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청세기 14강(창22,23장)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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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14강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말씀/창세기 22-23장
요절/창세기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여러 가지로 축복하셨습니다. 그에게 물질적으로 축복하사 거부가 되게 하셨고 그가 그토록 소망했던 약속의 아들, 이삭도 사라를 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영육 간에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더 축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열국의 아비요 복의 근원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약속의 아들로 받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혹독한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축복으로 주신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축복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많은 문제가 청지기적인 자세로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진정한 열국의 아비요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기 위해 어떻게 훈련시키시고 시험하셨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I.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22:1-19)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근심 중에도 이스마엘을 떠나보냈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반드시 넘어야할 믿음의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1절에서 ‘그일 후에’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아브라함이 노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떠나보낸 후를 말합니다. 이 때는 참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통해 인생문제를 해결 받고 평강을 누리던 아브라함의 인생의 최고의 축복의 때였습니다. 참으로 이제는 모든 시험이 끝나고 축복을 누리는 것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고자 하는 영적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명령은 너무 지나친 듯 보입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 노년에 얻은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25년간 훈련하신 후 믿음의 열매로 주신 언약의 아들입니다.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도 쫓아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아들인가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아들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시험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시험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보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냐, 축복으로 주신 이삭이냐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 하나님보다 축복을 더 사랑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매어달릴 때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부족함이 없을 때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의 마음이 다른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우매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축복을 더 사랑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축복은 구체적으로 보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축복보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축복의 결정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한 마디 대꾸나 반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시는가 이유도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명령을 받자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우물쭈물 하지 않고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사라와도 이 문제를 의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핑계를 찾고자 했다면 모성애가 강한 사라에게 모든 것을 알려 ‘나는 순종하고자 했지만 동역자가 막아서...’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결단이 요구될 때 즉시 순종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 억지로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도록 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꾸물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너는 반드시 이것을 해야 돼’하며 소리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아침 일찍 떠난 그 길은 사흘 길이나 되었습니다. 사흘 길을 가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 길은 참으로 길고도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하는 이 엄청난 일을 그 누가 이해하며, 그 누가 함께 감당해 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사라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환들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온전히 그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 모리아 산기슭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함께 온 사환들을 산기슭에 남게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하고자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데리고 간다면 이삭을 잡으려할 때 우리 주인이 늙어 노망들었다고 하며 훼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때도 순종하는 척 하면서 ‘나는 순종하고자 했지만 종들이 말려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핑계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순종의 꼬투리를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온전히 순종하고자 미리 환경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나무를 지고 올라가던 이삭이 돌발 질문을 하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은 순종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그의 부성의 바다에 휘몰아치는 광풍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광풍에 의연히 맞섰습니다. 대강 넘어가거나 회피하지 않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아브라함은 이삭의 마음에 믿음을 심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순간에도 내면에 참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몇 년에 걸쳐 아브라함을 훈련하셨고, 이 훈련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배웠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좇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고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 그의 이러한 믿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믿음의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25년간의 믿음의 훈련에 의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함과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았습니다. 이 때 이삭이 반항하며 도망갔더라면 얼마나 곤란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할 때 순종하였습니다.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이삭을 잡고자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사라가 만일 이 장면을 보았다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 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하시고 아브라함을 급히 막으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 거듭 부르신 것은 얼마나 다급하게 막으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순종을 확인하시고 그의 손을 막아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제사는 이미 그의 마음에서 성취되었고, 그는 요구사항을 충분히 만족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합격을 선언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이삭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가 그 중심을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이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온전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이삭을 바치지 못했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임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약2:17)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때 증명이 됩니다. 축복보다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할 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도록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이 놀라운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장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시고 그 손을 막으셨지만 하나님 자신은 예수님을 실제로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가장 귀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순종의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는 최고의 신앙체험입니다. 오직 어떠한 상황과 여건 가운데서도 앞뒤 재지 않고 단순히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고자 했을 때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체험한 믿음을 기념하여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일생동안의 신앙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여 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셨고 그 일생을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지만 정반대였습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심으로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허다한 영적 자손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승리와 구원의 축복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네 씨’는 단수로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오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모두 다 성취되었습니다.(갈 3:16)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천하 만민이 저주 받은 삶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한 사람의 순종으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자들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이삭을 드리는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자신의 이삭을 드리기까지 순종하여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II. 막벨라 굴을 산 아브라함(23장)
1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고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었습니다. 이 곳은 아브라함의 나그네 삶에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땅을 양보하고 연약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땅과 자식에 대한 약속과 소망을 심어 주신 곳이며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창 13:18)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의 슬픔이 어떠합니까?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라는 믿음의 여인으로 아브라함의 누이요, 신부요, 동역자였습니다. 사라는 실로 일생동안 아브라함과 함께 하여 왔습니다. 특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개척지이자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며 순종하며 나그네의 삶을 동역하였습니다.(히 11:11-12, 벧전 3:5,6). 아브라함에게 있어 힘들고 어려운 나그네 삶 동안 사라의 동역은 더위의 얼음냉수와 같았습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있어 사라의 죽음은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속하여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라를 장사지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풀어 나가면서도 믿음의 조상답게 해결해 나갔습니다.
