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gen12(18,19장)/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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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 창세기 제 12 강
말씀 / 창세기 18-19장
요절 / 창세기 19:29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며 훈련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동역자요 친구로 까지 자라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사장으로서 중보하는 역할이 나타나 있습니다. 전에는 군사와 무기로 조카 롯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그의 영적 무기라 할 수 있는 중보 기도로 롯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구원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섬김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18:1-15).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람 셋 중에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였습니다(19:1).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습니다. 그는 정중하고 겸손하게 손님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4,5).” 그는 손님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물을 조금, 떡을 조금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손님들 편에서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온 손님들을 기쁘게 해서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허락하자 아브라함의 행동이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여보 사라! 아 글쎄, 손님들이 우리 집에 찾아 오셨어. 빨리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해서 시루떡을 만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하인들에게 기름지고 토실토실한 송아지를 잡아다가 즉석 바비큐 요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웨이터와 같이 나무 아래 모셔 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동시에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히13:12절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큼 하나님과도 가까워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지극한 감사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근사한 대접을 받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장막에 있다고 하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며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2).” 사라는 이제까지 아이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께 대하여 서운하고 슬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아이를 낳을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사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니 조소 섞인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의 꼬투리가 끊어졌으니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주님을 섬기되 음식이나 다른 것으로는 열심히 섬기겠지만 자녀에 대한 기대는 버린 지 오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은 감사하고, 그래서 물질로 주님 역사를 섬기고, 환경을 예비하는 것은 하겠는데 제자 양성하는 것은 못 해요” “이 나이에 제가 무슨 양들을 돕겠습니까?” “요즘 어쩌다가 캠퍼스에 올라가 봐도 소원 있는 양들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시작하시고 이루심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의를 눈꼽만큼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우리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라의 반복된 거짓말을 감당해 주시면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13-15). 우리의 믿음과 의에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좌지우지 된다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친히 자기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16-20).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섬기되 끝까지 섬겼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면 롯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선을 베푸는 과정에서 롯의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친구요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친구 관계는 가장 깊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요15:15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가 주님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냥 선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고, 가능성이 끊어져 보이는 그 순간에도 능력의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코드가 맞아야만 함께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8, 1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가나안으로 인도해 오셨지만 최종목적은 그가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목적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와 공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고자 하심입니다. 그의 후손들로 인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복주시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복을 받고자 하지 하나님과 동역하고자 하는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과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 편에 서서 일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그의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중보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21-3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하나님께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보고 알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 두 천사는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까이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롯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대신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3-25).”라며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다시 생각해 보니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룁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용기를 내어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오인씩 줄였는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구합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좋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또 아뢰었습니다.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또 아뢰었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마음이나 아브라함의 마음이나 어찌하든지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해 보고자 하시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이 대화를 들을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너무 비참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롯이 비록 조카이지만 그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가차없이 떠나버렸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입니다. 잘 해줘봐야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잘 것 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중보 기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미움받으면 갈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붙잡고, 수치를 각오하는 모험을 시작합니다. 사랑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 부모가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양을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 보지 못한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아내를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 보지 못한 남편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습니다. 내가 한 것은 배신과 죄를 짓는 것뿐인데도 예수님은 나를 잊지 못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이것을 감당하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이 고난의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하나님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자기의 가슴에 창을 찌르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이 이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의 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까지도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서 또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50에서 45-40-30-20-10으로 깎아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이 있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며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분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주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양들이 먼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끈질기게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결과 롯은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19:1-38).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며 초청하였습니다.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러나 그들은 거리에서 노숙하리라고 말합니다. 롯이 간청하자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도 손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었는데 무교병을 내놓았습니다. 무교병은 쉽게 말하면 개떡입니다. 