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창18강(28장)/ 벧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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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18 강 364, 542
말씀 / 창세기 28:1-22
요절 / 창28:18,19
벧엘의 하나님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과 신앙에서 새로운 출발점이요 전환점이 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비록 꾀를 써서 형의 축복을 가로채긴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죄와 갈등 가운데서도 그의 작정하신 뜻을 빈틈없이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야곱을 어려운 가운데 만나 주시고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저희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벧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밧단 아람으로 야곱을 보내는 이삭(1-5)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을 하고 또 부탁하였습니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1,2).” 이삭은 에서의 아내요, 며느리들로 인해서 속앓이를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인생에 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분별력이 없이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 때 리브가의 동역을 잘 받았던 기억을 하고 믿음의 여인과 결혼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결혼은 복의 산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다시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5).”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고 그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유업으로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로써 이삭은 야곱에게 복을 잘 계승했습니다. 신앙을 자손들에게 계승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고난 속에서도 가정 교육과 가정의 소중함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4천년 동안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세계사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자녀들에게 잘 계승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부모들이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목자들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대일과 말씀 공부와 신앙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자녀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인생 소감을 쓰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 만남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갖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고 밧단아람으로 보냈습니다.
6-9절에는 에서가 왜 다시 이스마엘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면서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서가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였습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이는 그가 영적인 가치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욕심에 기초해서 나온 것이므로 옳은 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판단하기보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취하여 불경건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제 다른 아내를 더 취한다고 잘못된 가정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에서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아무 효과도 없는 후회에 불과한 것입니다.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는 여러모로 보아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계승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도 민족을 이루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둘째, 영적인 훈련이 필요한 약속의 자녀들(10,11)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때 야곱의 나이는 76세의 노총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때까지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야곱은 외롭고 막연하고 장래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또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한 형을 피해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한 야곱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실까요? 잠12:1절에 의하면 훈련을 받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교육과 훈련에 의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800년 1월 9일 남부 프랑스의 생 세랑이라는 마을 근처의 숲속에서 야생아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야생아는 11~12세 정도의 소년임이 판명되었으나,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후에 사람들은 그 소년을 파리로 옮겨 야수에서 인간으로 변화시키고자 체계적인 시도를 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은 후 그는 화장실 사용에 익숙해졌고, 옷 입는 방법을 습득하여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발전을 보이지 않다가 40세 정도 되는 182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공동체 속에서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훈련을 받을수록 신자들은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통해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기 위해서 또 큰 민족, 풍성한 복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자기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서 상처들이 치료가 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 훈련, 기도 훈련, 영적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러 모양으로 훈련하십니다. 물질 문제로 훈련하고, 인간 갈등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자녀로 인해서 훈련하시고 목자를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질병을 통해서 훈련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어떤 분은 돈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시고, 어떤 분은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훈련하사 낮추십니다. 어떤 분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훈련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어떤 목적으로 훈련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훈련을 영접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사람을 믿는데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또한 몇몇 사람을 사랑하고 제자를 키우는 제자 양성가로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아서 복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야곱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12-19)
야곱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어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용꿈이나 돼지꿈이 아니라 사닥다리 꿈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사닥다리는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임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이 꿈이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야곱은 이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건강과 재력과 지위와 지식도 무너져 내리고, 직업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 때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곁에 남습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잠을 청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1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게 땅과 자손을 주고 그를 세계 만민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름의 뜻처럼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을 주기는커녕 남의 복도 빼앗는 사기꾼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에게 씻을 수 없는 미움과 상처를 남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밟고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온유한 사람이었으니 이해가지만 그의 삶을 볼 때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도망자입니다. 아버지는 거부였고 우물도 몇 개나 파서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한 목숨 연명하기 힘든 사람이 무슨 복의 근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현실은 장래를 보장받지 못한 노숙자라 할지라도 천하 만민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주십니다. 