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창17강(25:23-34, 27장)/ 장자의 명분을 계승한 야곱
페이지 정보

본문
2005년 창세기 제 17 강
말씀/ 창세기 25:23-34, 27:1-46
요절/ 창세기 27:29
장자의 명분을 계승한 야곱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오늘 말씀은 에서와 야곱 간의 복에 대한 투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복을 계승하는 장자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의 투쟁에서 에서가 참패하게 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또 야곱은 어떻게 그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같이 묵묵히 기다림도 아니요, 이삭과 같이 순종으로 일관된 유순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의 결과입니다(25:23).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모태로부터 야곱에게 뜻을 두셨습니다. 25: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싸우는 고로 하나님께 나아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들이대시면 구원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긍휼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현재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왕국의 시민이 되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은혜요 복입니다. 성령님이 한 죄인의 심령에 임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지금까지 왕노릇하던 귀신들을 무장해제 시켜, 쫓아내고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게 한 사건은 은혜 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 아닐 없습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 복을 받는 사람들은 실리보다 명분을 귀하게 여깁니다(25:24-34).
리브가의 해산 기한이 차서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음이란 뜻이고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음, 거짓말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자라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활을 어깨에 차고는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사냥을 하였습니다. 그는 야성미가 넘쳤습니다. 화통하고 시원시원하고 카우보이 같이 멋있게 보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살결이 매끈매끈하고 조용하고 장막에서 어머니의 심부름 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특히 팥죽을 쑤는데 일품이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맛있게 쑤었는데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였습니다. 팥죽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하고 침샘이 돌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 되었습니다. 에돔은 붉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형 에서와 흥정을 하였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간발의 차이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게 되고 항상 동생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운명적인 탄생을 뒤집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이 사냥하러 나간 것을 알고 팥죽을 쑤면서 기회를 잡고자 했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듯이 에서가 사냥터에서 돌아와서는 배가 고파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장자는 보통 아버지의 신분을 이어받고, 상속 때에 가옥과 모든 재산의 분배에 대해 다른 형제에 나누어 주는 것의 2배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5:31,신 21:15-17). 장자의 권리 가운데는, 가족제사에 있어서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도 포함되어 있었고, 에서가 야곱에게 한 대로, 아우에게 팔수도 있었습니다(창 25:31-33,히12:16). 시편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시49:20).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명분이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장자의 명분이 배가 고플 때 문제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배가 고프자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 하나님께 맹세하고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히브리서 12장16절에서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나중에 축복을 받고자 한 것을 볼 때 장자의 명분이 귀한 것인 줄 알았지만 당장 배가 고프니까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장 배가 고프더라도 명분을 지킬 수 있어야 가치관이 있고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 선교사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사람은 망령된 자입니다. 명분은 내가 누구냐라는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러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그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했습니다. 실용주의 철학을 체계화시킨 윌리엄 제임스는 “진리는 현금가치”라고 말했습니다. 실용주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유익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표준이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 눈에 보이고 당장 유익한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주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역사에 남는 것 등을 추구해야 합니다. 시16: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땅에 있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은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목자의 명분은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일대일 목자는 한 명의 양을 마음에 품고 사랑하고 말씀으로 섬깁니다. 또 그의 영적인 아비요 어미가 되어서 눈물과 기도로 섬깁니다. 일만 스승이 있지만 한 사람의 영적인 아비요 목자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실제적으로 섬기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흠모하는 직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죄하고 심판하는 판사나 검사의 직분도 영광스럽지만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고 화목하게 하는 목자, 선교사의 직분은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목자로서 살고 싶습니다. 특히 캠퍼스에서 젊은 대학생들과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요회 목자님들은 사역자입니다. 영혼의 감독자이면서 성경 선생이요 섬기는 종입니다. 요회 목자는 우리 모임의 꽃입니다. 이 분들이 활짝 필 때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요한목자님은 목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복을 받은 분입니다. 그는 출퇴근을 위해서 하루 네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직장에 다녔습니다. 사실 그의 직장은 부모님 집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서울의 집을 팔고 그곳으로 오면 집 값고 싸고 또 투자할 가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홍대 근처에 집을 얻고 홍익대 캠퍼스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때가 되자 30분 거리에 있는 좋은 직장을 주셨습니다. 이 가정의 믿음의 투쟁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물질주의, 육신주의, 쾌락주의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살면서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 성경 선생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이를 감당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자신의 죄악과 싸워야 하고 교만한 자아가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며 죄악된 자기가 죽는 내적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 놓는 회개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명분들이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영적인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십자가의 길, 좁은 길,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형제자매님들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복 받는 사람은 믿음의 여인에게서 동역을 받습니다(27:1-24).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이 노화 현상으로 인해서 잘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분별력도 많이 잃어버린 듯합니다. 그는 늙어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나아가 사냥하여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다가 먹게 하라고 합니다. 별미를 먹고 자신이 죽기 전에 마음껏 너를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에서는 신이 나서 들로 바람처럼 나아갔습니다. 이삭은 축복을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문제 앞에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관습에 따라서 장자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인 리브가가 있었습니다. 이삭의 말을 들은 리브가는 어떻게 했습니까? 