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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강 05년 신년3강(행19:8-22)/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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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559회 작성일 05-01-0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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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신년 말씀 제 3 강                                                        86, 399
말씀 / 사도행전 19:8-22
요절 / 사도행전 19:20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우리는 지난 주 십계명 말씀을 공부하면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한 말씀을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이 시대의 우상들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지름길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내 마음에 새기고, 영육간의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 믿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다 보면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이 있습니다. 먼저 말씀이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책상에 일대일로 목자님과 마주 앉아 있거나 예배 시간에 앉아 있기는 한데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가 않는 것입니다. 설령 말씀을 받고 크게 고무되어, 말씀을 들려 줄 양을 얻기 위해서 캠퍼스에 나가보지만 말씀공부를 하고자 하는 양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어떤 양들은 잘 성장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반발하고 제 갈 길로 가버립니다. 이때 우리는 낙심하고 목자 체질 탓, 시대 탓, 양 탓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우리보다 더 힘든 복음의 장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큰 승리를 이룬 역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에베소 개척역사였습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에 속한 소아시아 땅 중에서 ‘아시아의 로마’라고 불리웠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곳은 소아시아에서 정치, 종교, 무역의 요충지요 학문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베소는 여신 아데미를 숭배하고, 도서관과 극장이 많았으며 사람들의 지적수준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에베소에서 가장 모범적인 개척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두란노서원에서 이룬 역사는 오늘날 제자양성역사에 있어서 가장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에베소 개척역사를 어떻게 섬겼을까요?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고린도를 떠나 수리아로 돌아가면서 에베소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후 아볼로라는 사람이 에베소에서 주의 도를 전하였고, 바울은 그 후에 3차 전도 여행 중에 이곳에 와서 본격적인 에베소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19:1-7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그곳에는 어떤 제자들이 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의 전도를 통해 생겨난 제자들로서, 영적인 수준이 매우 어렸습니다.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그들을 보고,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성령이 뭐에요,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는데요’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성령의 역사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고구마 전도법으로 말하자면 ‘익은 고구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쳐 주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자 금방 주요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열 두 사람 쯤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새롭게 된 제자들이 후에 제자 양성을 통한 에베소 개척 역사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할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어떤 제자들을 새롭게 하는 역사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없고 과거의 제도주의적인 유대교를 떠나서 세례 요한을 따른 용감한 운동가들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깊이 헌신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죄사함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도왔습니다.

  이처럼 어떤 제자들의 신앙을 한 단계 새롭게 한 바울은 본격적으로 어떻게 에베소 복음 역사를 섬기고자 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 개척역사와 같은 방식을 에베소에서도 적용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의 방식은 선포식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며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석 달 동안을 그렇게 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9a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어떤 자들은 유대인들로서 바울이 확신 있게 말하면 말할수록 마음이 닫히고 딱딱해졌으며 믿지 않고자 고집을 부렸습니다. 또한 바울이 메시지를 다 전하고 내려오면, 비방의 말을 해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일쑤였습니다. “예수가 도대체 누군데? 저 사람 왜 저렇게 흥분하지?” 이로 인해 바울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내 메시지에 힘이 없는 것은 아닌가’,에베소 양들은 소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깊은 한계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때 무슨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9b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첫째, 바울은 소수의 제자양성 방향을 잡았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안 듣고자 하는 사람을 떠나 듣고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롭게 된 몇 사람(행19:7)을 세워 집중적으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have discussion)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떠나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대화식 성경공부 방법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입니다. 바울은 대중 집회식 복음역사를 지양하고, 소그룹중심의 성경공부 방식(the small group bible study)을 선택했습니다. 무리 중심의 사역에서 제자 중심의 사역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방적인 복음역사가 아니라 몇 사람을 대상으로 인격적이고 토론식으로 하는  성경공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20:31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 역사를 섬길 때에 밤낮 겸손과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의 내면문제에 파고들어 가서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심어주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반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소원이 없어서 말씀이 들어가는지 들어가지 않는지 가늠할 수 없는 둔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면에 상처가 많아서 오랫동안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훈련 주는 것은 잘 따라오는데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자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제도를 따라가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각양각색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포기치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답답하고 피곤한 생각이 몰려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 에베소 지역이 복음화 될 수 있단 말인가? 갈 길이 아직도 멀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인생문제가 너무 심각한 양을 돕다가 함께 울기도 했을 것이고, 내면이 깨지지 않는 양을 위해서 밤이 새도록 금식기도, 철야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독신이었기 때문에 누가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자비량 선교사였기 때문에 물질 자립을 위해서 낮에는 텐트 만드는 일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에베소 양들을 돕기 위해서 기쁨으로 고난의 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은 개인 개인을 성장시키는 일에 힘쓸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통해서 세상을 섬길 때 훨씬 더 강력하게 섬길 수 있습니다. 10a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 같이 하기를 두 해 동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이런 힘든 영적 투쟁을 2년 동안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 양들의 생명을 맞바꿀 각오로 양들을 돕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의 문제들을 말씀으로 돕기 위해서 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의 샘을 팠습니다. 베드로후서 1:19절에 보면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날이 새어 샛별이 그 마음에서 떠오르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한 양 한 양을 생각하며 말씀의 샛별이 그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날을 새며 말씀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밤을 새워 음식을 준비하며, 때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양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살찌우는 영적인 아비요, 어미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마음을 쏟아서 양들을 섬기고 정성껏 말씀을 준비해서 돕자 그 말씀들은 북창순두부처럼 맛있는 양식이 되어 양들의 심령에 전달되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으로 말미암아 양들은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딱딱하던 양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심령이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양떼들은 더욱더 말씀을 사모하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복음신앙 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만 2년을 하였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것도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2년 동안 각 사람의 내면문제와 씨름한다는 것은 보통 인내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의 능력을 믿고 인내했습니다. 