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05 신년 2 강(출20:1-17)/ 은혜의 계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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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신년말씀 제 2 강
말씀 / 출애굽기 20:1-17
요절 / 출애굽기 20:3
은혜의 계명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00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모든 것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내실을 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신자, 제자 삼는 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생각해 볼 말씀은 십계명으로서 그것은 율법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유를 얽어매는 올가미가 아니라 자유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합니다. 물이라는 울타리를 떠나면 물고기는 죽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며 자라는 것처럼, 성도들도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1). 성령에 감동된 사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일5:3).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씀은 “내가 있을 것인데 너와 함께 있을 것(I will be who will be)”이라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탈출을 위해서 함께 하실 하나님, 그리고 출애굽 이후에 광야 생활에서 함께 하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함께 하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거룩하게 살도록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2004년도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2005년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백성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예들을 그 자신의 선택된 백성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결국 우리를 죄의 종된 삶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시고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와 구원은 구약 성경의 두 주제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탕으로 십계명을 수여함으로써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 선포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더 나은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라시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을 은혜의 계명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여기서 “나 외에는” 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에서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이 계명에 있는 “다른 신들”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을 때 법궤 주위에 있던 이방신들을 가리킵니다. 애굽에서 나온 온갖 이민족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결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섬겨오던 신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을 믿고자 결단하면 조상신들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만을 섬기려면 다른 예배 대상자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길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릴 때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기준으로 복을 받고, 출세를 하고, 자기 만족을 추구할 때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풍요의 신인 바알과 쾌락의 신인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좋다고 생각하면 여러 신들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섬겼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복 받는 일에 목적을 둔다면 윤리고 도덕이고 문제를 삼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은 안하지만 물질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를 그것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섬기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데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나서 승천하시기 전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그리고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때 어떻게 해서는 안 됩니까? 4,5a절을 보십시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새긴 우상이란 주물을 부어 만들고 깎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느껴지는 것을 의지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면 믿음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영역과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단 만들어진 우상은 주물을 해서 만들었든지 깎아서 만들었든지 더 이상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일단 만들어진 후에는 그 안에 신이 들어와서 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상이 이제는 인간을 지배하고 강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15절 이하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그 나무의 일부를 땔감으로 사용하여 불을 피워 자기 몸을 따뜻하게 하거나 떡을 구워 먹기도 하고 그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그는 그 나무 일부로 불을 피워 고기를 삶거나 구워서 배불리 먹고 몸을 따듯하게 하며 “정말 따듯하구나. 이 얼마나 좋은 불인가!” 하고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고 경배하며 “당신은 내 신입니다. 나를 구하소서” 하고 빌기까지 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자기들이 하는 짓을 깨닫지 못하며 진리에 대한 눈과 마음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요4: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과 계약을 맺을 때에도 자기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무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겠다고 하십니까? 5b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남에게 빼앗겼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만약 내가 우상에게 절하며 섬긴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우상 숭배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또 이 계명을 어긴 자에게는 삼 사대가 한 집안에서 살던 대가족 전체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축복은 수천 대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것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상을 주시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망령되이 일컫습니다. 우리가 자기 부모의 이름을 부를 때도 이름 한 자 한 자에 “자”자를 붙여서 호명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야 쓰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맹세를 하거나 악담이나 희롱하는 말에 써서는 안됩니다. 농담이나 저주하는데 써서는 안됩니다. 또 농구하다가 공이 골대에서 뱅뱅 돌면서 들어 갈락말락하다가 안 들어가면 “오 마이 갓”이라든가, “주여”하고 탄식을 하는데 하나님의 호칭을 이렇게 아무 때나 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찬양과 감사와 예배하는 마음으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하루를 떼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이란 “중단하다”, “그만두다”는 뜻입니다. 이 계명은 6일 동안 일하지만 7일째는 일을 중단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 말씀은 안식이라는 말만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일을 열심히 한 후에 안식하라는 계명입니다. 안식일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날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일의 노예가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일로부터의 해방은 쳇바퀴 돌 듯 하는 삶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감사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 생일과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아! 