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창5강(4:1-15)/ 살인자 가인과 하나님의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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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5 강 405
말씀/ 창세기 4:1-15
요절/ 창세기 4:15
살인자 가인과 하나님의 표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아담의 원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의 죄가 인간 사회에 얼마나 급속도로 심화되고 퍼져 나가는가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암살범이고 최초의 형제 살해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증하기 짝이 없는 책임 회피를 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한 깊은 단절과 분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인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코자 하십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에 대한 연장과 표를 주심으로 증거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가인이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돌이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얻음’이란 뜻입니다. 하와는 죽음과 같은 해산의 고통이 있었지만 탄생한 아이를 볼 때 그에 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와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열심히 일한 결과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가인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햅쌀, 조, 수수, 감, 밤, 사과 등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벨은 목동이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산채로 제사할 수 없었으므로 첫 새끼들을 가져오되 이미 각을 뜨고 내장의 기름들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4b,5a).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할 때 하나님이 합당히 여기시는 방식으로 제사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 아들이 있는데 부모님 생신 때마다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고, 수 십 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만 택배로 보낸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모는 그런 아들보다도, 선물이 많지 않을지라도 직접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부도 묻고, 팔다리도 주물러 드리는 그런 자녀의 정성을 훨씬 더 기뻐할 것입니다. 성경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히11: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시 66: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상한 심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그 예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는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일과 그들이 추방당한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부모와 자기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는 죄인으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 하나님 앞에 깨어진 심령으로, 회개하는 자세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양의 피를 흘려 드린 아벨의 제사는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짐승으로 제사하지 않고 곡식으로 제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죄악과 그의 악한 마음 때문에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외모를 보시고 차별하심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과 마음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으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벌써 많은 악을 행하였고 그의 마음이 악하여 바르게 제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죄인이라는 자각도 없었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회개의 심령도 없고, 죄사함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도 없이 의인의 심정으로 드렸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준다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의가 충만했습니다. 진짜 죄인의 심령이 있으며 하나님이 안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자 하나님께 핏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형식과 체면과 타성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되어 하는 것은 모두가 제사입니다. 회개, 기도, 찬양, 헌금, 봉사, 양치는 것, 등등.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그것들이 정말로 하나님이 받으심직한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드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기 의를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과 상한 심령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했으면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기쁩니다. 사람의 질책을 받아도 기쁘고 가슴이 벅찹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드리면 가슴이 뜨겁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자체로 기쁩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회개의 역사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아니하심으로 정말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받아주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변화없이 살다가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심으로 그가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정말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때 가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b).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얼굴 전체가 벌겋게 변하고 시커멓게 변하여 일그러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으심으로 자기가 버림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해서 아벨 때문에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아벨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그는 괜히 아벨로 인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발견하고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고 동생 탓으로 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지 않고 하와에게 돌린 것처럼 그 아들 가인도 동생 아벨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벨이 없으면 하나님이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드린 것을 하나님이 받으셔야 마땅하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의 시기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기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시기심을 발동시킵니다. 시기심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죄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막내 요셉을 사랑함으로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창37:11).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젊은 다윗에게는 팬레터가 만 통이나 오는데, 자신에게는 천 통 밖에 오지 않는 사실을 사울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사울은 심히 노하여 그때부터 모든 국사를 제쳐두고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곤두 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사울의 창끝은 결국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불행을 자초하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시기심과 미움의 죄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마27:18). 그러므로 저희들이 우리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비교의식과 경쟁심, 시기심의 죄를 빨리 회개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을 꺾고, 상대방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낮아져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서 그러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옳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호랑이 같이 담대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가 기회를 봐서 덮칠 것입니다.