롯은 소돔시의 재판관이요 유지로서 돈도 많았을 텐데 그가 차린 식탁은 사막과 같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내면이 메말라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눕기 전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불렀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롯의 집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 든 것입니까? 멀리서 온 손님을 환영하러 온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좀 보고자, 사인을 받으러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have sex with them’으로서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무론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 쌓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당시에 소돔 사람들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누구하고나 서로 성관계를 맺는, 음란이 아주 보편화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더 큰소리를 치고 롯에게 윽박을 질렀습니다. 이때 롯은 소돔사람들에게 사정사정 하였습니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롯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어찌하든지 보호하고자, 자신의 결혼하지 않은 딸들을 내어 놓겠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죄의 욕망으로 가득 찬 그들은 이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롯에게 욕을 하며 달려들었습니다. “이놈이 어디서 굴러 들어와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느냐,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그들은 롯을 밀치며 문을 깨부수고자, 맹렬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이상을 볼 때에 소돔 땅은 음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의 소굴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천사들이 문을 닫고 무리들의 눈을 가리워 버리자, 그들이 허둥지둥 서로 박치기를 하며, 서로 싸우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돔의 실상을 직접 목도하게 된 천사들은 어떤 조치를 내리게 되었습니까? 다같이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우리가 이곳을 멸하리라” 천사들은 죄로 가득한 소돔 땅을 더 이상 지켜 볼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고, 이곳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에게만은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천사들은 소돔 땅을 철저히 심판하겠지만, 롯의 가족들만은 구원해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의 사위들은 껌을 짝짝 씹으면서 롯에게 반문하였습니다. “오우, 장인어른, 지금 우리와 농담 하시는 거예요?” 롯의 사위들은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도 두려워하기보다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들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롯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은 신앙인으로서 전혀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믿음이 없이 행했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15).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습니다. 롯은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성을 당장 떠나지 못하고 지체했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을 성 밖에 두고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롯의 말이 무엇입니까?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19). 롯은 즉각 순종하기보다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참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들이 작은 성 소알로 들어가기까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허락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유황과 불로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습니다. 이는 장차 임할 불심판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심판 중에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응답된 증거입니다.
30-38절은 읽기도 부끄러운 롯의 심판 후 행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의 큰 딸로 인해서 모압 족속, 작은 딸로 인해서 암몬 족속이 생겨났습니다. 롯의 마지막이 비참하였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삶이 어떠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사명의 땅에 머문 아브라함과 롯의 삶이 대조적임을 보게 됩니다. 롯의 몰락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그가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부터 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풍요로웠습니다. 그가 더 좋은 곳을 찾아 아브라함을 떠난 이후부터 그의 인생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인간으로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롯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감나게 해 줍니다. 롯의 삶은 이후에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빛을 내고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보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받아 후손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키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18-19장
요절 / 창세기 19:29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언약의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며 훈련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동역자요 친구로 까지 자라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사장으로서 중보하는 역할이 나타나 있습니다. 전에는 군사와 무기로 조카 롯을 구했다면 이번에는 그의 영적 무기라 할 수 있는 중보 기도로 롯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구원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섬김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18:1-15).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람 셋 중에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였습니다(19:1).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습니다. 그는 정중하고 겸손하게 손님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4,5).” 그는 손님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물을 조금, 떡을 조금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손님들 편에서 배려를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온 손님들을 기쁘게 해서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허락하자 아브라함의 행동이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여보 사라! 아 글쎄, 손님들이 우리 집에 찾아 오셨어. 빨리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해서 시루떡을 만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하인들에게 기름지고 토실토실한 송아지를 잡아다가 즉석 바비큐 요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웨이터와 같이 나무 아래 모셔 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동시에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히13:12절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큼 하나님과도 가까워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지극한 감사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근사한 대접을 받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장막에 있다고 하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며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2).” 사라는 이제까지 아이를 주시지 않은 하나님께 대하여 서운하고 슬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아이를 낳을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사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니 조소 섞인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의 꼬투리가 끊어졌으니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주님을 섬기되 음식이나 다른 것으로는 열심히 섬기겠지만 자녀에 대한 기대는 버린 지 오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은 감사하고, 그래서 물질로 주님 역사를 섬기고, 환경을 예비하는 것은 하겠는데 제자 양성하는 것은 못 해요” “이 나이에 제가 무슨 양들을 돕겠습니까?” “요즘 어쩌다가 캠퍼스에 올라가 봐도 소원 있는 양들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시작하시고 이루심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의를 눈꼽만큼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우리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라의 반복된 거짓말을 감당해 주시면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13-15). 우리의 믿음과 의에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좌지우지 된다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친히 자기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16-20).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섬기되 끝까지 섬겼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면 롯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선을 베푸는 과정에서 롯의 생명을 구원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친구요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친구 관계는 가장 깊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요15:15절에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가 주님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냥 선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고, 가능성이 끊어져 보이는 그 순간에도 능력의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믿음의 코드가 맞아야만 함께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8, 1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가나안으로 인도해 오셨지만 최종목적은 그가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목적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와 공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고자 하심입니다. 