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05행12강(14:1-28)/ 이 믿음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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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사도행전 제 12 강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이 믿음에 거하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의 후반부로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역사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는 부활 신앙을 덧입고 불사조와 같이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성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형제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의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겪어야 것들이 무엇인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이고니온을 개척하는 두 사도(1-7).
이고니온에 도착한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대개 유대인의 회당에서부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교 원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구원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었고 회당에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가 쉬웠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 민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핍박을 자청하는 일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당에 들어갔고 거기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곳에서부터 복음 역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고니온 지역의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구원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자 이고니온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한 곳이 막혔을 때 절망하지 않고 열린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사단의 역사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복음의 원수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핍박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이 사실은 사단의 일꾼들이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신자들이 복음적인 신자들을 핍박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두 사도는 그들을 향해서 악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지만 오래 있으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마음의 병을 앓는 자, 환란을 당한 자 등등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이들의 인생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비록 핍박이 있지만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불경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 때 사업이 풀리게 하십니다. 당장에 열매가 없어도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묘막측합니다.
두 사도의 헌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자 성내 무리가 두 무리로 나뉘었습니다. 즉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두 사도들에 대한 핍박이 아주 노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합세하여 두 사도를 공격했습니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빼앗기자 이렇게 합세하여 핍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런 핍박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핍박을 피해서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것을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핍박을 피하려하기보다는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담력과 강한 등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핍박을 몸으로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제자들은 영적인 갈등 사이에서 참으로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그들은 도망갈 때를 알았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 때 그들은 적의 계략에 굴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전술적으로 후퇴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고니온에 있는 새신자들은 복음을 통하여 강하게 되었고 견고히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보다 지역적인 상황을 더 잘 다룰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만약 바울과 바나나가 그 지방의 관원인 정치가들과 싸우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을 받을 때에 대립각을 세우고 대응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서기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으로부터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는 영적인 전쟁으로서 생명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복음 역사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한 용기를 주시고 효과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 지혜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루스드라인들의 제사를 거절한 두 사도(8-18)
루스드라에서 두 사도는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행동 반경이 좁았습니다. 기어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자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 사람이 뛰어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가르쳐 주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무리들이 바울의 행한 이 일을 보고 루가오니오 방언으로 소리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그들은 덩치가 큰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왜소한 바울은 허메라고 하였습니다. 쓰스는 제우스로서 희랍신화에서 신들 중의 신, 곧 주신(主神)이고 허메는 헤르메스로서 제우스의 대변인이요 전령신입니다. 무리들은 바나바가 풍채가 있으면서 말은 하지 않고 주로 고개만 끄덕이므로 제우스, 바울은 키가 작고 주로 말을 하였으므로 헤르메스라 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을 잘못 섬겼다가는 혹시 재앙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급하게 제사를 지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관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이때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의 말을 듣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렀습니다. “여러분, 왜 이러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모든 민족이 각자 자기 길을 가게 내버려 두셨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증거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열매 맺는 계절을 주셔서 선한 일을 하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습니다(15-17).” 바울은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기 위치를 잘 지킨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게 되면 헤롯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사람들로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면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을 드러낸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 사도처럼 겸손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연약한 인간임을 뼈에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겸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자고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고후12:7) 하나님은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를 계속하여 그 역사에 귀하고 위대하게 쓰십니다. 