낙심이 될 때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와 자신도 한 영혼을 위해 생명을 거는 목자로 살고자 새롭게 결단을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씀연구와 제자양성에 전력하였을 때,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첫째는,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다 주의 말씀을 듣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에베소가 포함되어 있는 소아시아 지역을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바울이 연구한 주의 말씀은 어떤 양들에게도 다 먹혀들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자들도 다 주의 말씀을 튕기지 않고 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바울이 처음 회당에 들어가 담대히 말할 때 마음이 굳어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우습게 여기고 악하게 말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대인들도 바울을 통해 연구되고 흘러나오는 주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우리는 선진국 사람이라는 생각, 가장 큰 신인 아데미 신을 섬긴다는 헛된 우상숭배신앙으로 마음이 심히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주의 말씀이 드러났을 때, 그들이 주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바울이 이때 쓴 것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송가와 15장의 부활의 찬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은혜롭고 권세가 있습니까? 이것이 두란노 서원 역사의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그가 두란노 서원에서 양성한 제자들이 아시아 곳곳을 나가서 한 지구를 개척했습니다. 또한 에베소에 와서 말씀을 받고 은혜 받은 자들이 고향에 돌아가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비롯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도 모두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아시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권세있는 말씀을 증거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에베소 교회는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 가운데 권세 있는 말씀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말씀이 있는 곳에서 희한한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11,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희한한 일’이란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고 신비스런 초자연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썼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 한번은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을 흉내내어 바울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악귀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악귀가 대답하기를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하며 오히려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K-1 이종 격투기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귀신에게 깔려 실컷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 귀신을 시험하다 우스운 꼴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말씀전파에 진심을 드릴 때에 여러 종류의 죄인들이 변화되고 치료되는 희한한 역사들이 많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셋째로, 말씀이 있는 곳에 그 시대의 가치관과 문화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증거되자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또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였습니다(18). 이는 믿던 사람들이 적당히 살며 악을 행하던 일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역사할 때 기존 신자들 안에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주의 말씀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에베소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토착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술관련 책을 다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그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이는 시가로 25억원으로서 권당 만원만 쳐도 25만권의 책에 해당이 됩니다. 당시 에베소는 마술의 도시로서 마술 문화가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주의 말씀이 들어가자, 그런 마술 문화가 깨어지고, 그 일에 빠져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2년 동안 소수의 제자들을 위해 말씀연구와 강론에 전념한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놀라운 역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역사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에베소 제자양성의 핵심은 주의 말씀의 힘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는 본래부터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날카로운 칼과 같고 마광한 살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지니고 살고, 그것을 자랑하고 전파하는 직분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능력은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처럼 2년 동안 밤낮으로 날마다 각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기도하고 말씀의 세계 속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는 투쟁의 사람을 통해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 마음 속에서 먼저 말씀의 불꽃이 얼마나 강력하게 타오르는가에 따라서 그 말씀을 듣는 개인과 가정, 공동체와 지역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비례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진리의 상아탑인 캠퍼스는 에베소 도시와 같이 개인주의, 자기만족, 취직준비, 동거 문화, 각종 이단사상과 어두움의 세력이 판을 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 세력은 캠퍼스 대학생들을 더욱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대학생들에게 조금 도전해 보고 힘들다고 뒤로 물러서거나 자포자기 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은 엄청나서 공동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인 관계에서 자라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기까지 말씀을 연구하고 믿고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따르고 부분적으로만 믿으면 안됩니다. 이론적으로만 알기보다 믿고 순종하여 말씀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참 믿음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며 모든 삶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삶을 살게 합니다. 참 믿음의 증거는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데서 나타납니다. 참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유케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죄의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제자도는 사도행전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자도를 생각할 때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제자도는 종종 같은 비중의 중요한 진리인 “공동체”라는 개념을 가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부르시되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개인적인 성장에만 초점을 둔다면, 개인적인 믿음을 공동체적인 믿음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일대일의 제자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20세기 문화의 특성에 나타나는 부적절한 개인주의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짙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부적절한 개인주의는 우리를 속여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또 자기 스스로를 부추겨서 다른 사람이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을 꺼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제자로 살도록 지원하며 바로 잡아줄 공동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생활이 개인적일 때가 많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크리스챤은 혼자 방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반대하고 다른 이들과 깊고 힘있는 교제 관계를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이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서 기여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찾고 헌신해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는 성령의 열매요(갈5:22-26), 새로운 회심자들이요(요434-38, 15:16), 의와 선한 역사입니다(빌1:11, 골1:10). 더 나아가 캠퍼스와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바울은 말씀과 제자양성의 위력을 발견하고 로마 개척의 환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이 일이 다 된 후’란 ‘에베소에서 놀라운 말씀역사를 체험한 후’를 말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의 심령에는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이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로마개척의 비전을 품고 전도여행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역사한 주의 말씀은 로마에서도 얼마든지 역사하는 힘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연요절로 잡은 한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매주 말씀을 깊이 받고 회개하여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맺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선교사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먼저 말씀의 능력과 국내에서 두 명 이상의 양들을 제자로 세우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 결과 건강하게 성장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캠퍼스와 이 나라를 변화시키는데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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