하나님께 분을 내던 가인은 어떤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동생을 들로 불러내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계획적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자 죄가 그를 덮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르는 말씀을 듣지 않을 때 그는 마음이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는 아벨을 죽임으로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이미 범죄한 가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네가 죄 없는 아벨을 돌로 쳐 죽였으니 너도 돌에 맞아 죽어라”하면서 돌로 내리쳐 죽이셨습니까?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 하나님은 “네가 네 동생을 죽였지”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심으로 그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범죄자의 인격과 체면이 보전되어 자기 스스로 죄를 고백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또한 이 물음은 형제가 형제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자기의 생존만이 아니라 형제의 생존도 이웃이 보살피고 돌보아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도록 도우신 것이라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이웃을 사랑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사회에서 미움과 시기와 전쟁을 그치는 길은 사랑의 길뿐입니다. 그 사랑은 미움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미움을 제거하고 사랑하는 길은 반역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바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차별적인 살인 행각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피해의식으로 인해서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살인하고 있는 현실이 무섭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회 문제 앞에서 우리가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힘없고 무시 받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캠퍼스에서 하나님이 없이 살고 있는 학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인은 뻔뻔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난 몰라요, 내가 뭐 동생을 지키는 경호원입니까?”반발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끝까지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괴로워하기보다 더 완악해졌습니다. 죄를 짓고 아담이 보였던 두려움은 그에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준엄하게 그의 죄를 추궁하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를 볼 때에 가인은 아무도 모르게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땅은 그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받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꾼으로서 아무리 일을 해도 땅이 풍성한 열매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방랑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쉼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벨을 생각할 때에 힘든 생각이 듭니다. 왜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 된 제사를 드리고도 죽어야만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아벨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히브리서 12:24절에 보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피와 아벨의 피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즉 아벨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피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눅23:34).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헛되지 않았듯이, 아벨의 피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저가 육신은 비록 죽었으나 그 영혼은 살아서 믿음으로써 영원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벌을 받게 된 가인은 그때서야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나서야 죄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살인죄가 크지만 하나님의 벌이 더 크다고 여긴 것입니다. 살인하였으니 그도 살해되거나 죽어야 마땅하지만 살려두셨는데 자기의 벌이 자기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고 그의 죽음을 유예했는데도 하나님의 벌이 자기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살 수 밖에 없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늘 쫓겨다니며 사는 것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양심은 한 번도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 누가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과 좌절을 당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가 밝혀져서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경우들을 만날 때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떨리며 식은 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잘 될 것 같은데 사실은 모든 것이 황폐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인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가 죄인이지만 생명을 보존해 주시는 사랑의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가인의 생명을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이 받은 표는 십자가의 예표였습니다. 아벨의 희생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가인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이 회개할 때까지 아벨과 같은 의인들을 희생시키면서도 속히 심판하지 아니하십니다. 악인들을 당장 멸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십니다. 완악한 가인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이 죄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건으로, 인격적으로 도우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살인자일지라도 사랑하시고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살인의 뿌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성경은 내 속에 있는 형제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 등을 살인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끊임없이 갈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등감과 피해의식, 미움과 교만과 자기 의는 나를 삼키는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회개치 아니하면 사단에게 잡혀 버립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합시다. 또한 우리의 이웃들을 힘써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예배가 되도록 평소 우리의 삶을 산제사로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창세기 4:1-15
요절/ 창세기 4:15
살인자 가인과 하나님의 표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아담의 원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의 죄가 인간 사회에 얼마나 급속도로 심화되고 퍼져 나가는가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암살범이고 최초의 형제 살해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증하기 짝이 없는 책임 회피를 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한 깊은 단절과 분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인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코자 하십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에 대한 연장과 표를 주심으로 증거됩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가인이 어떻게 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돌이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얻음’이란 뜻입니다. 하와는 죽음과 같은 해산의 고통이 있었지만 탄생한 아이를 볼 때 그에 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와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열심히 일한 결과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가인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햅쌀, 조, 수수, 감, 밤, 사과 등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아벨은 목동이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산채로 제사할 수 없었으므로 첫 새끼들을 가져오되 이미 각을 뜨고 내장의 기름들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4b,5a).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할 때 하나님이 합당히 여기시는 방식으로 제사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으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 아들이 있는데 부모님 생신 때마다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고, 수 십 만원짜리 백화점 상품권만 택배로 보낸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모는 그런 아들보다도, 선물이 많지 않을지라도 직접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부도 묻고, 팔다리도 주물러 드리는 그런 자녀의 정성을 훨씬 더 기뻐할 것입니다. 성경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히11: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시 66: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상한 심령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그 예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는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일과 그들이 추방당한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부모와 자기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는 죄인으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 하나님 앞에 깨어진 심령으로, 회개하는 자세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양의 피를 흘려 드린 아벨의 제사는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짐승으로 제사하지 않고 곡식으로 제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죄악과 그의 악한 마음 때문에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외모를 보시고 차별하심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과 마음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으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벌써 많은 악을 행하였고 그의 마음이 악하여 바르게 제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죄인이라는 자각도 없었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회개의 심령도 없고, 죄사함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도 없이 의인의 심정으로 드렸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준다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 의가 충만했습니다. 진짜 죄인의 심령이 있으며 하나님이 안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자 하나님께 핏대를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형식과 체면과 타성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되어 하는 것은 모두가 제사입니다. 회개, 기도, 찬양, 헌금, 봉사, 양치는 것, 등등.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그것들이 정말로 하나님이 받으심직한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드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기 의를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과 상한 심령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했으면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기쁩니다. 사람의 질책을 받아도 기쁘고 가슴이 벅찹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드리면 가슴이 뜨겁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자체로 기쁩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회개의 역사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아니하심으로 정말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받아주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변화없이 살다가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심으로 그가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정말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때 가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b).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얼굴 전체가 벌겋게 변하고 시커멓게 변하여 일그러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으심으로 자기가 버림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해서 아벨 때문에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아벨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그는 괜히 아벨로 인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악을 발견하고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고 동생 탓으로 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지 않고 하와에게 돌린 것처럼 그 아들 가인도 동생 아벨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벨이 없으면 하나님이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드린 것을 하나님이 받으셔야 마땅하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의 시기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기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시기심을 발동시킵니다. 시기심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죄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막내 요셉을 사랑함으로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창37:11).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젊은 다윗에게는 팬레터가 만 통이나 오는데, 자신에게는 천 통 밖에 오지 않는 사실을 사울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사울은 심히 노하여 그때부터 모든 국사를 제쳐두고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곤두 세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사울의 창끝은 결국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불행을 자초하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시기심과 미움의 죄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마27:18). 그러므로 저희들이 우리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비교의식과 경쟁심, 시기심의 죄를 빨리 회개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을 꺾고, 상대방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낮아져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네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서 그러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옳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호랑이 같이 담대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가 기회를 봐서 덮칠 것입니다.