저희가 크던 작던 양들의 제사를 받지 않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제자들을 굳게 하는 바울(19-28)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고 신당의 제사장들이 나와서 제사하려고 하는 것을 뜯어 말리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승리의 때에 사단의 역사도 발악을 하게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도 끈질지게 복음역사를 섬겼지만 유대인 대적자들도 지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70km나 떨어진 루스드라 까지 따라와서 무리들을 끌어들여 사도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무리들은 얼마 전까지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추앙하고 경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180도 달라져서 성난 괴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기라든가, 세상 영광이라든가,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찬이나 인정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론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일을 주동하였던 바울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무수한 돌들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의 얼굴과 온 몸은 돌에 맞아서 깨치고 터지고 피멍이 들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얼굴을 감쌌지만 날아오는 돌멩이를 그 몸으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초죽음을 당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돌무더기에 덮인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내어 쓰레기 더미에 내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골칫거리를 확실히 제거한 것으로 알고 손을 탈탈 털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 센터 형제들이 죽은 바울 주위에 둘러서서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열정을 불사르다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그를 볼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죄없는 그가 이런 죽음을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장례 준비를 하고자 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찬송가를 경건하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 찬송가 소리에 의식이 깨어났는지 바울이 덮고 있던 거적대기를 제치고 부시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났긴 했지만 바울의 얼굴은 찢어지고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다리는 절뚝였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119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도 자기를 돌로 쳤던 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 더베로 가서 얼굴에 반창고만 붙이고 검은 안경으로 상처 부위를 가리고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도바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불굴의 도전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역사를 섬기면서 많은 핍박과 능욕과 환란을 겪었습니다. 이번에는 돌에 맞아 초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만하면 기가 꺾여 복음역사를 포기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는 넘어 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마 그의 요절 말씀은 잠언 24장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이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는 절대로 포기치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 파이팅 스피릿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히11:38a). 우리도 목자생활하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거절을 당하고 열매도 없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하다 말면 지금까지 한 것만 아깝게 되어 버립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선교사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삶은 이런 불굴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제타는 조선에 “여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조선 선교사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캐나다 출신 윌리엄(William James Hall, 1860-94)이 그 병원으로 와서 청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은 중국을 선교지로 삼고 그녀는 조선으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청혼을 거절하고 조선에 홀로 왔습니다. 얼마 뒤에 윌리엄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선교지를 바꿔 조선 선교사가 되었고 둘은 조선에서 최초로 기독교식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얼마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환자들이 급증했는데, 그녀의 남편 윌리엄은 이들을 돌보다 전염병에 감염되어 순교했습니다. 그가 조선에 온지 2년 만 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후 캐나다의 남편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 남편 윌리엄 때문에 우리는 한국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로제타는 “하나님, 제 남편을 한국 땅에 보내놓고 이 작은 교회가 이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남편의 뒤를 잇겠습니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1898년 5월 23일, 세 살 난 딸 에디스(Edith Margaret Hall)가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로제타는 아들 셔도우(Sherwood Hall, 1893-1991)를 부둥켜안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땅 조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이 민족을 섬기겠습니다!” 저희도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파이팅 스피릿으로 복음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도바울의 부활신앙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생사를 초월하여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에게 부활신앙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을 때 아무리 천성적으로 담대한 사람도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죽음 앞에서 몸을 사리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하며 생명을 바쳐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투철한 사명감과 충만한 부활신앙을 소유하므로 생사를 초월하여 담대하게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의 제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어떻게 격려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하고” ‘거하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씀한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도 바울이 말과 삶을 통해서 보여준 믿음입니다. 그것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복음전파와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믿음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사명에 투철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온 몸으로 보여주었듯이 자칫 이런 삶은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꺼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전하고 보여준 믿음을 떠나 인본주의적이고 기복적인 믿음, 사명이 없는 믿음 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나 100년전의 우리나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고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한 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존귀한 자였지만 비천한 자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없이 지내었습니다. 또한 자기 손으로 천막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비방의 말도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을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로 생각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와 비교하여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시를 받아야 하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는 눈치를 받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고자 할 때 실족하게 되지 아니할까 애간장을 태우고, 마음이 눌리고, 때로는 염려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여러 모양의 환란과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불같은 환란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환란을 받을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으로 견뎌야 합니다. 소망은 인내를 낳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환란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란을 받을 때에 위로를 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환란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돌아와 모든 교회를 모아서 제 1차 세계선교보고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안디옥 교회는 선교 신앙을 충만히 덧입고 세계 선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리라”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이 믿음에 거하라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일차 전도여행의 후반부로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역사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는 부활 신앙을 덧입고 불사조와 같이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성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형제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의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겪어야 것들이 무엇인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이고니온을 개척하는 두 사도(1-7).
