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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5행8강(9:1-31)/ 나의 택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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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431회 작성일 05-01-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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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사도행전 제 8 강                                                                355, 208
말씀 / 사도행전 9:1-31
요절 / 사도행전 9:15,16

나의 택한 그릇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우리는 오늘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회심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책임있는 유대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의로운 사람 스데반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때 그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그가 어떻게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부르심과 사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울은 누구입니까? 그는 유대인으로서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었습니다(행21:39).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고 말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다소에는 대학도 있었고, 동서 문화가 모인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가서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다소의 이방문화가 어린 시절에 미친 영향은 적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수업 후 몇 년, 회심 후 몇 년을 다소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것이 바울의 인격과 사상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2:28에는 그가 ‘나면서부터’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들여”(행22:28)사든가 로마 정부를 위해 상당한 공훈을 세우든가 또는 명문 가문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바울의 가정은 재산, 사회적 지위 등 모든 면에서 상류층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가정은 유대교 중에서도 순수성과 엄격함을 자랑하는 바리새파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5세쯤 예루살렘에 가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 선생 중에서 학식과 인격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행 5:34-39). 이 교육은 그를 열렬한 바리새인으로 만들었습니다(행 22:3). 그가 예루살렘에서 수학한 결과 절대적인 유일신 신앙, 엄숙한 윤리의식, 열렬한 애국심, 그리고 율법에 대한 충성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가문, 교육,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향 다소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바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의 순교 때입니다(행 7:58).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 그는 이에 찬성했습니다(행 8:1). 사도행전 6:9에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라고 되어 있는데, 바울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하튼 스데반 박해에 참가한 이래 바울은 크리스챤들을 박해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챤들을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자로 단정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적의를 품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에 말한 것처럼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악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야라고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은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불신은 그를 사단의 종이요 예수님의 원수가 되게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가 핍박자가 됨으로서 유대교 지도자들 가운데서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 사회에서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했습니다. 다메섹은 다른 나라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범법자 양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24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크리스챤들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외로까지 나아가서 크리스챤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기독교를 근절시키고자 결심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드린 기도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그는 이를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나는 의롭고 스데반은 나쁜 놈이라고 외쳐도 스데반의 기도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몸을 돌려 짓이겨놓았지만 그의 영혼은 손 하나 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챔피언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적으로 볼 때 그는 패배자였습니다. 그는 영적 전투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지만 그의 기도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기도를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예수쟁이들의 씨를 말려야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3). 그는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가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비추었는데 이 빛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울은 고전15:8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셨고 자기 눈으로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이 사건은 부활 첫째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사건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고후 4:6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증거는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의식적인 노력과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도 돌연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고난을 받으신 후에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가 지금 자신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그를 내모는 이 회초리를 발로 차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주인을 마음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갈1:12). 이 사건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전 존재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항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일생동안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자신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먼저 훼방자요 핍박자요 살인자인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는 정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교회의 머리로서 성도들과 함께 핍박을 받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성도들의 탄원하는 기도 소리를 들으셨지만 사울을 찾아오사 사랑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는 스데반의 기도 속에 나타난 사랑이 충만한 소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똑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품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사울은 이 은혜에 반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자신을 “위대한 자”라는 뜻의 사울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과거에 그는 사람들 앞에서 용감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리새인의 옷을 입고 구렛나루를 기르고 근엄한 모습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은 죄인이요 예수님은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롬7:24,25절에서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존재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그의 일생에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서 그는 죄인 중의 괴수에서 성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핍박자에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에는 지금 핍박자 사울과 같은 지성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이 시대에 사도바울과 같이 변화되어 생명 구원 역사에 쓰임 받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을 사로잡으시고 한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은 인생의 주된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성취하는데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그 때에 아니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었는데 주께서 환상 중에 그를 불렀습니다. “아나니아야, 일어나 직가가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1,12).” 아나니야는 사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래서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을 몹시 괴롭혔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갈 권리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이리로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우리는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시는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함 받은 그릇입니다. 세상은 어둡고 희망이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크리스챤들은 불같은 핍박으로 인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만민 구속 계획이 정하신 때에 완성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으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택하사 그를 통해서 복음 곧 예수님의 사건 자체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은 어둠의 세력인 사탄 마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그들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모두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자유롭게 되며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과 이 땅에서 거룩한 기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영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아직도 세상을 속이고 격렬히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흑암의 세력은 세상사람을 속이고 죄 짓게 하고 타락시켜 영적으로 결박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은 주님이 다시 오시어 사탄을 심판하여 지옥으로 보내고 새 하늘 새 땅을 이루실 때 완전한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전도는 바로 사탄의 세력에 붙잡힌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탄의 진지를 파괴하여 주님의 날을 속히 오게 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총 동원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 믿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사명 중에 전도만큼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도록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편히 살고자 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살고자 한다면 고난이 따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강하고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우리로 영적인 잠을 자기 않고 깨어 있게 하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에서도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여러 유형의 핍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광신자라고 놀려대거나 인터넷에서 비방하거나 세상을 모르는 놈이라고 조롱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편이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고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새벽 기도를 하기 위해서 단잠을 깨우는 것도 고난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갖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제자 양성에 따르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고난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또 주의 “고난에 참예”하여, '어찌하든지 부활에 동참하고자 애를 썼습니다(빌3:10-11). 우리 모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야는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그는 즉시 순종하여 유다의 집으로 들어가서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바로 일어나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21).” 그러나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이중인격자라고 불신의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태도를 보이게 되자 그와 한 무리였던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고자 공모했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렸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고 불신할 때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불신은 그를 멸시하는 죄입니다. 그는 예수의 사역과 예수님으로부터 연유할 가르침들에 대한 정보를 더 자세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갈 1:18절에 의하면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삼 년만에 돌아오게 되었고 거기서  15일 동안 체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는 두 사도와의 교제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절을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라고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그는 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담대하게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또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이제는 사울을 죽이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알고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고향 다소로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은혜와 사명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임이 제자들의 모임이요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송하는 역사에 계속하여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모슬렘과 북한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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