아직도 안식일이 돌아오려면 사흘씩이나 남았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나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란 예배 시간에 떼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함으로 새로운 힘을 얻어 한 주간 승리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날 하루를 경건한 일, 병든 형제들을 심방하는 일,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 성도들과의 거룩한 교제에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필수적인 일 외에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보내야 합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수술을 한다면 그가 일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마12: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일을 하도록 엿새를 할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루를 특별하게 지정하신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업무를 감당하고 오락을 할 수 있도록 엿새를 주셨거늘 어찌 이 안식일 하루를 아까워하겠습니까! 우리는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지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어렵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그리고 변화된 마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우리의 일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고 이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말입니다(잠 3:9).따라서 이는 부모를 공경하되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듯 섬겨야 됨을 의미합니다. 부모에 의하여 자녀의 육체가 조성되어 하나님의 생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해되었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의 훈계와 삶을 통하여 그들의 선한 생활과 믿음을 전수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부모의 훈계와 신앙은 자녀의 가치관을 확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볍게 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위엄과 존경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인품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권위에 순종함을 뜻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권위에 자손들이 순종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부모의 신앙을 전수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장수할 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이 대대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공경을 배우는 자는 어른을 공경할 줄 알며 상관과 선배를 모실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국가에 충성하고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을 말씀하시고 이제 생명 자체와 이런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관계가 나타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살인하지 말지니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살인할 수 없는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공동체의식이 발달하기 전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이 살해되면,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보복을 하는 것이 뿌리 깊은 관습이었습니다. “내 원수를 갚아다오” 이렇게 되다 보니 무고하게 우연한 사고로 사람이 죽는 경우에 그 동료가 억울하게 피의 보복을 당하는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혼란과 해체를 막기 위해서 살인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피의 보복을 할 권리가 점차 공동체의 행정관에게로 옮아가게 되었습니다. 살인죄를 범한 자를 재판을 하여 사형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때는 살인이 되지 않습니다(창9:6).또 도둑이 자기 집을 침입했을 때 이 도둑이 가족을 해칠 위험에서 가정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출22:2). 정당한 자기 방어를 하다가 도둑의 생명이 끊기는 경우 이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우리의 영토를 해치고 멸망시키려고 침입하려 한다면 우리가 군사적 행동을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롬13:1-7). 우리가 살인의 죄악을 막는 길은 적극적으로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증거하여 죄인들을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죄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한을 갖는 대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는 가정을 거룩하게 지키는 기초가 되는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조인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제도를 깨뜨리는 행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간음죄를 짓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신 22:22). 그런데 요즘 세상은 간음을 정당하게 여기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27,28절에서 예수님은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는 결과 뿐만 아니라 간음을 일으키는 동기도 다스리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깨끗한 마음으로 존경해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가는 리더가 되려면 음란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합니다.
15절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유물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포함합니다. 또 사람의 마음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남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은 일하지 않고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일확천금을 꿈꾸고 쉽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에 대한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도둑질의 다른 형태는 게으름입니다. 시험 칠 때 컨닝하는 것도 남의 노력과 지식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정보를 훔치고 산업 기밀을 유출시키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또 다른 도둑질은 낭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물질이나 고용주의 물질을 낭비함으로 손해를 입힙니다. 이것도 도둑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소유를 잘 관리하고 열심히 일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거짓 증거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자꾸 이야기 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 등은 바로 이러한 죄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 중에서 인터넷에 익명으로 어떤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을 하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명예를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 계명이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에 나온 것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탐심은 우상숭배와 간음, 도적질 및 기타 모든 죄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약 1:15;골 3:5). 실로 탐심은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이자,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오직 자신의 안일과 욕심만을 채우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로이기 때문에 뭇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조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는 기독교가 사회를 개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회가 교회를 개혁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덤벼들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 천 이백만의 크리스챤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이 사회를 앞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힘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때에 은혜의 계명들을 주시고 우리가 어느 수준으로까지 자라야 하는지 가르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때 그 자체로 세상이 밝아질 줄 믿습니다.