이고니온에 도착한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대개 유대인의 회당에서부터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교 원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구원하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었고 회당에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가 쉬웠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 민족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핍박을 자청하는 일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당에 들어갔고 거기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곳에서부터 복음 역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하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고니온 지역의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구원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자 이고니온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한 곳이 막혔을 때 절망하지 않고 열린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사단의 역사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복음의 원수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핍박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이 사실은 사단의 일꾼들이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자기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신자들이 복음적인 신자들을 핍박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두 사도는 그들을 향해서 악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지만 오래 있으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마음의 병을 앓는 자, 환란을 당한 자 등등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이들의 인생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비록 핍박이 있지만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불경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 때 사업이 풀리게 하십니다. 당장에 열매가 없어도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묘막측합니다.
두 사도의 헌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자 성내 무리가 두 무리로 나뉘었습니다. 즉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두 사도들에 대한 핍박이 아주 노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합세하여 두 사도를 공격했습니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빼앗기자 이렇게 합세하여 핍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런 핍박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핍박을 피해서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것을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핍박을 피하려하기보다는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담력과 강한 등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핍박을 몸으로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제자들은 영적인 갈등 사이에서 참으로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그들은 도망갈 때를 알았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 때 그들은 적의 계략에 굴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전술적으로 후퇴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고니온에 있는 새신자들은 복음을 통하여 강하게 되었고 견고히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보다 지역적인 상황을 더 잘 다룰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만약 바울과 바나나가 그 지방의 관원인 정치가들과 싸우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을 받을 때에 대립각을 세우고 대응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서기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으로부터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복음 역사는 영적인 전쟁으로서 생명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복음 역사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한 용기를 주시고 효과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 지혜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루스드라인들의 제사를 거절한 두 사도(8-18)
루스드라에서 두 사도는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행동 반경이 좁았습니다. 기어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자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 사람이 뛰어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가르쳐 주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무리들이 바울의 행한 이 일을 보고 루가오니오 방언으로 소리질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그들은 덩치가 큰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왜소한 바울은 허메라고 하였습니다. 쓰스는 제우스로서 희랍신화에서 신들 중의 신, 곧 주신(主神)이고 허메는 헤르메스로서 제우스의 대변인이요 전령신입니다. 무리들은 바나바가 풍채가 있으면서 말은 하지 않고 주로 고개만 끄덕이므로 제우스, 바울은 키가 작고 주로 말을 하였으므로 헤르메스라 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을 잘못 섬겼다가는 혹시 재앙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급하게 제사를 지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관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이때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의 말을 듣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렀습니다. “여러분, 왜 이러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모든 민족이 각자 자기 길을 가게 내버려 두셨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증거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열매 맺는 계절을 주셔서 선한 일을 하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습니다(15-17).” 바울은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기 위치를 잘 지킨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영광을 추구하게 되면 헤롯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사람들로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면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만을 드러낸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 사도처럼 겸손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연약한 인간임을 뼈에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겸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자고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고후12:7) 하나님은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를 계속하여 그 역사에 귀하고 위대하게 쓰십니다. 