리브가는 그 아들 야곱을 불러 지금 그 부친 야곱이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기 위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염소 떼에 가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가져오면 그것으로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그것을 가져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리브가는 매우 민첩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들은 바 말씀을 이루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거침없이 행동했습니다. 이삭이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인간적으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자 이삭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삭의 권위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니 도덕적으로는 흠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그녀의 신앙을 보아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이루고자 하는 그녀의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믿음의 여인 리브가의 말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형은 털 사람이요 자신은 매끈매끈한 사람인데 아버지가 자기를 만지면 속이는 것이 탄로가 나고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덤벙 덤벙대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면서 행동하는 완전주의자였습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아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13).” 야곱이 양을 가져오자 리브가는 별미를 만들고 또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어 아버지에게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은 맏아들 에서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고 묻자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하셨다고 두 번째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삭이 하도 이상하여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고 묻자 야곱은 그러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세 번씩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축복을 쟁취하기 위한 야곱의 행동은 치밀하고 철저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가까이 오라고 해서 손을 만지면서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많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도 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야곱의 불의를 라반을 통해서 드러내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 받는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믿음의 여인들과 동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여인들의 단순한 믿음을 크게 쓰셨습니다.
넷째, 복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한 야곱(25-29).
이삭은 야곱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먹고 마음껏 축복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가까이 오도록 해서 입맞추고 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자기 아들을 축복할 때 네 가지로 복을 빌었습니다. 첫째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이삭은 아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영향력이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은 삶의 자세, 믿음, 절제, 의로움, 사랑 등 일상 생활에서 그의 인격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삭은 그 아들 야곱이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고 여유있는 삶을 살도록 축복했습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셋째로,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한다는 말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아들 야곱이 그 시대의 목자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어디를 가든지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는 것은 권위를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부지런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삭은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 말년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될 열두 아들들과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 왕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데 있습니다.
다섯째, 에서가 복의 투쟁에서 참패한 원인은 “불신 결혼”때문입니다(30-46).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이삭 앞에서 나갔습니다. 야곱이 나가자마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는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서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 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버스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삭은 이미 축복을 받은 자가 야곱인 것을 깨닫고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번 축복을 했으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그 말을 듣고 방성대곡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축복해 달라고 했습니다. 부스러기 복이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먼저 한끼 음식으로 장자권을 팔고, 그 복을 경멸한 죄를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근심이 된 불신 결혼의 영적 음행과 불경건을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복만을 추구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복은 의를 추구하는 결과로 당연히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주의, 기복 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복은 당연히 굴러 들어옵니다.
에서가 방성대곡해도 이삭은 단호했습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에서는 땅이 황폐하여 칼을 믿고 살게 될 것이며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여 아버지가 죽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잃을 수 없어서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죽을 때까지 아들 야곱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20년 동안 타향 살이, 처가 살이를 하면서 양치는 훈련, 섬기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26:34,35절과 27장 46절과 28:6-9절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왜 저자는 복에 대한 투쟁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에 에서의 불신 결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을까요? 에서가 복의 투쟁에서 참패한 원인은 바로 “불신 결혼”때문입니다. 그가 결혼한 두 명의 헷 여인은 부모에게 마음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쓴 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결혼을 한 이삭과 야곱은 자기 아내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됩니다. 반대로 에서의 아내들은 에서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전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또 우리는 명분을 귀히 여긴 야곱의 가치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망령된 에서의 가치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계승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시고 구원 역사에 써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신자의 명분, 목자의 직분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창세기 25:23-34, 27:1-46
요절/ 창세기 27:29
장자의 명분을 계승한 야곱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오늘 말씀은 에서와 야곱 간의 복에 대한 투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복을 계승하는 장자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의 투쟁에서 에서가 참패하게 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또 야곱은 어떻게 그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같이 묵묵히 기다림도 아니요, 이삭과 같이 순종으로 일관된 유순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의 결과입니다(25:23).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모태로부터 야곱에게 뜻을 두셨습니다. 25: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싸우는 고로 하나님께 나아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들이대시면 구원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긍휼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현재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왕국의 시민이 되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은혜요 복입니다. 성령님이 한 죄인의 심령에 임하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지금까지 왕노릇하던 귀신들을 무장해제 시켜, 쫓아내고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게 한 사건은 은혜 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 아닐 없습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 복을 받는 사람들은 실리보다 명분을 귀하게 여깁니다(25:24-34).
