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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gen8(8:1-11:9)/ 노아와 맺은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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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433회 작성일 05-05-01 08:48

본문

2005년 창세기 제 8 강                                                       
창세기 8:1-11:9
요  절 9:11

노아와 맺은 언약
“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께서  의인 노아를 홍수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심을 보았습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비가 올 때마다 두려워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빨주노초파남보 아름다운 무지개로 언약을 삼으셔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지키심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언약의 말씀을 깊이 영접함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기를 기도합니다.

Ⅰ. 홍수 후의 회복(8:1-22)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셨습니다. 권념하셨다는 말은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방주 속에서 일 년을 지내면서 매우 바쁜 하루 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동물들의 먹이 주는 일과 분뇨를 처리하는 일, 청소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주 속에서의 삶은 심판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를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방주 속에서 영적인 성숙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들은 방주 속에서 오래 도록 지내면서 심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물이 창일할 뿐 아니라 처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어느 정도 처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당한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방주에 있는 자들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셨습니다. 바람이 불어 남극과 북극의 물은 빙하로 만드시고, 높은 산 위에 있는 물들은 만년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에 있는 물들을 말리시며 땅 속으로 스며들게 하시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가는 침식 작용을 통해서 물이 땅 위에서 사라지게 하셨습니다(시104:8).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오십 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습니다.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어 지면에 물이 걷힌 여부를 확인하였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에 홍수가 시작되었는데 육백일년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마른 것을 볼 때 1년하고도 십일 동안을 방주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방주에 있는 모든 생물들도 이끌어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홍수 후에 세상은 황량했을 것입니다. 물이 빠져 나간 골짜기는 바위와 흙으로 뒤엉켰을 것입니다. 들판도 쌓인 진흙으로 농사를 짓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지역은 각종 동물과 사람의 시체들로 썩어가서 역겨웠을 것입니다. 자기 가족 밖에 남겨 두지 않고 철저하게 심판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이런 참혹한 심판 가운데서 살아남은 것도 한편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습니다(20). 제사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이후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복 받는 최대의 비결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바쁘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핑계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는 결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돈 버는 것을 바쁘다며 마다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쁘다고 시험을 포기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공부도, 사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첫 날을 예배로 시작합니다. 물질도 첫 월급은 주님께 드립니다. 또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며 새벽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와 가정에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린 노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고 그 중심에 새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한다고 인간의 죄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서 그 다스림을 받는 생물들을 전과 같이 멸하지 않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즉 홍수로 말미암아 파괴된 자연의 질서가 다시 회복될 것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계절의 주기, 낮과 밤의 주기, 추수의 주기 등이 다 회복되어서 끝없이 돌아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고장 난 기계가 작동이 멈추었다가 다시 가동을 시작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본래 완벽하게 돌아가던 이 세상은 홍수심판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연의 질서가 일시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빠지고, 하나님의 화가 풀리면서 다시 세상은 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9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셨던 복을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노아는 명실공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주인공이요, 새 역사에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120년이라는 세월동안 우직하게 방주를 짓고, 1년 동안 고생스럽게 방주생활을 감당하고, 또 방주에서 나와서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하는 삶을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새로운 세계의 청지기이자 관리자로 임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새 역사가 시작되는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노아는 황폐된 세상을 보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집을 어디에 지어야 할지, 농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장밋빛을 가진 황홀한 곳이 아닙니다. 현실을 알면 알수록, 세상을 알면 알수록 현실과 세상은 참혹한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노아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고 두려움 많은 노아에게 생육하는 복, 번성하는 복, 충만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단백을 섭취해야 했습니다. 또 당장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기를 주셨지만 생명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짐승을 죽여 피를 먹는 것은 너무 잔혹한 짓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도록 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짐승이나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도록 하셨습니다.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사람의 피를 흘리면 인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사형제도는 잘 쓰면 죄를 억제하는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오늘말씀에 보면 ‘언약’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9,11,12,13,15,16,17).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먼저 내건 약속이기 때문에 결코 번복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구체화하시기 위해서 증거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우리는 아직도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끼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면 큰 비가 오지 않을까? 대 홍수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무지개가 어디에 있습니까? 14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구름’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죄가 남아있는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셔야 하지만, 구름 속에서 무지개를 내 보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만히 생각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든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무섭게 몰아치던 빗속을 뚫고 그처럼 아름다운 일곱 색깔 무지개가 뜰 수 있다니!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이처럼 죄로 더러워진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참으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계속해서 억수같은 비를 쏟아 부어서 다 물 먹여 죽여 버려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참으시고 진노를 누그러뜨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사이로 피어나는 ‘무지개’는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관용의 미소인 것입니다. 