말씀 / 출애굽기 20:1-17
요절 / 출애굽기 20:3
은혜의 계명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00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모든 것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내실을 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신자, 제자 삼는 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생각해 볼 말씀은 십계명으로서 그것은 율법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유를 얽어매는 올가미가 아니라 자유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합니다. 물이라는 울타리를 떠나면 물고기는 죽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며 자라는 것처럼, 성도들도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1). 성령에 감동된 사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요일5:3).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씀은 “내가 있을 것인데 너와 함께 있을 것(I will be who will be)”이라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탈출을 위해서 함께 하실 하나님, 그리고 출애굽 이후에 광야 생활에서 함께 하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함께 하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거룩하게 살도록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2004년도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2005년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백성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예들을 그 자신의 선택된 백성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결국 우리를 죄의 종된 삶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시고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와 구원은 구약 성경의 두 주제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탕으로 십계명을 수여함으로써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 선포된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더 나은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라시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을 은혜의 계명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여기서 “나 외에는” 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에서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이 계명에 있는 “다른 신들”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을 때 법궤 주위에 있던 이방신들을 가리킵니다. 애굽에서 나온 온갖 이민족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결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섬겨오던 신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을 믿고자 결단하면 조상신들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만을 섬기려면 다른 예배 대상자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길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잃어버릴 때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기준으로 복을 받고, 출세를 하고, 자기 만족을 추구할 때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풍요의 신인 바알과 쾌락의 신인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좋다고 생각하면 여러 신들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섬겼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복 받는 일에 목적을 둔다면 윤리고 도덕이고 문제를 삼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은 안하지만 물질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를 그것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섬기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데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나서 승천하시기 전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그리고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때 어떻게 해서는 안 됩니까? 4,5a절을 보십시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새긴 우상이란 주물을 부어 만들고 깎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느껴지는 것을 의지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면 믿음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영역과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단 만들어진 우상은 주물을 해서 만들었든지 깎아서 만들었든지 더 이상 인간이 만든 물건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일단 만들어진 후에는 그 안에 신이 들어와서 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상이 이제는 인간을 지배하고 강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15절 이하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그 나무의 일부를 땔감으로 사용하여 불을 피워 자기 몸을 따뜻하게 하거나 떡을 구워 먹기도 하고 그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그는 그 나무 일부로 불을 피워 고기를 삶거나 구워서 배불리 먹고 몸을 따듯하게 하며 “정말 따듯하구나. 이 얼마나 좋은 불인가!” 하고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머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절하고 경배하며 “당신은 내 신입니다. 나를 구하소서” 하고 빌기까지 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자기들이 하는 짓을 깨닫지 못하며 진리에 대한 눈과 마음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요4:24절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과 계약을 맺을 때에도 자기의 형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무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겠다고 하십니까? 5b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남에게 빼앗겼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만약 내가 우상에게 절하며 섬긴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우상 숭배하는 것은 음행입니다. 또 이 계명을 어긴 자에게는 삼 사대가 한 집안에서 살던 대가족 전체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축복은 수천 대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수하는 것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상을 주시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망령되이 일컫습니다. 우리가 자기 부모의 이름을 부를 때도 이름 한 자 한 자에 “자”자를 붙여서 호명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야 쓰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맹세를 하거나 악담이나 희롱하는 말에 써서는 안됩니다. 농담이나 저주하는데 써서는 안됩니다. 또 농구하다가 공이 골대에서 뱅뱅 돌면서 들어 갈락말락하다가 안 들어가면 “오 마이 갓”이라든가, “주여”하고 탄식을 하는데 하나님의 호칭을 이렇게 아무 때나 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찬양과 감사와 예배하는 마음으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하루를 떼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이란 “중단하다”, “그만두다”는 뜻입니다. 이 계명은 6일 동안 일하지만 7일째는 일을 중단하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 말씀은 안식이라는 말만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일을 열심히 한 후에 안식하라는 계명입니다. 안식일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날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일의 노예가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일로부터의 해방은 쳇바퀴 돌 듯 하는 삶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감사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 생일과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아! 