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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gen9(11:27-13:18)/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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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77회 작성일 05-05-08 07:14

본문

2005년 창세기 제 9 강                                                               
말씀 / 창세기 11:27-13:18
요절 / 창세기 12:2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장은 천지 창조와 원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2장부터 50장까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을 인물별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죄가 땅에 가득하자 노아 때에 이르러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자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교만한 시도를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은 어둡고 우상 숭배로 가득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키우는데 25년이 걸렸습니다. 마치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고 묘목에서 큰 나무로 키우듯이 아브람 한 사람을 오랫동안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50장 중에서, 14장이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어떻게 부르시고, 그는 믿음 출발을 어떻게 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7-12:1). 아브람은 셈의 후손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아브람은 이복 누이 사래와 결혼하였으나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데라와 그의 가족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다가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데라는 이백오 세에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12:1절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람이 살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갈대아 우르 지방으로서, 고대 수메르 문명이 발달한 부유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우상이 3천 개나 범람하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갈대아라는 말 자체가 ‘점성가, 마술사’라는 뜻이고, 우르는 ‘빛, 불’이라는 뜻입니다. 갈대아는 아브람 당시나 후대에도 수많은 점성가들이 있었고, 우상에게 주문을 외우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제사를 지낸 후에는 어김없이 각종 음란한 의식들이 행해졌습니다. 갈대아는 후대에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면서 바벨론으로 명성을 날린 곳입니다.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서도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18:4,5)”고 말씀했습니다. 죄악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아브람이 믿음의 기초를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를 아예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은 과거에서 떠나고 죄악된 본성을 떠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의 쾌락을 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는 회개의 투쟁, 죄에서 떠나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심, 음란, 미움, 교만, 거짓말, 허영, 불신, 분주함 등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고민은 이런 것에서 떠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죽고 떠나면 믿음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한 두 번씩은 떠났습니다. 이제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기 위해서 전정 작업을 하듯이 이리저리 자란 죄의 가지들을 쳐내야 합니다. 타성에 젖은 마음, 형식주의, 율법주의, 적당주의에서 떠나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무엇을 주십니까?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12:2-9). 믿음은 말씀을 받음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은 씨와 같고 생명과 같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싹이 나듯이 우리 마음에 말씀을 심으면 믿음의 싹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아브람의 마음에 심으셨습니까? 다같이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지금 아브람은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족이라 봐야 자신과 아내 둘 뿐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믿음의 길을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람을 기점으로 위대한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한 민족은 어떤 민족입니까? 그것은 단지 인구수가 많은 민족이 아닙니다. 땅덩어리만 큰 민족이 아닙니다. 그 민족은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가장 모범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뜻과 법도를 좇아 사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한 민족의 조상으로서 아브람을 택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 집안에서 목자 한 명만 나와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데, 그 후손들 가운데 모세, 사무엘, 다윗, 다니엘, 베드로,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많이 배출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의 메시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아브람의 혈통 가운데서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을 대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사 대대로 유명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인물로 삼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복의 원천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브람 자신에게는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없이 살아 온 지난 75년의 세월은 빈껍데기, 빈 깡통, 마른 우물과도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샘은 샘인데 물이 하나도 없는,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이는 샘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네게 복을 주어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람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넘치는 복을 주셔서 그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들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메말랐습니다. 사랑과 기쁨도, 말씀도, 은혜도, 다 바닥이 났습니다. 한마디로 복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사랑의 샘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샘, 은혜의 샘, 기쁨의 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복의 근원으로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서 축복의 물줄기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무슨 역량이 있고, 무슨 기발한 재주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2절에서 복의 근원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복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 복의 근원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복을 주셨습니다(갈3:9).
 