리브가의 해산 기한이 차서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음이란 뜻이고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음, 거짓말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자라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활을 어깨에 차고는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사냥을 하였습니다. 그는 야성미가 넘쳤습니다. 화통하고 시원시원하고 카우보이 같이 멋있게 보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살결이 매끈매끈하고 조용하고 장막에서 어머니의 심부름 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특히 팥죽을 쑤는데 일품이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맛있게 쑤었는데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였습니다. 팥죽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하고 침샘이 돌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 되었습니다. 에돔은 붉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형 에서와 흥정을 하였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간발의 차이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게 되고 항상 동생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운명적인 탄생을 뒤집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이 사냥하러 나간 것을 알고 팥죽을 쑤면서 기회를 잡고자 했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듯이 에서가 사냥터에서 돌아와서는 배가 고파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장자는 보통 아버지의 신분을 이어받고, 상속 때에 가옥과 모든 재산의 분배에 대해 다른 형제에 나누어 주는 것의 2배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5:31,신 21:15-17). 장자의 권리 가운데는, 가족제사에 있어서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도 포함되어 있었고, 에서가 야곱에게 한 대로, 아우에게 팔수도 있었습니다(창 25:31-33,히12:16). 시편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시49:20).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명분이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장자의 명분이 배가 고플 때 문제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배가 고프자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 하나님께 맹세하고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히브리서 12장16절에서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나중에 축복을 받고자 한 것을 볼 때 장자의 명분이 귀한 것인 줄 알았지만 당장 배가 고프니까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장 배가 고프더라도 명분을 지킬 수 있어야 가치관이 있고 철학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 선교사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사람은 망령된 자입니다. 명분은 내가 누구냐라는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러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그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했습니다. 실용주의 철학을 체계화시킨 윌리엄 제임스는 “진리는 현금가치”라고 말했습니다. 실용주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유익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표준이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야곱과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 눈에 보이고 당장 유익한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주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역사에 남는 것 등을 추구해야 합니다. 시16: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땅에 있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은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목자의 명분은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일대일 목자는 한 명의 양을 마음에 품고 사랑하고 말씀으로 섬깁니다. 또 그의 영적인 아비요 어미가 되어서 눈물과 기도로 섬깁니다. 일만 스승이 있지만 한 사람의 영적인 아비요 목자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실제적으로 섬기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흠모하는 직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죄하고 심판하는 판사나 검사의 직분도 영광스럽지만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고 화목하게 하는 목자, 선교사의 직분은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목자로서 살고 싶습니다. 특히 캠퍼스에서 젊은 대학생들과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요회 목자님들은 사역자입니다. 영혼의 감독자이면서 성경 선생이요 섬기는 종입니다. 요회 목자는 우리 모임의 꽃입니다. 이 분들이 활짝 필 때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요한목자님은 목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복을 받은 분입니다. 그는 출퇴근을 위해서 하루 네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직장에 다녔습니다. 사실 그의 직장은 부모님 집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서울의 집을 팔고 그곳으로 오면 집 값고 싸고 또 투자할 가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홍대 근처에 집을 얻고 홍익대 캠퍼스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때가 되자 30분 거리에 있는 좋은 직장을 주셨습니다. 이 가정의 믿음의 투쟁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물질주의, 육신주의, 쾌락주의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살면서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 성경 선생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이를 감당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자신의 죄악과 싸워야 하고 교만한 자아가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며 죄악된 자기가 죽는 내적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 놓는 회개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명분들이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은 거룩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영적인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십자가의 길, 좁은 길,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형제자매님들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복 받는 사람은 믿음의 여인에게서 동역을 받습니다(27:1-24).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이 노화 현상으로 인해서 잘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분별력도 많이 잃어버린 듯합니다. 그는 늙어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나아가 사냥하여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다가 먹게 하라고 합니다. 별미를 먹고 자신이 죽기 전에 마음껏 너를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에서는 신이 나서 들로 바람처럼 나아갔습니다. 이삭은 축복을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문제 앞에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관습에 따라서 장자를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인 리브가가 있었습니다. 이삭의 말을 들은 리브가는 어떻게 했습니까? 