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gen13(20,21장)/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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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13 강
말씀 / 창세기 20,21장
요절 / 창세기 21:1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아브라함과 롯의 생활을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롯이 훨씬 더 빛나는 인생을 살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다 늙어서 신앙출발을 했지만, 롯은 아주 젊은 나이에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늦게까지 자식문제 하나 해결 못 해서 낑낑댔지만, 롯은 자식문제로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로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치고 약속의 땅에 거하며 믿음으로 살았지만, 롯은 세상 욕심을 따라 화려한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생 결산은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롯은 처음에 인생이 잘 풀리는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고생을 많이 했지만 최후에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조건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머리의 차이도 아니었습니다. 건강이나 나이의 차이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자세의 차이였고,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 참된 권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고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실수가 많은 아브라함이지만 말씀대로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끝까지 감당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은 또 다시 과거의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그랄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누이라 속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성숙한 나이인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가 이런 실수를 한 것은 속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누구나 어이없는 짓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도 당대에 의인이었지만 술을 먹고 자식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다윗 왕도 그 시대의 등불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었지만 게으름을 피우다가 정욕의 죄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충성스러운 제자였지만 계집종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25년을 키워놨더니 겨우 그 정도냐? 아따 믿음의 조상, 빨리 바꿔” 하며 재빨리 선수교체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즉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당신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로 속인 것이 분명 잘못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중심이 삐뚤어지지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그 마음에 연약함과 두려움 때문에 실수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빗나가지는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실수를 담당해 주시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위치를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연약해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중심이 삐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더구나 세상의 불의한 세력들이 우리를 해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창세기 12:3절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자를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를 저주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경고 조치를 받은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은 천개를 주어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16). 또한 아브라함에게는 사죄의 표시로 양과 소와 노비까지 주었습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인들의 닫힌 태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존귀하게 높이셨는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사람의 생명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여인들의 태가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했고, 기도로 롯을 구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엄청난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적 권세 앞에 누가 감히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의 왕 바로도, 그랄의 왕 아비멜렉도 꼼짝하지 못하고 아브라함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구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7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we are more than conquerors).”
아비멜렉이 국방장관 비골과 함께 와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다 같이 21:22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이도 많고, 힘도 없었습니다. 자기 마누라 한 사람 지켜내지 못 할 만큼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랄의 왕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여 벌벌 떱니다. 그 나라의 국방장관 비골까지 데리고 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들이 왜 이처럼 아브라함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God is with you)”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이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 화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아내를 손대려고 했더니 갑자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손대지 마. 너 죽어” 경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우물을 뺏으려고 했더니, 집에 소들이 갑자기 광우병에 걸려서 죽어 갑니다. 빼앗은 우물물을 먹은 양들이 다 설사를 하고 난리가 아닙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예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니까 잘 모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큰 손해를 보겠다’ 싶어서 머리를 숙이고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둘째로, 하나님은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다같이 21:1,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고, 경수가 끊어져서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 하신대로,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환경에 따라 말씀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환경이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가 한 약속인데도 식은 죽 먹듯이 그 약속을 어깁니다. 이는 꼭 그 사람이 악해서 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못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3: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아브라함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붙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도중에 믿음이 부족해서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가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늘의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로마서 4:18-21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히브리서 11:11절에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당신의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한참을 가도 도대체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디고 힘들게 느껴지면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롯과 같이 곁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직하게 믿음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보이지 않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맞아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실 줄을 믿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하나님께서 한번 하신 약속은 그 인간조건이 아무리 100세가 되어도,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창18:14). 인간이 절망할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통찰력이 나올까요? 왜 절망의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갖고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할까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반발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힘들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62:1).”