아직도 안식일이 돌아오려면 사흘씩이나 남았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나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란 예배 시간에 떼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함으로 새로운 힘을 얻어 한 주간 승리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날 하루를 경건한 일, 병든 형제들을 심방하는 일,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 성도들과의 거룩한 교제에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필수적인 일 외에는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보내야 합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수술을 한다면 그가 일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마12: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일을 하도록 엿새를 할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하루를 특별하게 지정하신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업무를 감당하고 오락을 할 수 있도록 엿새를 주셨거늘 어찌 이 안식일 하루를 아까워하겠습니까! 우리는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지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어렵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그리고 변화된 마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우리의 일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고 이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말입니다(잠 3:9).따라서 이는 부모를 공경하되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듯 섬겨야 됨을 의미합니다. 부모에 의하여 자녀의 육체가 조성되어 하나님의 생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해되었습니다. 또 자녀들은 부모의 훈계와 삶을 통하여 그들의 선한 생활과 믿음을 전수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부모의 훈계와 신앙은 자녀의 가치관을 확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볍게 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듯이 위엄과 존경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인품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권위에 순종함을 뜻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권위에 자손들이 순종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부모의 신앙을 전수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장수할 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이 대대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공경을 배우는 자는 어른을 공경할 줄 알며 상관과 선배를 모실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국가에 충성하고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을 말씀하시고 이제 생명 자체와 이런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관계가 나타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살인하지 말지니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살인할 수 없는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공동체의식이 발달하기 전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이 살해되면,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보복을 하는 것이 뿌리 깊은 관습이었습니다. “내 원수를 갚아다오” 이렇게 되다 보니 무고하게 우연한 사고로 사람이 죽는 경우에 그 동료가 억울하게 피의 보복을 당하는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혼란과 해체를 막기 위해서 살인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피의 보복을 할 권리가 점차 공동체의 행정관에게로 옮아가게 되었습니다. 살인죄를 범한 자를 재판을 하여 사형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때는 살인이 되지 않습니다(창9:6).또 도둑이 자기 집을 침입했을 때 이 도둑이 가족을 해칠 위험에서 가정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출22:2). 정당한 자기 방어를 하다가 도둑의 생명이 끊기는 경우 이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우리의 영토를 해치고 멸망시키려고 침입하려 한다면 우리가 군사적 행동을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입니다(롬13:1-7). 우리가 살인의 죄악을 막는 길은 적극적으로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증거하여 죄인들을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죄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한을 갖는 대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는 가정을 거룩하게 지키는 기초가 되는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조인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제도를 깨뜨리는 행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간음죄를 짓는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신 22:22). 그런데 요즘 세상은 간음을 정당하게 여기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27,28절에서 예수님은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는 결과 뿐만 아니라 간음을 일으키는 동기도 다스리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깨끗한 마음으로 존경해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서 가는 리더가 되려면 음란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합니다.
15절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유물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포함합니다. 또 사람의 마음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는 안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남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은 일하지 않고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일확천금을 꿈꾸고 쉽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에 대한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도둑질의 다른 형태는 게으름입니다. 시험 칠 때 컨닝하는 것도 남의 노력과 지식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정보를 훔치고 산업 기밀을 유출시키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또 다른 도둑질은 낭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물질이나 고용주의 물질을 낭비함으로 손해를 입힙니다. 이것도 도둑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소유를 잘 관리하고 열심히 일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거짓 증거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자꾸 이야기 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 등은 바로 이러한 죄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 중에서 인터넷에 익명으로 어떤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을 하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명예를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을 보십시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 계명이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에 나온 것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탐심은 우상숭배와 간음, 도적질 및 기타 모든 죄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약 1:15;골 3:5). 실로 탐심은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이자,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오직 자신의 안일과 욕심만을 채우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로이기 때문에 뭇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조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는 기독교가 사회를 개혁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회가 교회를 개혁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덤벼들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 천 이백만의 크리스챤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이 사회를 앞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힘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때에 은혜의 계명들을 주시고 우리가 어느 수준으로까지 자라야 하는지 가르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때 그 자체로 세상이 밝아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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