이는 야곱이 잘 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뜻을 두시고 약속하셨기에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사다리 꿈을 꾸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어디서든 함께 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에겐 지금 돈이나 명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돼지꿈을 꾸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우물을 파고 거부가 된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아버지와는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는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형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치는 자신에게 어머니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도망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만이 야곱은 근본적인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브엘세바에서 그가 의식하지 못할 때에나, 지금 혼자가 되어서 괴로워할 때에나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복중에서부터 약속의 자녀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구속사의 거룩한 뜻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부모조차도 자기 인생에 걸림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식을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고 택하신 자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너는 나와 교제해야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어머니와의 교제로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혼기가 넘도록 결혼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언젠가 죽기에 영원한 교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교제하셨듯이 이제 야곱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 뜻을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통해 말씀을 듣고 비전을 덧입을 때 행복해집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고 혼자가 되었을 때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에게는 지금 펼쳐진 현실이 전부입니다. 현실이 어떻게 펼쳐지느냐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산다는 것이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변하지 않는 곳이고 하나님이 그 영광 중에 계신 곳입니다. 그도 언젠가는 조상들이 돌아간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그곳이 진짜 돌아갈 곳입니다. 하늘나라에 마음이 있을 때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실하게 약속의 자녀로서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는 고백은 우리 집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렇게 홀로 된 나와도, 이 황량한 벌판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두려움은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경외감입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곧 예배드리는 장소가 됩니다. 바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며 하늘의 문을 여는 곳입니다. 성전은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에 지어졌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이방인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사 우리 속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넷째, 서원한 야곱(20-22)
20-2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 약속들은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큰 것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현실 문제가 너무 커 보였기 때문에 다섯 가지 실제적인 것들만 붙들었습니다. 그는 하루 전만 해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였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는 도망자가 되어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밤을 보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꾼 후에 깨어난 지금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이 서원기도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앞길이 막막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살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서원 기도를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잡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서원을 이루어주시니 잡히게 됩니다. 야곱의 일생은 이 서원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서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있어서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으로 자신의 몸을 헌신하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셨고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나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야곱은 서원 기도를 합니다.
야곱이 어머니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어머니의 힘과 지혜로 살 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기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기도 안 해도 어머니가 다 알아서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혼자가 되어 절박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고 고독과 절망의 장벽을 만났을 때 그의 신앙은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광야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돌베개를 하고 누운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주여 나를 취하소서 내가 이만 족하겠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독과 절망의 때에 찾아오십니다. 그럴지라도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구체적인 기도와 결단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꼬투리로 나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나의 장래를 하나님 손에 의탁하고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고 훈련하실 때 먼저 그를 벧엘에서 만나주셨음을 배웠습니다. 그가 고독할 때 먼저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신약적으로 본다면 야곱이 꿈속에서 본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며 내게 두신 뜻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 하신다고 히브리서에서도 약속하셨습니다.(히13:5) 내게 현재 어떤 말 못할 어려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신 하나님이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구체적인 기도의 단을 쌓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28:1-22
요절 / 창28:18,19
벧엘의 하나님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과 신앙에서 새로운 출발점이요 전환점이 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비록 꾀를 써서 형의 축복을 가로채긴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죄와 갈등 가운데서도 그의 작정하신 뜻을 빈틈없이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야곱을 어려운 가운데 만나 주시고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저희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벧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밧단 아람으로 야곱을 보내는 이삭(1-5)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을 하고 또 부탁하였습니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1,2).” 이삭은 에서의 아내요, 며느리들로 인해서 속앓이를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인생에 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이 분별력이 없이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 때 리브가의 동역을 잘 받았던 기억을 하고 믿음의 여인과 결혼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결혼은 복의 산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다시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5).”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고 그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유업으로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로써 이삭은 야곱에게 복을 잘 계승했습니다. 신앙을 자손들에게 계승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많은 고난 속에서도 가정 교육과 가정의 소중함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4천년 동안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세계사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자녀들에게 잘 계승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부모들이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목자들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대일과 말씀 공부와 신앙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자녀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인생 소감을 쓰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 만남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갖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고 밧단아람으로 보냈습니다.