그러면 이왕 주실 거 빨리 주시지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끄신 것일까요? 빨리 줘버리면 아브라함이 문제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도 수습하는데 수고할 필요가 없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브라함의 내면에 찌든 죄를 빼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이 심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심고자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는 때에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따라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성취를 체험한 사라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 다같이 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너무나 기뻐서 웃고 또 웃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웃었습니다. 주변에 이웃들과 친척들도 다 웃었습니다. 아들 이삭이도 영문을 모르고 방긋 방긋, 생긋 생긋 웃었습니다. 아들 이삭의 탄생은 이처럼 아브라함의 가정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시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 인생에 진정한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7절에서 사라는 말했습니다. “사라가 자식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90세 된 할머니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세상에 소가 다 웃을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처럼 소가 웃고, 하늘이 웃고, 땅이 웃을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우리 민족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6.25전쟁으로 인해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6.25때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게도 원조를 받았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가 올림픽을 치루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선교사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하고, 세계 10대 교회 중에서 6개가 한국에 있고, 경제규모가 세계 12위에 올라있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마 50년 전에 누가 이 이야기를 했다면 웃긴 웃되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가 무슨?” 그러나 그 일은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지리적인 조건이 좋아서,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아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백성들이 성품이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민족 가운데 가르쳐 지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우리와 함께 웃으리로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사는 백성들이 기특해서, 그 순수함과 진심이 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로 웃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소망의 주님이시오,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여름수양회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수양회를 통해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보며 많은 영혼들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새롭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웃게 될 것입니다. “상락형제님이 저렇게 변했네” “남길형제님이 저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어” “제임스형제님이 양을 친대”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가정에 이삭이 태어났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이삭을 구박하고 조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라가 보고 아브라함에게 청했습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사 말씀하셨습니다 .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 아브라함이 믿음의 자녀 이삭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을 내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를 감당하기 힘든 방향이었습니다. 그래도 지난 10여 년 동안 정 주고 마음 준 자신의 피붙이를 내어 보낸다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4:28,29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였고 이삭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은 모두 약속의 자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약속의 자녀로 축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삭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약속의 자녀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합니다. 이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립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소욕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 안에서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세상적인 방법대로 편히 쉽게 살고 싶은 생각이 싸웁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소원과 음란과 쾌락의 죄를 지으며 살고 싶은 소원이 싸웁니다. 절대성을 가지고 살고 싶은 마음과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나름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싸웁니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내어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세상 가운데서 애지중지했던 세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를 회개하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그러나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잘라내는 작업은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힘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이스마엘을 데리고 나가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살 길과 거처도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의 결혼문제까지 해결해 주시고 그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갈의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정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 이스마엘 문제를 선하게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게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자기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영원한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가 심은 에셀나무와 같이 영존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습니다.
저희들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속에 있는 정과 욕심, 인본주의, 물질주의, 교만, 불신, 미움, 무정한 마음 등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여러분들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웃는 최후의 승리자들이 될 줄 믿습니다.
말씀 / 창세기 20,21장
요절 / 창세기 21:1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아브라함과 롯의 생활을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롯이 훨씬 더 빛나는 인생을 살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다 늙어서 신앙출발을 했지만, 롯은 아주 젊은 나이에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늦게까지 자식문제 하나 해결 못 해서 낑낑댔지만, 롯은 자식문제로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로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치고 약속의 땅에 거하며 믿음으로 살았지만, 롯은 세상 욕심을 따라 화려한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생 결산은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롯은 처음에 인생이 잘 풀리는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고생을 많이 했지만 최후에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조건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머리의 차이도 아니었습니다. 건강이나 나이의 차이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자세의 차이였고,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 참된 권위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고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실수가 많은 아브라함이지만 말씀대로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끝까지 감당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은 또 다시 과거의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그랄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누이라 속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성숙한 나이인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가 이런 실수를 한 것은 속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누구나 어이없는 짓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도 당대에 의인이었지만 술을 먹고 자식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다윗 왕도 그 시대의 등불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었지만 게으름을 피우다가 정욕의 죄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충성스러운 제자였지만 계집종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25년을 키워놨더니 겨우 그 정도냐? 아따 믿음의 조상, 빨리 바꿔” 하며 재빨리 선수교체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즉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당신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찌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로 속인 것이 분명 잘못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 중심이 삐뚤어지지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그 마음에 연약함과 두려움 때문에 실수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빗나가지는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실수를 담당해 주시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위치를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연약해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본적으로 중심이 삐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더구나 세상의 불의한 세력들이 우리를 해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창세기 12:3절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자를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를 저주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경고 조치를 받은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은 천개를 주어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16). 또한 아브라함에게는 사죄의 표시로 양과 소와 노비까지 주었습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인들의 닫힌 태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존귀하게 높이셨는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사람의 생명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여인들의 태가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했고, 기도로 롯을 구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엄청난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적 권세 앞에 누가 감히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의 왕 바로도, 그랄의 왕 아비멜렉도 꼼짝하지 못하고 아브라함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구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1-37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we are more than conquerors).”