하나님께 분을 내던 가인은 어떤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동생을 들로 불러내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라 고의적이고 계획적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자 죄가 그를 덮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르는 말씀을 듣지 않을 때 그는 마음이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는 아벨을 죽임으로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이미 범죄한 가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네가 죄 없는 아벨을 돌로 쳐 죽였으니 너도 돌에 맞아 죽어라”하면서 돌로 내리쳐 죽이셨습니까?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 하나님은 “네가 네 동생을 죽였지”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심으로 그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범죄자의 인격과 체면이 보전되어 자기 스스로 죄를 고백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또한 이 물음은 형제가 형제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자기의 생존만이 아니라 형제의 생존도 이웃이 보살피고 돌보아야 함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도록 도우신 것이라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이웃을 사랑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사회에서 미움과 시기와 전쟁을 그치는 길은 사랑의 길뿐입니다. 그 사랑은 미움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미움을 제거하고 사랑하는 길은 반역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바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차별적인 살인 행각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피해의식으로 인해서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살인하고 있는 현실이 무섭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회 문제 앞에서 우리가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힘없고 무시 받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캠퍼스에서 하나님이 없이 살고 있는 학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인은 뻔뻔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난 몰라요, 내가 뭐 동생을 지키는 경호원입니까?”반발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끝까지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괴로워하기보다 더 완악해졌습니다. 죄를 짓고 아담이 보였던 두려움은 그에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준엄하게 그의 죄를 추궁하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를 볼 때에 가인은 아무도 모르게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땅은 그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받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꾼으로서 아무리 일을 해도 땅이 풍성한 열매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방랑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쉼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아벨을 생각할 때에 힘든 생각이 듭니다. 왜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 된 제사를 드리고도 죽어야만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아벨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히브리서 12:24절에 보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피와 아벨의 피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즉 아벨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피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눅23:34).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헛되지 않았듯이, 아벨의 피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저가 육신은 비록 죽었으나 그 영혼은 살아서 믿음으로써 영원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벌을 받게 된 가인은 그때서야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나서야 죄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살인죄가 크지만 하나님의 벌이 더 크다고 여긴 것입니다. 살인하였으니 그도 살해되거나 죽어야 마땅하지만 살려두셨는데 자기의 벌이 자기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고 그의 죽음을 유예했는데도 하나님의 벌이 자기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살 수 밖에 없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늘 쫓겨다니며 사는 것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양심은 한 번도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 누가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과 좌절을 당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가 밝혀져서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경우들을 만날 때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떨리며 식은 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잘 될 것 같은데 사실은 모든 것이 황폐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인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가 죄인이지만 생명을 보존해 주시는 사랑의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가인의 생명을 보장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이 받은 표는 십자가의 예표였습니다. 아벨의 희생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가인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이 회개할 때까지 아벨과 같은 의인들을 희생시키면서도 속히 심판하지 아니하십니다. 악인들을 당장 멸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십니다. 완악한 가인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이 죄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건으로, 인격적으로 도우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살인자일지라도 사랑하시고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살인의 뿌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성경은 내 속에 있는 형제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 등을 살인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끊임없이 갈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등감과 피해의식, 미움과 교만과 자기 의는 나를 삼키는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회개치 아니하면 사단에게 잡혀 버립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합시다. 또한 우리의 이웃들을 힘써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예배가 되도록 평소 우리의 삶을 산제사로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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