습니다. 지금 모슬렘이나 힌두나 중국과 북한에 선교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 제목을 주셨습니다. 모슬렘이나 힌두권, 중국 등의 앞문은 닫혀 있지만 뒷문은 열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마게도냐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 마게도냐는 캠퍼스 지성인들입니다. 캠퍼스는 이 민족과 세계의 장래를 좌우하는 선교 전략지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히 새내기들은 당장에는 캠퍼스의 낭만을 찾지만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습니다. 취직하기도 어려운 현실로 인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시간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영혼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겉은 웃지만 죄 문제로 고통 하는 그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서 사랑에 굶주린 그들의 고독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목자님들의 따스한 사랑을 찾고 있는 그들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이들은 속으로 내심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목자님 제발 건너와서 저를 도와주세요.” “제 고민을 말씀으로 해결해 주세요” 우리가 이 절규의 음성을 듣고 양들에게 건너가서 도와 줄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처럼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적극적으로 유럽 선교 방향에 순종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는 루디아라는 양을 준비해 두셨습니다(16:11-15)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바울은 이 성에서 수일을 지내었습니다. 혹시 환상에서 보던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기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전도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 문을 여십니다. 바울은 유대인 남자로서의 선입견을 버리고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그 중에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성의 염료를 가져와 판매하는 무역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루디아는 이루디아사모님처럼 인상이 좋고, 싹싹하고, 파워풀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본래부터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는 유럽 개척 역사의 여자 조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했습니다. 이로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 개척역사는 순풍의 돛을 단 것처럼 술술술 잘 풀려 나갔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좇아 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환경을 예비하시고 역사를 주관해 가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행하고자 하면 잘 될 것 같지만 이상하게 일이 꼬이고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과 욕심을 부인하고 겸손하게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사 앞서 가시며 우리의 사역과 인생 길을 축복해 주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감옥의 간수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16-40). 이번에도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여종은 점으로 그 주인을 크게 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그 일행을 좇아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날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여자로 인하여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돌이켜 그 귀신에게 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높이고 또 자기를 높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높이는 귀신의 역사로 인하여 심히 괴로워하다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시장의 관원들에게 끌어갔습니다. 그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나음을 받을 때 기뻐해야 했지만 그들은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가치관이 전도되었습니다. 또 영혼을 귀신에게 팔아 돈 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매우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무슨 죄목으로 고소를 했습니까?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0,21).” 그러자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때에 “주여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마게도냐로 가라고 환상을 보여주실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는 하나도 안 도와주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나 선교사 못해 먹겠습니다.” 하면서 온갖 불평과 불신적인 소리와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 차기 쉬웠을 것입니다. 또한 슬픔과 아픔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사람이 이상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깊은 옥에서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운 상태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원망과 불평 대신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기도밖에 할 것이 있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찬미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감사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고난을 당하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12).” 그들의 기도와 찬송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죄수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놀라운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26).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연단 하시고 그들의 기도와 찬미소리를 들으시고 극적인 기적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들어가게 하시고, 감옥 속에서 극적인 기적의 역사를 베푸신 데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수들을 구원코자 하는 놀라운 계획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문득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때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이 말을 듣고 간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옥문이 열렸으면 죄수들은 당연히 도망가야 할텐데 오히려 자결하려는 자신을 걱정하는 죄수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서 바울 앞에 엎드렸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전에는 바울을 매로 때리고 옷을 찢고 감옥에 내동댕이쳤던 간수가 이제는 순한 양이 되어서 바울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바울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바울은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했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바울은 결국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에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로 인해 빌립보에 두 가정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교 역사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으면 열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캠퍼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청년 대학생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알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번 구정 연휴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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