아비멜렉이 국방장관 비골과 함께 와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다 같이 21:22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이도 많고, 힘도 없었습니다. 자기 마누라 한 사람 지켜내지 못 할 만큼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랄의 왕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두려워하여 벌벌 떱니다. 그 나라의 국방장관 비골까지 데리고 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들이 왜 이처럼 아브라함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God is with you)”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이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 화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아내를 손대려고 했더니 갑자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손대지 마. 너 죽어” 경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우물을 뺏으려고 했더니, 집에 소들이 갑자기 광우병에 걸려서 죽어 갑니다. 빼앗은 우물물을 먹은 양들이 다 설사를 하고 난리가 아닙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예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니까 잘 모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큰 손해를 보겠다’ 싶어서 머리를 숙이고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둘째로, 하나님은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다같이 21:1,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고, 경수가 끊어져서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 하신대로,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환경에 따라 말씀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환경이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가 한 약속인데도 식은 죽 먹듯이 그 약속을 어깁니다. 이는 꼭 그 사람이 악해서 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못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3: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아브라함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붙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도중에 믿음이 부족해서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가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늘의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로마서 4:18-21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지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히브리서 11:11절에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당신의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한참을 가도 도대체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디고 힘들게 느껴지면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롯과 같이 곁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직하게 믿음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보이지 않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맞아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실 줄을 믿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하나님께서 한번 하신 약속은 그 인간조건이 아무리 100세가 되어도,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창18:14). 인간이 절망할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통찰력이 나올까요? 왜 절망의 때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갖고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살을 할까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반발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힘들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62:1).”
그러면 이왕 주실 거 빨리 주시지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끄신 것일까요? 빨리 줘버리면 아브라함이 문제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도 수습하는데 수고할 필요가 없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브라함의 내면에 찌든 죄를 빼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이 심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심고자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는 때에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따라 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성취를 체험한 사라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 다같이 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너무나 기뻐서 웃고 또 웃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웃었습니다. 주변에 이웃들과 친척들도 다 웃었습니다. 아들 이삭이도 영문을 모르고 방긋 방긋, 생긋 생긋 웃었습니다. 아들 이삭의 탄생은 이처럼 아브라함의 가정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시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요, 우리 인생에 진정한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7절에서 사라는 말했습니다. “사라가 자식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90세 된 할머니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세상에 소가 다 웃을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처럼 소가 웃고, 하늘이 웃고, 땅이 웃을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우리 민족을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6.25전쟁으로 인해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6.25때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게도 원조를 받았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런 나라가 올림픽을 치루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선교사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파송하고, 세계 10대 교회 중에서 6개가 한국에 있고, 경제규모가 세계 12위에 올라있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마 50년 전에 누가 이 이야기를 했다면 웃긴 웃되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가 무슨?” 그러나 그 일은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지리적인 조건이 좋아서,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아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 백성들이 성품이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민족 가운데 가르쳐 지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우리와 함께 웃으리로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사는 백성들이 기특해서, 그 순수함과 진심이 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로 웃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소망의 주님이시오,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여름수양회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수양회를 통해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보며 많은 영혼들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새롭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웃게 될 것입니다. “상락형제님이 저렇게 변했네” “남길형제님이 저렇게 훌륭하게 성장했어” “제임스형제님이 양을 친대”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상상할 수 없는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가정에 이삭이 태어났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이삭을 구박하고 조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라가 보고 아브라함에게 청했습니다.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사 말씀하셨습니다 .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 아브라함이 믿음의 자녀 이삭을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을 내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으로서는 이를 감당하기 힘든 방향이었습니다. 그래도 지난 10여 년 동안 정 주고 마음 준 자신의 피붙이를 내어 보낸다는 것은 보통 결심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4:28,29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였고 이삭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난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은 모두 약속의 자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약속의 자녀로 축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삭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약속의 자녀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합니다. 이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립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의 소욕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 안에서 영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세상적인 방법대로 편히 쉽게 살고 싶은 생각이 싸웁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소원과 음란과 쾌락의 죄를 지으며 살고 싶은 소원이 싸웁니다. 절대성을 가지고 살고 싶은 마음과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나름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싸웁니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내어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세상 가운데서 애지중지했던 세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를 회개하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그러나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잘라내는 작업은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힘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이스마엘을 데리고 나가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5:24).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살 길과 거처도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의 결혼문제까지 해결해 주시고 그로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갈의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정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 이스마엘 문제를 선하게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게 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자기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영원한 역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가 심은 에셀나무와 같이 영존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습니다.
저희들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속에 있는 정과 욕심, 인본주의, 물질주의, 교만, 불신, 미움, 무정한 마음 등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여러분들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웃는 최후의 승리자들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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