무지개를 보십시오. 웃는 사람의 눈썹처럼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이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걸쳐서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인생들의 화해의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죄로 가득 찬 우리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실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죄의 장벽이 높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의 무지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 인생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의 자비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희를 받아 주리라” 우리가 무엇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의로운 행위의 탑을 쌓은들 가능하겠습니까? 많은 업적과 공적의 사다리를 놓은들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길게 걸쳐 놓으신 무지개의 구름다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노아시대에 무지개 언약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인생들을 향한 당신의 진노를 예수님의 십자가에다가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 위에 우뚝 세워 두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지개처럼 아름답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잔인하고 무섭고 처절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고 우리의 추한 죄를 씻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의 표시요, 화평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시대에 하나님의 무지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광채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하나님의 화해의 구름다리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리삼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시이자, 언약의 증거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Ⅱ. 구원 그 이후(9:18-1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였습니다. 함은 검다는 뜻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황량한 대지를 갈아엎어 밭을 일구고, 포도나무를 심고, 재건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황량한 땅에는 어느덧 숲도 우거지고, 나무들은 주렁주렁 열매를 맺히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풍요의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때 노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다같이 21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술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노아가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벌거벗은 모습으로 장막 안에서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에 보면 하체가 보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좀 도가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술취함과 방탕의 죄였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보다’의 히브리 원어 '라아'(האר)는 ‘즐거이 보다’ ‘유심히 살펴보다’라는 뜻입니다. 즉 함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세히, 유심히 즐기며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하다’의 히브리 원어 ‘나가드’(דגנ)는 ‘고발하다’ ‘누설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에 함은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유심히 보고 즐기고 나서는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고 비난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함과 맞장구를 치며 아버지의 흉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마음 아파하고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질을 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 이 아들들의 차이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함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물론 잘못은 아버지가 했지만 그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문제를 남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들의 수치로 생각하고, 아버지의 실수를 자신들의 실수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누가 볼새라 얼른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주고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에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셈의 후손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왔습니다. 또한 인류의 메시야 예수님도 셈의 후손가운데 탄생하셨습니다. 야벳도 그 민족이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에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허물이 있더라도 덮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 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효는 모든 도덕의 기초입니다.  또한 남의 허물을 보고 즐기고 드러내서 함부로 폭로하고 비난하는 것이 결코 좋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함과 같이 남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고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묘한 악취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자신이 우쭐해지고 상대적으로 우월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잠언 17:9절에 보면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전서 4:8절에서도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허물과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드러내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허물을 당신의 십자가로 덮어주시고, 그 십자가 보혈로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저희들도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볼 때에 드러내서 비판하고 비난하고 즐기는 자가 되지 아니하고, 함께 가슴 아파하고, 같이 감당하며, 함께 기도해주는 사랑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홍수 후에 열국 백성들이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인데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었습니다. 10:9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은 ‘우리는 반역하리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앞이란 뜻은 여호와를 대적해서라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요 특이한 인간 사냥꾼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잔인무도한 자였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영웅이었습니다.

  11장 전반부 말씀은 유명한 바벨탑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온 인류는 본래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단일 언어의 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방으로 옮겨 시날 평지에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하나의 놀라운 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벽돌 제조법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벽돌을 만드는 발명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그들은 이것으로 높은 탑을 세워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심히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양을 치고, 봉사하는 동기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지만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교만한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도록 언어를 혼잡케 하여 흩어 버리셨습니다. 벽돌을 달라는데 망치를 주고, 올라가라고 하는데 내려가고. 그래서 서로 싸우고 죽도 밥도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여 교만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해서 멸해야 마땅한 인간들의 교만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세우신 대로 언어를 혼잡케 하여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자 각 나라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방언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듣고 각자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심을 배웠습니다. 무지개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언약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고 끝까지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구원 받은 이후에, 복을 받은 이후에 깨어서 영적 투쟁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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