저희가 크던 작던 양들의 제사를 받지 않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제자들을 굳게 하는 바울(19-28)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고 신당의 제사장들이 나와서 제사하려고 하는 것을 뜯어 말리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승리의 때에 사단의 역사도 발악을 하게 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도 끈질지게 복음역사를 섬겼지만 유대인 대적자들도 지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70km나 떨어진 루스드라 까지 따라와서 무리들을 끌어들여 사도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무리들은 얼마 전까지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추앙하고 경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180도 달라져서 성난 괴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기라든가, 세상 영광이라든가,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찬이나 인정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론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거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일을 주동하였던 바울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무수한 돌들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의 얼굴과 온 몸은 돌에 맞아서 깨치고 터지고 피멍이 들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얼굴을 감쌌지만 날아오는 돌멩이를 그 몸으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초죽음을 당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돌무더기에 덮인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내어 쓰레기 더미에 내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골칫거리를 확실히 제거한 것으로 알고 손을 탈탈 털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 센터 형제들이 죽은 바울 주위에 둘러서서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열정을 불사르다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그를 볼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죄없는 그가 이런 죽음을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장례 준비를 하고자 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찬송가를 경건하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 찬송가 소리에 의식이 깨어났는지 바울이 덮고 있던 거적대기를 제치고 부시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났긴 했지만 바울의 얼굴은 찢어지고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다리는 절뚝였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119앰블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도 자기를 돌로 쳤던 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 더베로 가서 얼굴에 반창고만 붙이고 검은 안경으로 상처 부위를 가리고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도바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불굴의 도전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역사를 섬기면서 많은 핍박과 능욕과 환란을 겪었습니다. 이번에는 돌에 맞아 초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만하면 기가 꺾여 복음역사를 포기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는 넘어 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마 그의 요절 말씀은 잠언 24장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 이었던 모양입니다. 그에게는 절대로 포기치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 파이팅 스피릿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히11:38a). 우리도 목자생활하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거절을 당하고 열매도 없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하다 말면 지금까지 한 것만 아깝게 되어 버립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선교사 로제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삶은 이런 불굴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제타는 조선에 “여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조선 선교사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캐나다 출신 윌리엄(William James Hall, 1860-94)이 그 병원으로 와서 청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은 중국을 선교지로 삼고 그녀는 조선으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청혼을 거절하고 조선에 홀로 왔습니다. 얼마 뒤에 윌리엄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선교지를 바꿔 조선 선교사가 되었고 둘은 조선에서 최초로 기독교식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얼마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환자들이 급증했는데, 그녀의 남편 윌리엄은 이들을 돌보다 전염병에 감염되어 순교했습니다. 그가 조선에 온지 2년 만 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후 캐나다의 남편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 남편 윌리엄 때문에 우리는 한국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로제타는 “하나님, 제 남편을 한국 땅에 보내놓고 이 작은 교회가 이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남편의 뒤를 잇겠습니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1898년 5월 23일, 세 살 난 딸 에디스(Edith Margaret Hall)가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로제타는 아들 셔도우(Sherwood Hall, 1893-1991)를 부둥켜안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땅 조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이 민족을 섬기겠습니다!” 저희도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파이팅 스피릿으로 복음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도바울의 부활신앙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생사를 초월하여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에게 부활신앙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을 때 아무리 천성적으로 담대한 사람도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죽음 앞에서 몸을 사리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하며 생명을 바쳐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투철한 사명감과 충만한 부활신앙을 소유하므로 생사를 초월하여 담대하게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의 제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어떻게 격려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하고” ‘거하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씀한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도 바울이 말과 삶을 통해서 보여준 믿음입니다. 그것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복음전파와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믿음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사명에 투철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온 몸으로 보여주었듯이 자칫 이런 삶은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꺼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쉽고 편안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전하고 보여준 믿음을 떠나 인본주의적이고 기복적인 믿음, 사명이 없는 믿음 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나 100년전의 우리나라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고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한 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존귀한 자였지만 비천한 자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없이 지내었습니다. 또한 자기 손으로 천막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비방의 말도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을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로 생각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와 비교하여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시를 받아야 하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는 눈치를 받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고자 할 때 실족하게 되지 아니할까 애간장을 태우고, 마음이 눌리고, 때로는 염려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여러 모양의 환란과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불같은 환란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환란을 받을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으로 견뎌야 합니다. 소망은 인내를 낳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환란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란을 받을 때에 위로를 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환란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돌아와 모든 교회를 모아서 제 1차 세계선교보고대회를 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안디옥 교회는 선교 신앙을 충만히 덧입고 세계 선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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