  3b절을 보십시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세상에 모든 족속들이 아브람의 복의 샘에서 흘러나온 축복의 물을 마시고 소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로 가득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의 근원들이었습니다. 로마서 3:13-15절에 보면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주는 천덕꾸러기요, 주변에 순진한 사람들까지도 죄를 짓게 하는 죄의 근원, 악의 통로였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악한 문화의 구정물이 내 속에 흘러 들어오니, 자연히 내 안에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을 때에 하늘로부터 성령의 단비가 우리 내면에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가 강물처럼 우리 마음을 적셔서 더러운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주로 더러운 물만 쏟아내던 우리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음담패설 대신에 복음이 터져 나옵니다. 주로 욕하고 원망하고 상처 주는 말만 하던 입에서 위로와 사랑의 말,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힘을 주는 말을 하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믿음은 언제 시작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순간부터 믿음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생겼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자라납니다. 믿음에는 완성품이 없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만큼 자라납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는 만큼 자라납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진짜 믿음이 있고 가짜 믿음이 있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롯은 사람을 좇아갔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슷한데 전혀 다릅니다. 믿음은 위기가 올 때 들통이 납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역경을 극복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위기 앞에서도 그는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사람을 좇아다니는 믿음,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겉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위기에 부딪치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사람을 좇아 믿음 생활을 하면 꼭 얻는 것이 있습니다. 실망과 상처입니다. 사람을 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위기를 느낀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그 복음을 전한 사람을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전1:12,13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보니까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좇아가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좇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는데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하란은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우리가 고속도로를 탈 때 휴게소에 들러서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잠깐 쉬기 위해서 들르지, 살기 위해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데라는 하란이 종착역이 아닌데 여러 가지 주변 환경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고민 끝에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데라는 당시 145세였고, 60년을 그곳에서 더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 생활을 하면서 도중하차하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잠깐 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도중하차는 믿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뒤돌아서도 안 됩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믿음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습니다. 아브람은 비록 아버지를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믿음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키우기 위해 시련을 주셨습니다(12:10-13:4).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여기서 ‘그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지시를 하셨으면 당연히 그 땅은 기름지고, 농사도 잘 되고, 풍년이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날 때에 우리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오는가?” 이런 회의가 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기근이 아브람에게 닥쳐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람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복의 근원, 믿음의 큰 그릇으로 빚으시기 위해서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문제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고 양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아마도 단순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애굽은 부자 나라니까 애굽으로 이민 가서 잠시 기근을 피하자!”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2-15절에 보면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누이로 속였다가, 아내를 바로 왕에게 빼앗기고, 홀아비 신세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래서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아내를 빼앗기는 큰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기근에 양식 좀 얻으려고 했다가 사랑하는 아내까지 빼앗기고 아브람은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차라리 기근에 굶어 죽는 편이 낫지, 사랑하는 마누라를 빼앗겼으니 그 체면과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겠습니까? 그는 여관방에서 베게를 안고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이 못난 자식아, 마누라 하나도 못 지키고 너도 남자냐” 이때 아브람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브람은 그때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기근을 만났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키우시기 위해서 때로 믿음의 시련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가 힘들다고 고난을 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고난이 힘들다고 인간적으로 고난을 피하고자 하면 예기치 못한 더 큰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 믿음이 어린 아브람을 불쌍히 여기사 밤에 바로에게 나타나서 감히 사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물질을 주어서 아브람과 사라를 돌려보내도록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감당해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큰 위기에서 벗어나고, 많은 소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또 느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족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구나”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천하의 바로보다 더 높고 더 강하신 분이로구나” 이것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해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이 사건은 아직 믿음이 어리고 연약했던 아브람의 믿음을 키우는 귀중한 훈련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 시대에 복의 근원으로 쓰시고자 하실 때에 반드시 훈련을 주시고, 연단을 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쉽게 고난을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감당하여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롯의 선택과 아브람의 선택(13:5-18)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하사 양과 소가 넘쳐났습니다.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축복을 받게 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목자들끼리 좋은 목초지를 얻고자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아브람은 롯을 불러서 그들이 한 골육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 서로가 더 중요하지, 재산이나 가축이 더 중요하냐?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있는 하나의 신앙공동체이다” “그러니 서로 싸우지 말자. 다투지 말자” 이런 뜻이 숨어 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동역자를 귀하게 여기는 분명한 영적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어떤 이유에서 건에 한 골육이요, 신앙의 동역자인 롯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잘 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먼저 양보를 하고자 했습니다. 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큰아버지로서 권위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존심을 꺾기로 결정하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빰 맞고 비난 듣고 사람들의 채찍을 맞고 침 뱉음을 당했는데 실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아무 잘못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된 우리를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에 그런 고난을 쉽게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롯을 귀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실리를 양보하고 먼저 선택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브람과 대조적으로 롯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은 현실적인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다가 결국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물질을 택하면 소돔까지 갑니다. 처음부터 그곳까지 갈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곳까지 가고 맙니다. 그는 소돔 사람들이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롯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소돔 사람들이 얼마나 악했는지, 영적으로 얼마나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그래서 자신이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믿음이 약해지고, 그 마음이 병들 수 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은 자신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고, 자신의 재산이 다 불에 타서 없어지고, 남는 것은 죄의 열매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는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롯에 비해서 아브람은 어떤 선택을 하였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머물렀습니다. 그 땅은 사실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했다고 했습니다. 헤브론 땅은 메마른 땅입니다. 한동안 그의 마음은 허탈하고 롯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 때문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축복하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포기했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때 우리는 한 차원 높은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14,1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셔서 말씀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롯은 눈을 들어 물이 많고, 땅이 기름진 동쪽 지방 요단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동쪽 땅 정도가 아니라, 서쪽, 남쪽, 북쪽까지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땅을 다 아브람과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종과 횡으로 행하려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고독하고 외롭고 성취감이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상황이 변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단을 쌓습니다.
 
  우리 안에는 다 롯의 요소와 아브람의 요소가 모두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브람이 됐다가, 어떤 때는 롯이 됩니다. 말씀에 은혜 받고 소감 쓰고 나면 아브람이 됐다가,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금방 롯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좀 손해를 보고, 자존심을 내려놓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아브람처럼 영적인 선택을 하므로 장차 넘치는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상대적인 시대 가운데 아브람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복의 근원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감사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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