6-9절에는 에서가 왜 다시 이스마엘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면서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서가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였습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이는 그가 영적인 가치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욕심에 기초해서 나온 것이므로 옳은 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판단하기보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판단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취하여 불경건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이제 다른 아내를 더 취한다고 잘못된 가정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에서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아무 효과도 없는 후회에 불과한 것입니다.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는 여러모로 보아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계승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도 민족을 이루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둘째, 영적인 훈련이 필요한 약속의 자녀들(10,11)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때 야곱의 나이는 76세의 노총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때까지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야곱은 외롭고 막연하고 장래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또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한 형을 피해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한 야곱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실까요? 잠12:1절에 의하면 훈련을 받지 않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교육과 훈련에 의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800년 1월 9일 남부 프랑스의 생 세랑이라는 마을 근처의 숲속에서 야생아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야생아는 11~12세 정도의 소년임이 판명되었으나,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후에 사람들은 그 소년을 파리로 옮겨 야수에서 인간으로 변화시키고자 체계적인 시도를 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은 후 그는 화장실 사용에 익숙해졌고, 옷 입는 방법을 습득하여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발전을 보이지 않다가 40세 정도 되는 182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공동체 속에서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훈련을 받을수록 신자들은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통해서 그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기 위해서 또 큰 민족, 풍성한 복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자기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서 상처들이 치료가 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 훈련, 기도 훈련, 영적인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러 모양으로 훈련하십니다. 물질 문제로 훈련하고, 인간 갈등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자녀로 인해서 훈련하시고 목자를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질병을 통해서 훈련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어떤 분은 돈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시고, 어떤 분은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훈련하사 낮추십니다. 어떤 분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훈련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어떤 목적으로 훈련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훈련을 영접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사람을 믿는데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또한 몇몇 사람을 사랑하고 제자를 키우는 제자 양성가로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아서 복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야곱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12-19)
야곱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어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용꿈이나 돼지꿈이 아니라 사닥다리 꿈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사닥다리는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임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이 꿈이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야곱은 이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건강과 재력과 지위와 지식도 무너져 내리고, 직업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 때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곁에 남습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잠을 청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1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게 땅과 자손을 주고 그를 세계 만민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름의 뜻처럼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을 주기는커녕 남의 복도 빼앗는 사기꾼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에게 씻을 수 없는 미움과 상처를 남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밟고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온유한 사람이었으니 이해가지만 그의 삶을 볼 때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도망자입니다. 아버지는 거부였고 우물도 몇 개나 파서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한 목숨 연명하기 힘든 사람이 무슨 복의 근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현실은 장래를 보장받지 못한 노숙자라 할지라도 천하 만민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주십니다. 이는 야곱이 잘 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뜻을 두시고 약속하셨기에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사다리 꿈을 꾸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어디서든 함께 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에겐 지금 돈이나 명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돼지꿈을 꾸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우물을 파고 거부가 된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아버지와는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는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형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치는 자신에게 어머니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도망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만이 야곱은 근본적인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브엘세바에서 그가 의식하지 못할 때에나, 지금 혼자가 되어서 괴로워할 때에나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복중에서부터 약속의 자녀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구속사의 거룩한 뜻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택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부모조차도 자기 인생에 걸림이 된다고 생각하면 자식을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고 택하신 자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너는 나와 교제해야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어머니와의 교제로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혼기가 넘도록 결혼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언젠가 죽기에 영원한 교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교제하셨듯이 이제 야곱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 뜻을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통해 말씀을 듣고 비전을 덧입을 때 행복해집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고 혼자가 되었을 때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에게는 지금 펼쳐진 현실이 전부입니다. 현실이 어떻게 펼쳐지느냐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산다는 것이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변하지 않는 곳이고 하나님이 그 영광 중에 계신 곳입니다. 그도 언젠가는 조상들이 돌아간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그곳이 진짜 돌아갈 곳입니다. 하늘나라에 마음이 있을 때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신실하게 약속의 자녀로서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는 고백은 우리 집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렇게 홀로 된 나와도, 이 황량한 벌판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두려움은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경외감입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곧 예배드리는 장소가 됩니다. 바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며 하늘의 문을 여는 곳입니다. 성전은 솔로몬 때에 예루살렘에 지어졌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이방인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사 우리 속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넷째, 서원한 야곱(20-22)
20-2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 약속들은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큰 것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현실 문제가 너무 커 보였기 때문에 다섯 가지 실제적인 것들만 붙들었습니다. 그는 하루 전만 해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였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는 도망자가 되어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홀로 밤을 보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꾼 후에 깨어난 지금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 이 서원기도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앞길이 막막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살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서원 기도를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잡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서원을 이루어주시니 잡히게 됩니다. 야곱의 일생은 이 서원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서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있어서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으로 자신의 몸을 헌신하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셨고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나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야곱은 서원 기도를 합니다.
야곱이 어머니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어머니의 힘과 지혜로 살 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기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기도 안 해도 어머니가 다 알아서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혼자가 되어 절박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고 고독과 절망의 장벽을 만났을 때 그의 신앙은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광야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돌베개를 하고 누운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주여 나를 취하소서 내가 이만 족하겠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독과 절망의 때에 찾아오십니다. 그럴지라도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구체적인 기도와 결단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꼬투리로 나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나의 장래를 하나님 손에 의탁하고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고 훈련하실 때 먼저 그를 벧엘에서 만나주셨음을 배웠습니다. 그가 고독할 때 먼저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신약적으로 본다면 야곱이 꿈속에서 본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며 내게 두신 뜻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 하신다고 히브리서에서도 약속하셨습니다.(히13:5) 내게 현재 어떤 말 못할 어려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신 하나님이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구체적인 기도의 단을 쌓으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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