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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5행13강(15:1-35)/ 예루살렘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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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3,811회 작성일 05-02-04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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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제 13 강
                                  예루살렘 총회
말씀: 사도행전 15:1-35
요절: 사도행전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우리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공부하면서 바울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가르친 말씀에 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당한 고난은 교회 밖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서 불어 닥친 고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의 복음의 진리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총회에서의 교리논쟁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복음의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요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확증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이방인 형제들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은혜와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 총회의 역사적인 의의를 되짚어보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기 기도합니다. 또한 혹시라도 우리 안에 있을지 모르는 다른 복음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복음의 진리만을 굳게 붙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복음진리를 수호한 바울과 바나바 (1-5)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 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안디옥 교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유대에서 온 형제들이 이방인 형제들에게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우리 목자님들 중에 몇 분이 선교지에 나아가 이방 양들에게 말씀공부를 시켜 주었다면 이방 양들이 선교님들에게 배울 때처럼 청종치 않겠습니까?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이방인 형제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잘 듣고 순수하게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성격 급한 어떤 형제는 말씀을 받자마자 할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 2:4절에서 이들을 가리켜 ‘거짓 형제’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형제의 이름으로 찾아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자유를 빼앗고 율법의 종 삼고자 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이방인 형제들이 괴로움과 미혹을 당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형제들의 얼굴이 예전처럼 밝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근심하며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양들의 모습을 본 목자 바울과 바나바는 영적으로 너무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a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바울과 바나바는 격렬한 논쟁을 하며 거짓 형제들과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성격이 좀 더 괄괄한 바울은 핏대를 올리며 때로는 책상을 쾅쾅 쳐가면서 싸웠을 것입니다. 목자들이 교회 안에서 이렇게 싸우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 형제들은 실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말다툼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함입니다.(갈2:5) 복음의 진리는 결코 선택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도 좋고 율법도 다 좋은데 복음이 훨씬 더 좋다거나, 복음이 좋긴 좋은데 할례나 경건한 율법, 고상한 사상을 더하면 더 좋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것으로서 완전무결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복음을 상대화시키는 죄악입니다. 이때 복음은 그 생명력과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서구의 기독교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교회가 갈수록 텅텅 비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갖가지 이론과 사상, 신학으로 복음을 상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 복음의 진리는 얼마나 쉽고 가벼운 것입니까? 그런데 왜 유대에서 온 형제들은 거기에 할례를 더하고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지우고자 한 것일까요? 아마도 그들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믿는 것을 힘들어 하였던 것 같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죄에 시달리고 해맬 때는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왠지 감정적이고 너무나 가변적이라서 구원의 명확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보다 확실한 구원의 조건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 때 할례는 객관적인 구원의 조건이 될 만해 보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도 할례를 명하셨고 그리스도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성경적인 근거도 있고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보다 더 완전한 구원의 조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과 성경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영적 무지의 산물일 뿐입니다. 창세기15장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할례와는 무관하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럼 할례는 무엇입니까? 제가 창 17: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당신의 소유된 백성, 왕 같은 제사장 나라로 삼음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살에 새기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 없이 할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게 하시려는 은혜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결코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할례의 논쟁은 은혜의 수단과 구원의 조건을 분별치 못한 영적인 무지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영적인 무지와 어리석은 주장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연약한 형제들을 미혹하고 믿음에서 실족케 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구원의 증거로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구원받았음을 확증하기 위해 방언받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방언받기를 간구하는 부흥집회를 엽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흥집회를 다녀도 방언을 받지 못하는 분들은 불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다른 형제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보이려고 거짓으로 방언을 하는 외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니합 도지기빠 에식외 는하 을언방.”  저도 무슨 말 했는지 모릅니다. 무슨 말하는지 모르는 것이 방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을 구원의 증거로 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방언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어떤 분은 말씀 받을 때나 기도할 때에 마음에 감동이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감동과 눈물이 없으며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사실과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감동이 없고 눈물이 없어도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복음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 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우리의 창조자시요, 구원자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비록 감동과 눈물이 없어도 이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리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위에 굳게 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복음의 진리에 어떠한 것도 더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핏 값으로 허락하신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온전한 은혜와 자유를 누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b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할례에 대한 논쟁은 안디옥 교회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는 모두 영향을 받고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형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도움을 청하고자 바울과 바나바 및 그들 중에 몇 명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역사를 보고했습니다. 그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발언권을 얻어 후에  일어나 말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5) 그들도 이방인들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마땅히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죄악된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 일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은 잘 지킬 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아마도 바리새파 형제들은 복음과 율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내세우는 유대교와 복음의 진리를 앞세우는 기독교는 결코 양립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유대교에서 할례와 율법을 제거하면 유대교는 뿌리부터 무너지게 됩니다. 한편 기독교에 율법을 도입하게 되면 복음의 생명력은 상실되고 기독교는 형식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Ⅱ. 복음 진리의 승리 (6-35)