리브가는 그 아들 야곱을 불러 지금 그 부친 야곱이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기 위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염소 떼에 가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가져오면 그것으로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그것을 가져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리브가는 매우 민첩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들은 바 말씀을 이루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거침없이 행동했습니다. 이삭이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인간적으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자 이삭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삭의 권위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니 도덕적으로는 흠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그녀의 신앙을 보아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이루고자 하는 그녀의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믿음의 여인 리브가의 말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형은 털 사람이요 자신은 매끈매끈한 사람인데 아버지가 자기를 만지면 속이는 것이 탄로가 나고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덤벙 덤벙대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면서 행동하는 완전주의자였습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아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13).” 야곱이 양을 가져오자 리브가는 별미를 만들고 또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어 아버지에게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은 맏아들 에서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고 묻자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하셨다고 두 번째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삭이 하도 이상하여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고 묻자 야곱은 그러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세 번씩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축복을 쟁취하기 위한 야곱의 행동은 치밀하고 철저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가까이 오라고 해서 손을 만지면서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많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도 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야곱의 불의를 라반을 통해서 드러내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 받는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믿음의 여인들과 동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여인들의 단순한 믿음을 크게 쓰셨습니다.
넷째, 복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한 야곱(25-29).
이삭은 야곱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먹고 마음껏 축복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가까이 오도록 해서 입맞추고 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자기 아들을 축복할 때 네 가지로 복을 빌었습니다. 첫째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이삭은 아들이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영향력이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은 삶의 자세, 믿음, 절제, 의로움, 사랑 등 일상 생활에서 그의 인격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삭은 그 아들 야곱이 물질적으로도 풍성하고 여유있는 삶을 살도록 축복했습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셋째로,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한다는 말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아들 야곱이 그 시대의 목자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어디를 가든지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는 것은 권위를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부지런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삭은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 말년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될 열두 아들들과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 왕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데 있습니다.
다섯째, 에서가 복의 투쟁에서 참패한 원인은 “불신 결혼”때문입니다(30-46).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이삭 앞에서 나갔습니다. 야곱이 나가자마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는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서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 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버스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삭은 이미 축복을 받은 자가 야곱인 것을 깨닫고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번 축복을 했으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그 말을 듣고 방성대곡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축복해 달라고 했습니다. 부스러기 복이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먼저 한끼 음식으로 장자권을 팔고, 그 복을 경멸한 죄를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근심이 된 불신 결혼의 영적 음행과 불경건을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복만을 추구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복은 의를 추구하는 결과로 당연히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주의, 기복 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복은 당연히 굴러 들어옵니다.
에서가 방성대곡해도 이삭은 단호했습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에서는 땅이 황폐하여 칼을 믿고 살게 될 것이며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여 아버지가 죽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잃을 수 없어서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죽을 때까지 아들 야곱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20년 동안 타향 살이, 처가 살이를 하면서 양치는 훈련, 섬기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26:34,35절과 27장 46절과 28:6-9절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왜 저자는 복에 대한 투쟁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에 에서의 불신 결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을까요? 에서가 복의 투쟁에서 참패한 원인은 바로 “불신 결혼”때문입니다. 그가 결혼한 두 명의 헷 여인은 부모에게 마음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쓴 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결혼을 한 이삭과 야곱은 자기 아내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됩니다. 반대로 에서의 아내들은 에서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전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또 우리는 명분을 귀히 여긴 야곱의 가치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망령된 에서의 가치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를 계승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시고 구원 역사에 써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신자의 명분, 목자의 직분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5gen17.hwp (0byte)
112회 다운로드 | DATE : 2005-06-26 09:04:4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