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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gen6(4:16-5:32)/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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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36회 작성일 05-04-1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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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6 강                                                                492
말씀 / 창세기 4:16-5:32
요절 / 창세기 4:26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가인의 죄와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인의 후손들이 어떻게 타락해 갔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손들을 세워 가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두운 가운데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는 영적인 자손들을 키워가기를 기도합니다.

Ⅰ. 가인의 자손들(16-24)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쫓겨나기에 앞서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자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사는 법을 만들어갔습니다. 그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했는데 놋이란 ‘방랑하다, 유리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방랑하는 삶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없습니다.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런 삶은 소속감도 없고 안정도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해집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안식할 수 있지만 가출하면 그때부터 고통입니다. 마치 그것은 돌아갈 집도 없이 계속해서 경찰에게 쫓기며 숨어 살아야 하는 도망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모습입니다.

  이전에 가인은 잘못된 제사를 드려서 꾸중을 듣고 야단을 맞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즉 그는 관계의 줄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이 계속되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그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도시를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성을 쌓음으로 인류 최초로 성 쌓는 기술을 개발한 자요 도시를 건설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을 쌓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막대한 노동이 필요하고 자금도 필요합니다. 즉 사람과 재물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충청도 들판에 행정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데 여러 장애물에 부딪혀서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성을 쌓고 도시를 세웠습니다. 이로 볼 때 그는 성을 쌓을 만큼 큰 권세와 재물을 가진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을 떠났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지성과 창조성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업적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낙원을 만드셨는데 가인의 후예들은 도시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도시 생활은 이웃 집과도 교제가 별로 없습니다. 담을 쌓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을 쌓고 살게 되자 이웃들과도 담을 쌓고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성을 쌓았지만 그 성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도시 문화는 개방성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상당히 폐쇄적입니다. 다 유리로 만들었는데 다가가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자기 만의 영역을 쌓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담을 쌓고 자기가 그 안에 갇혀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낍니다.  서구의 노인들은 아파트에서 혼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도 옆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쌓인 담을 헐고, 사람들 사이에 생긴 담을 헐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요즈음 집집마다 담을 허는 일을 하여 이웃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가인의 후손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담의 칠대손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부일처제를 만드신 것을 깨뜨린 것입니다. 결혼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과 욕망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이름도 매우 쾌락적입니다. 아다는 “장식품, 아름다운”이란 뜻이고 씰라는 보통 “그림자”라고 하고, 또 다른 뜻은 “딸랑딸랑 울리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두 여성의 특성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한마디로 라멕은 육욕에 굴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라멕의 아내 아다는 야발을 낳았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대장장이로서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였습니다. 그는 동철로 제련하는 법을 발견하여 동과 철로 낫도 만들고, 괭이도 만들고 화살도 만들고 창과 칼도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농업이나 전쟁 산업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최첨단의 기술은 전쟁으로 인해서 발달되고 있습니다.
  또 음악이 발달했습니다. 그들은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고 창작을 하고 예술을 발달시켰습니다. 오늘날 유행가의 수명은 아주 짧습니다. 하나님없이 사는 사람들이 슬픔을 달래고,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자, 괴로운 인생을 극복해 보고자 음악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우물과 같아서 새롭게 새롭게 만들지 않으면 식상해버립니다. 그래서 유행이 생깁니다. 상업적인 목적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만족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마셔도 마셔도, 듣고 또 들어도 보고 또 보아도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은 에덴의 대용품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 대용품으로 돈이나 권력을 찾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떠나 문명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바벨탑으로 이어지고 또 현대 문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현대 문명의 밝음 이면에 있는 어두움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터넷의 엄청난 발달은 동시에 음란, 폭력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자살, 살인 청부 사이트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며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는 겉으로는 화려한 문명 속에서 행복하게 살 것 같지만 그 파괴성과 잔인성으로 인해서 소망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길가다가 실수로 부딪쳐 팔에 좀 상처가 났다고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철모르는 어린 아이가 그를 보고 ‘저 아저씨 원숭이처럼 생겼네’라는 말을 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고 그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아내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는 살인을 하고 “칼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감정이 상했다고 사람을 죽여 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용맹과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칠 배의 벌을 내린다고 하셨는데 자신을 죽이는 자에게는 칠십칠 배의 벌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자기 앞에서 꼼짝 못하는 무능한 분이라고 모독하는 말입니다. 그는 양심도 마비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힘없는 자들은 짓밟히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스빈다.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전쟁을 하고 사람을 많이 죽인 자를 영웅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자랑을 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처럼 죄의식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사회는 가인의 후손들에게 이르러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라멕 이후의 가인의 후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후손들은 라멕과 같은 삶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록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힘으로 남을 정복하고 약탈했을 것이며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노예로 부렸을 것입니다. 또한 술을 마시고 악기를 쾌락을 위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방탕한 삶으로 인한 질병과 정신병자, 귀신들린 자들인 난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암담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자는 이런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이 되어서 더 이상 그들에 대해서 쓸 수도 없었습니다.

Ⅱ. 셋의 후예(4:25-5:32)

  아담은 다시 아내와 동침했는데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함이었습니다. 셋은 ‘대신 눔’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셋을 130세에 얻었습니다. 그리고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의 후손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을 정기적으로 예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이 살인자였다고 해서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도 살인자였습니다. 다윗도 살인자였습니다. 바울도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깊이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정직하게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은 자신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대하게 쓰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벨이 죽고 의의 역사가 실패한 것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믿음의 계보를 이루셨습니다. 셋은 아담의 장자의 축복을 받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 중에 구주가 탄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를 끊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줄기차게 이 역사를 이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낙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믿음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보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셋의 후손들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고 키우십니다.

  5장에서 저자는 아담 자손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는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가운데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 입니다. 그가 죽는 날 심판이 옵니다. 노아 홍수가 시작될 때 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 가운데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아담의 칠대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하다는 말은 서로에 맞대어 걷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께 맞추어서 걸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물어보고 의논하고 지시하는 대로 산 것을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혼자서 결정하여 타락하고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였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키웠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심판을 증거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악한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녹만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히11: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의 특징은 그가 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고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것이고 들은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말씀하셨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내 의견, 내 결정, 내 계획, 내 야망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에녹의 이런 삶은 악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이는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를 취하심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취하심을 입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산채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죽는다는 것은 허무한데 에녹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라멕은 일백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가인의 자손 라멕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노아라는 뜻은 안위, 휴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은 땅에서 수고로이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힘든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의인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노아의 때에 일어난 홍수 심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는 후손들을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장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손들은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줄기차게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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