  6,7a절을 보십시오.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총회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바리새파 형제들의 주장에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간의 치열한 변론과 설전이 오고 갔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형제들 중에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높은 사회적 지위와 학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바리새파 형제들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을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학문을 근거로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고, 모세도 할례를 행했으며, 특히 구주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사도님들, 장로님들도 다 할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는 이들의 주장은 할례의 당위성을 주장하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는 바리새파 형제들의 주장이 압도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 중대한 발언을 하였습니다. 7b-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베드로는 12년 전의 고넬료 사건을 상기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래 전부터 자기를 택하셨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고넬료 사건에 나타나 있는 객관적인 성령의 역사를 근거로 이방인들을 아무 조건 없이 영접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시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분간치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 증거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그런데도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하는 죄악입니다. 또 베드로는 율법이 조상과 우리도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대로 율법의 멍에는 누구도 멜 수 없는 무겁고 힘든 멍에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율법의 멍에를 메고 구원을 얻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롬7:24). 율법의 멍에를 메려는 자는 다 이런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의 은혜 가운데 송아지같이 뛰놀던 양들 목에 무거운 멍에를 탁 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명백한 이율배반이요 중대한 모순이었습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1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베드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오직 주 예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줄 믿노라고 단호히 선언하였습니다. 이것 외에 우리의 구원에 대한 다른 복음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나의 선하고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영적인 혼돈에 빠지길 잘합니다. 그러나 로마서1:17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처음도 믿음이요 나중도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양식과 소감을 열심히 쓰고 양도 열심히 치고 하나님의 역사라면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많은 수고를 했다해도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하다는 말은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이 말을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는 모든 수고를 한 후에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야 진정으로 은혜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율법적인 생각, 응과 응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오직 주 예수의 은혜만을 붙들고 그의 은혜를 아는데서 자라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말에 그 동안 열심히 변론을 하던 모든 무리들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이 나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 이방인 가운데 이루신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체험한 그 역사와 동일선상에 있음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나섰습니다. 16-1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실 때 유대의 남은 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는 고넬료 사건이나, 바울과 바나바를 통한 이방선교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해 놓으신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도록 뜻을 두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않으심을 확증해 보였습니다. 이로써 베드로의 말대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이 모든 사실을 기초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다만 이방문화 가운데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들로 복음 진리에 위배되거나,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다 자유요 우상숭배를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위해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규례가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또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덕을 위하여 삼가야 할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최소한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술, 담배 문제나 마약, 노름, 음란물과 같은 것들은 삼가야 할 것들입니다. 반면에 일용할 양식이나, 1:1 말씀공부, 양치기, 소감 등은 UBF의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영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하거나 권하는 것이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복음 진리에 서서 볼 때 최소한 이런 것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위해서 이 시대에서 삼가고 감당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사항을 보증할 사절로 뽑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가결하였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이 무엇입니까? 28,2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이로써 성령과 예루살렘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고 확증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율법주의와 복음신앙 사이의 싸움에서 복음의 진리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방인들은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이방인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 헌장”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놓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세계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총회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다닌 중 고등학교도 미션스쿨이라 학교생활도 교회생활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는 거의 교회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게는 복음진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정욕문제와 열등감,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대학1학년 때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험난한데 저는 병들고 연약한 자기를 어찌하지 못해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긍휼이 여기시고 89년 천마산 여름수양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주님은 제게 아무 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 증거로 당신의 십자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가 용서함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생활하면서 주님께서 피 값으로 주신 죄 사함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양을 치는 것과 역사를 섬겨야 하는 일들이 모두 힘든 멍에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더욱더 깊은 은혜가운데 나아가는 투쟁을 하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마음이 힘들고 죄에 빠질 때면 주님의 은혜를 다 까먹고 불신에 빠져 헤맸습니다. 저는 이런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을 살아 계신가? 참으로 나는 거듭났는가?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믿으려고 하는 의지가 아닌가? 하는 많은 의문들 속에서 힘들어 하였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아직도 복음의 진리 가운데 굳게 서지 못하고 불의에 빠질 때가 많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진정한 영적인 투쟁은 주님의 핏 값을 주고 허락하신 복음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영접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은혜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제가 올해에 더욱더 주님의 은혜를 아는데서 자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또 성령께서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를 계기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그늘을 벗어나 세계화되고 이방선교를 위한 교리적인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복음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거짓 진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진리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양떼들이 메고 있는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겨 주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세계 선교 사명을 줄기차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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