그가 비록 믿음의 조상으로 택함 받고 하나님께 이 땅을 유업으로 약속 받았지만 그때까지 발붙일 만큼의 땅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지만 장사지낼 땅 한 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까지 바치는 결단을 하였는데 형편이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을 더욱 서러워하며 슬피 울기만 할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고 그 시대의 관습을 좇아 헷 족속과 땅에 대하여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분명하게 사라를 장사지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사하는 땅을 반드시 소유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믿음의 분별력과 역사의식, 그리고 이에 따르는 결단이 들어 있습니다. 그 땅이 비록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들이 그가 원하는 어떤 묘실도 그냥 주겠다는 호의와 막벨라 굴과 그에 딸린 밭을 그냥 주겠다고 에브론이 제안했을 때에도 이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브론이 부르는 값인 은 400세겔을 모두 주고 그 밭과 굴을 샀습니다. 그는 그냥 얻지 않고 값을 지불하고 사는 매매형식을 취하여 헷 족속들이 아브라함이 산 땅을 아브라함의 소유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주겠다는 땅을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헷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아브라함의 소유지로 등기하고, 그 땅을 그 후손들에게 상속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증거를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를 장사 지낸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도 이 막벨라 굴에 묻혔고, 이삭과 리브가도 여기에 묻혔습니다. 야곱과 레아도 여기에 묻혔는데 특히 야곱은 애굽에서 죽었지만 요셉에게 막벨라 굴에 장사하도록 유언을 하여 가나안 땅에까지 유해를 모시고 가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는 4백년 후 출애굽의 역사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나온 역사의식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은 이 땅을 약속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함이 없으시지만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습니다. 헷 족속이 당장에는 땅을 그냥 주겠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반드시 나중에라도 댓가를 요구하거나, 다음 세대에서 증여 사실을 부인하고 얼마든지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실랑이를 하면서까지 많은 돈을 들여서 그 땅을 사고 그 땅에 사라와 자신의 뼈를 묻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소망은 가나안 땅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진정한 소망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철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그의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였습니다.(히11:14-1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국과 세계 캠퍼스를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홍대를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섬기는 약속의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약속을 믿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현실은 비록 아브라함이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받지 못하였던 것처럼 현재의 역사가 너무 미미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온전하게 주실 것을 믿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거룩한 나그네의 인생철학을 갖고 사명인으로서 약속의 땅에 뼈를 묻고자 하는 각오로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제목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도전하여 홍대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며 올 한해 100명대의 주일 예배와 150팀 1:1 역사, 그리고 30명의 새 양 제자 양성 역사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중심, 곧 소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알아보시고자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스마엘까지만 내놓고 이삭을 내놓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답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세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이삭을 사랑하고 아끼고 기뻐하였지만 하나님보다 결코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도 부르심 받았을 때부터 일생을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예수님마저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시며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이 시대의 아브라함처럼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종들이요, 순종하는 종들로 세우시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말씀/창세기 22-23장
요절/창세기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여러 가지로 축복하셨습니다. 그에게 물질적으로 축복하사 거부가 되게 하셨고 그가 그토록 소망했던 약속의 아들, 이삭도 사라를 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영육 간에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더 축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열국의 아비요 복의 근원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약속의 아들로 받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혹독한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축복으로 주신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축복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많은 문제가 청지기적인 자세로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진정한 열국의 아비요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기 위해 어떻게 훈련시키시고 시험하셨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I.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22:1-19)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근심 중에도 이스마엘을 떠나보냈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반드시 넘어야할 믿음의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1절에서 ‘그일 후에’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아브라함이 노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떠나보낸 후를 말합니다. 이 때는 참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통해 인생문제를 해결 받고 평강을 누리던 아브라함의 인생의 최고의 축복의 때였습니다. 참으로 이제는 모든 시험이 끝나고 축복을 누리는 것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고자 하는 영적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명령은 너무 지나친 듯 보입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아브라함 노년에 얻은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25년간 훈련하신 후 믿음의 열매로 주신 언약의 아들입니다.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도 쫓아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아들인가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아들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시험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시험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보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냐, 축복으로 주신 이삭이냐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 하나님보다 축복을 더 사랑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매어달릴 때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부족함이 없을 때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의 마음이 다른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우매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축복을 더 사랑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축복은 구체적으로 보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축복보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축복의 결정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한 마디 대꾸나 반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시는가 이유도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명령을 받자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우물쭈물 하지 않고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사라와도 이 문제를 의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핑계를 찾고자 했다면 모성애가 강한 사라에게 모든 것을 알려 ‘나는 순종하고자 했지만 동역자가 막아서...’