그의 후손들로 인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복주시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복을 받고자 하지 하나님과 동역하고자 하는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과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 편에 서서 일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그의 동역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중보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21-3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하나님께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보고 알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 두 천사는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까이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롯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대신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3-25).”라며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다시 생각해 보니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룁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용기를 내어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오인씩 줄였는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구합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좋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또 아뢰었습니다.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또 아뢰었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마음이나 아브라함의 마음이나 어찌하든지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해 보고자 하시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이 대화를 들을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너무 비참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롯이 비록 조카이지만 그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가차없이 떠나버렸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입니다. 잘 해줘봐야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잘 것 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 중보 기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미움받으면 갈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붙잡고, 수치를 각오하는 모험을 시작합니다. 사랑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 부모가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양을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 보지 못한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아내를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 보지 못한 남편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습니다. 내가 한 것은 배신과 죄를 짓는 것뿐인데도 예수님은 나를 잊지 못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이것을 감당하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이 고난의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하나님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자기의 가슴에 창을 찌르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이 이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의 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까지도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서 또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50에서 45-40-30-20-10으로 깎아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이 있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며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분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주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끈질김이 필요합니다. 양들이 먼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끈질기게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넷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결과 롯은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19:1-38).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며 초청하였습니다.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러나 그들은 거리에서 노숙하리라고 말합니다. 롯이 간청하자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도 손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었는데 무교병을 내놓았습니다. 무교병은 쉽게 말하면 개떡입니다. 롯은 소돔시의 재판관이요 유지로서 돈도 많았을 텐데 그가 차린 식탁은 사막과 같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내면이 메말라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눕기 전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불렀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롯의 집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 든 것입니까? 멀리서 온 손님을 환영하러 온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좀 보고자, 사인을 받으러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have sex with them’으로서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무론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 쌓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당시에 소돔 사람들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누구하고나 서로 성관계를 맺는, 음란이 아주 보편화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더 큰소리를 치고 롯에게 윽박을 질렀습니다. 이때 롯은 소돔사람들에게 사정사정 하였습니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롯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어찌하든지 보호하고자, 자신의 결혼하지 않은 딸들을 내어 놓겠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죄의 욕망으로 가득 찬 그들은 이제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롯에게 욕을 하며 달려들었습니다. “이놈이 어디서 굴러 들어와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느냐,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그들은 롯을 밀치며 문을 깨부수고자, 맹렬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이상을 볼 때에 소돔 땅은 음란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의 소굴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천사들이 문을 닫고 무리들의 눈을 가리워 버리자, 그들이 허둥지둥 서로 박치기를 하며, 서로 싸우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소돔의 실상을 직접 목도하게 된 천사들은 어떤 조치를 내리게 되었습니까? 다같이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우리가 이곳을 멸하리라” 천사들은 죄로 가득한 소돔 땅을 더 이상 지켜 볼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고, 이곳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에게만은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천사들은 소돔 땅을 철저히 심판하겠지만, 롯의 가족들만은 구원해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의 사위들은 껌을 짝짝 씹으면서 롯에게 반문하였습니다. “오우, 장인어른, 지금 우리와 농담 하시는 거예요?” 롯의 사위들은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도 두려워하기보다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들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롯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은 신앙인으로서 전혀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믿음이 없이 행했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15).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었습니다. 롯은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성을 당장 떠나지 못하고 지체했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을 성 밖에 두고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롯의 말이 무엇입니까?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19). 롯은 즉각 순종하기보다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참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들이 작은 성 소알로 들어가기까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허락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유황과 불로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습니다. 이는 장차 임할 불심판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심판 중에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응답된 증거입니다.
30-38절은 읽기도 부끄러운 롯의 심판 후 행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의 큰 딸로 인해서 모압 족속, 작은 딸로 인해서 암몬 족속이 생겨났습니다. 롯의 마지막이 비참하였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삶이 어떠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사명의 땅에 머문 아브라함과 롯의 삶이 대조적임을 보게 됩니다. 롯의 몰락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그가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부터 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풍요로웠습니다. 그가 더 좋은 곳을 찾아 아브라함을 떠난 이후부터 그의 인생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인간으로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롯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감나게 해 줍니다. 롯의 삶은 이후에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빛을 내고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보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받아 후손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키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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