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결단이 요구될 때 즉시 순종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 억지로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것이 불가능해지도록 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꾸물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너는 반드시 이것을 해야 돼’하며 소리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아침 일찍 떠난 그 길은 사흘 길이나 되었습니다. 사흘 길을 가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 길은 참으로 길고도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하는 이 엄청난 일을 그 누가 이해하며, 그 누가 함께 감당해 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사라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환들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온전히 그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 모리아 산기슭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함께 온 사환들을 산기슭에 남게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하고자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데리고 간다면 이삭을 잡으려할 때 우리 주인이 늙어 노망들었다고 하며 훼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때도 순종하는 척 하면서 ‘나는 순종하고자 했지만 종들이 말려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핑계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순종의 꼬투리를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온전히 순종하고자 미리 환경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나무를 지고 올라가던 이삭이 돌발 질문을 하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은 순종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견딜 수 없는, 그의 부성의 바다에 휘몰아치는 광풍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광풍에 의연히 맞섰습니다. 대강 넘어가거나 회피하지 않고 확고한 믿음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아브라함은 이삭의 마음에 믿음을 심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순간에도 내면에 참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몇 년에 걸쳐 아브라함을 훈련하셨고, 이 훈련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배웠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좇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고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 그의 이러한 믿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믿음의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25년간의 믿음의 훈련에 의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함과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았습니다. 이 때 이삭이 반항하며 도망갔더라면 얼마나 곤란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할 때 순종하였습니다.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이삭을 잡고자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사라가 만일 이 장면을 보았다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 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크게 감동하시고 아브라함을 급히 막으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 거듭 부르신 것은 얼마나 다급하게 막으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순종을 확인하시고 그의 손을 막아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제사는 이미 그의 마음에서 성취되었고, 그는 요구사항을 충분히 만족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합격을 선언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이삭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가 그 중심을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이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 자신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온전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이삭을 바치지 못했다면 그 믿음은 거짓된 것임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약2:17)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때 증명이 됩니다. 축복보다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할 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도록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이 놀라운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장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으시고 그 손을 막으셨지만 하나님 자신은 예수님을 실제로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가장 귀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는 순종의 사건을 통하여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는 최고의 신앙체험입니다. 오직 어떠한 상황과 여건 가운데서도 앞뒤 재지 않고 단순히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고자 했을 때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체험한 믿음을 기념하여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일생동안의 신앙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여 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셨고 그 일생을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지만 정반대였습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심으로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허다한 영적 자손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승리와 구원의 축복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네 씨’는 단수로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오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모두 다 성취되었습니다.(갈 3:16)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천하 만민이 저주 받은 삶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한 사람의 순종으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자들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이삭을 드리는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자신의 이삭을 드리기까지 순종하여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II. 막벨라 굴을 산 아브라함(23장)
1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고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었습니다. 이 곳은 아브라함의 나그네 삶에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땅을 양보하고 연약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땅과 자식에 대한 약속과 소망을 심어 주신 곳이며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창 13:18)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의 슬픔이 어떠합니까?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라는 믿음의 여인으로 아브라함의 누이요, 신부요, 동역자였습니다. 사라는 실로 일생동안 아브라함과 함께 하여 왔습니다. 특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개척지이자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며 순종하며 나그네의 삶을 동역하였습니다.(히 11:11-12, 벧전 3:5,6). 아브라함에게 있어 힘들고 어려운 나그네 삶 동안 사라의 동역은 더위의 얼음냉수와 같았습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있어 사라의 죽음은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속하여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라를 장사지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풀어 나가면서도 믿음의 조상답게 해결해 나갔습니다.
그가 비록 믿음의 조상으로 택함 받고 하나님께 이 땅을 유업으로 약속 받았지만 그때까지 발붙일 만큼의 땅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지만 장사지낼 땅 한 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까지 바치는 결단을 하였는데 형편이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형편을 더욱 서러워하며 슬피 울기만 할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고 그 시대의 관습을 좇아 헷 족속과 땅에 대하여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분명하게 사라를 장사지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사하는 땅을 반드시 소유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믿음의 분별력과 역사의식, 그리고 이에 따르는 결단이 들어 있습니다. 그 땅이 비록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들이 그가 원하는 어떤 묘실도 그냥 주겠다는 호의와 막벨라 굴과 그에 딸린 밭을 그냥 주겠다고 에브론이 제안했을 때에도 이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브론이 부르는 값인 은 400세겔을 모두 주고 그 밭과 굴을 샀습니다. 그는 그냥 얻지 않고 값을 지불하고 사는 매매형식을 취하여 헷 족속들이 아브라함이 산 땅을 아브라함의 소유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주겠다는 땅을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헷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아브라함의 소유지로 등기하고, 그 땅을 그 후손들에게 상속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증거를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막벨라 굴을 사서 사라를 장사 지낸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도 이 막벨라 굴에 묻혔고, 이삭과 리브가도 여기에 묻혔습니다. 야곱과 레아도 여기에 묻혔는데 특히 야곱은 애굽에서 죽었지만 요셉에게 막벨라 굴에 장사하도록 유언을 하여 가나안 땅에까지 유해를 모시고 가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는 4백년 후 출애굽의 역사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나온 역사의식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은 이 땅을 약속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함이 없으시지만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습니다. 헷 족속이 당장에는 땅을 그냥 주겠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반드시 나중에라도 댓가를 요구하거나, 다음 세대에서 증여 사실을 부인하고 얼마든지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실랑이를 하면서까지 많은 돈을 들여서 그 땅을 사고 그 땅에 사라와 자신의 뼈를 묻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소망은 가나안 땅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진정한 소망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철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그의 소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였습니다.(히11:14-1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국과 세계 캠퍼스를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홍대를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섬기는 약속의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약속을 믿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현실은 비록 아브라함이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받지 못하였던 것처럼 현재의 역사가 너무 미미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온전하게 주실 것을 믿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거룩한 나그네의 인생철학을 갖고 사명인으로서 약속의 땅에 뼈를 묻고자 하는 각오로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제목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도전하여 홍대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며 올 한해 100명대의 주일 예배와 150팀 1:1 역사, 그리고 30명의 새 양 제자 양성 역사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중심, 곧 소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알아보시고자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스마엘까지만 내놓고 이삭을 내놓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답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세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이삭을 사랑하고 아끼고 기뻐하였지만 하나님보다 결코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도 부르심 받았을 때부터 일생을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예수님마저도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시며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이 시대의 아브라함처럼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종들이요, 순종하는 종들로 세우시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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