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05년 가을 고린도전서 3강
페이지 정보

본문
2005년 가을 고린도전서 제 3강
말씀:고린도전서 2:6-3:4 요절:고린도전서 2:10
성령으로 보이셨으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 신자들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다는 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매우 육신적이며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를 생각할 때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간접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와 다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서 온전한 자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들, 학자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혜를 터득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말한 그들도 사라졌고 또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세상의 지혜도 곧 없어질 지혜요 삶을 근본적으로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 지혜가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삶의 지혜요 생명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 크리스챤이 많습니다. 오늘날도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거의 크리스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지혜는 구원을 얻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영광의 지혜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하나님의 지혜의 특성은 비밀스럽고 감추어져 있으며 영광스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그 오묘하신 경륜 속에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강림하사 인간들에게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오래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므로 확실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영광스런 존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럽게 영생을 누리는 특권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영접하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0a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아무리 아이큐가 높고 지식이 많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상식과 머리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지혜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매우 발달했습니다. 달나라를 탐사하고 우주에 로켓을 쏘아 올립니다. 복제인간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조건과 상태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아무런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만세로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인 사도바울이 그 증인입니다. 그가 성령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혜가 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성령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사울이 죽고 바울이 되었습니다. 오직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 구속역사의 방향등 영적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10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통달하십니다.(通達:막힘이 없이 환히 통하는 것, 사물의 이치에 깊이 통하는 것, search) 여기서 모든 것을 통달 하신다는 것은 우리도 성령을 덧입을 때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 66권의 시작인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말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사건,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등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들을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말씀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 전반에 나타납니다. 구약과 신약에 모두 나타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통찰력으로 왕들을 책망하기도하고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신약에서 성령은 예수님의 사역에, 사도바울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사 역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숨은 죄를 드러내시며 죄를 책망하십니다(요16:8~11).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고(대하36:22),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16:1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이 성령을 덧입을 때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대한 역사와 깊고 넓은 오묘한 역사, 신비한 역사를 성령에 의지하여 통찰하는 능력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체험하고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진 성경말씀을 잘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의해 씌여졌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만이 해석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스트셀러인 고서수준으로 생각하고 몇 번씩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을 쌓고자 하는 목적으로 읽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성경은 고리타분한 이야기책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에 기초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적극적으로 성령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11:13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나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음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그 계시를 깨닫게 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변(分辨)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이 인간적인 사적인 말이 아님을 이야기 합니다. 즉 성령의 가르치신 것만을 말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만일 고린도교인들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사적인 말로 영접한다면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이라는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3:4절까지 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인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육에 속한 사람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영적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오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대한 자랑에만 관심을 둡니다.(요일2:16)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예배, 1;1말씀공부, 소감 쓰는 것, 팀 모임에 참석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TV드라마를 더 좋아하고, 돈 버는데 더 관심을 갖습니다. 친구들과 더 어울리기 원하고, 컴퓨터 게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가리켜 별종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은 똑똑한데 우리는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영적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없기 때문입니다.(사6:9)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은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학생제자양성 역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릴 때 우리는 캠퍼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절대성을 믿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둘째, 신령한 사람
15절을 보십시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다른 말로 영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가 하나님 편에서 정확하게 판단합니다. 모든 가치기준이 영적입니다. 말과 행동도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 아무도 주를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6) 영적인 사람은 분명한 신앙목표가 있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과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영적인 사람은 목자님의 코멘트를 잘 받아들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고 방향에 순종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고 있습니까?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더욱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날마다 투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투쟁을 한 것만큼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가을학기에 우리가 한 단계 성장하도록 모두 영적인 투쟁을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기도 모임을 5시 30분으로 앞당기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입니까? 영적인 해석을 잘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쟁취할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육신에 속한 사람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참으로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하기 싫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사람은 2:14,15말씀과 달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상대적으로 신령한 사람들에 비해 고린도 성도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초보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2절에서 ‘젖’은 은혜와 축복을 ‘밥’은 희생과 헌신을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은혜와 축복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고린도 성도들은 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 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 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성도들은 영적으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주님보다 사람을 더 따릅니다. 자신들이 맘에 드는 사람, 자신이 생각할 때 능력 있는 사람을 믿고 따르는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했다는 증거로 시기와 분쟁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경쟁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라지 않고 사람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시기와 분쟁으로 가득한 고린도교회를.....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받고 실족하였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을 했을까요? 이로 인해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시기와 분쟁은 아담의 범죄이후 타락한 인간사의 주된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오늘날도 한국교회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런 시기와 분쟁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런 조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상대를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 모임이 성장하려면 우리가 더욱 영적인 사람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영적인 질서가 회복되고 순종과 헌신의 모습이 다시 살아나야합니다. 그러 할 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신자는 그 자체가 큰 불행입니다. 우리가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캠퍼스 제자 양성역사를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역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영적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는 더욱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적이 되어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되고 맙니다.
제가 말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영적인 역사에 관심은 있지만 선두에 나서서 제자양성 역사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휘관으로서의 지휘봉을 저에게 주셨지만 저는 그 지휘봉을 놓아두었습니다. 때가 되면 멋지게 지휘하려는 마음만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센타 전반적으로 영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보면서 제자 양성 역사에 회의적인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적으로 판단하는 마음, 미워하는 감정만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어떻게 보면 영적인 수준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성숙한 리더가 없기에 섬기고 가르치고 기도해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센타에서 한 단계 성숙한 시니어 목자로서 거듭나서 모든 동역자들을 품고 기도해 준다면, 전체역사를 성령의 의지하여 리드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도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모임으로 성장시켜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의 안일의 죄와 자기를 사랑하는 죄를 늘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종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저에게 영적인 통찰력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동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더욱 성장해야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현재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를 회개하므로 변화를 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학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복음의 일군들로 가득한 모임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고린도전서 2:6-3:4 요절:고린도전서 2:10
성령으로 보이셨으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 신자들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다는 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매우 육신적이며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를 생각할 때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간접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와 다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서 온전한 자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들, 학자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혜를 터득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말한 그들도 사라졌고 또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세상의 지혜도 곧 없어질 지혜요 삶을 근본적으로 풍요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 지혜가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삶의 지혜요 생명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 크리스챤이 많습니다. 오늘날도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거의 크리스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지혜는 구원을 얻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영광의 지혜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하나님의 지혜의 특성은 비밀스럽고 감추어져 있으며 영광스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그 오묘하신 경륜 속에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강림하사 인간들에게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오래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므로 확실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영광스런 존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럽게 영생을 누리는 특권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영접하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0a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아무리 아이큐가 높고 지식이 많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상식과 머리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지혜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매우 발달했습니다. 달나라를 탐사하고 우주에 로켓을 쏘아 올립니다. 복제인간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조건과 상태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아무런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만세로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인 사도바울이 그 증인입니다. 그가 성령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혜가 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성령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사울이 죽고 바울이 되었습니다. 오직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 구속역사의 방향등 영적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10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통달하십니다.(通達:막힘이 없이 환히 통하는 것, 사물의 이치에 깊이 통하는 것, search) 여기서 모든 것을 통달 하신다는 것은 우리도 성령을 덧입을 때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 66권의 시작인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말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사건,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등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들을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말씀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 전반에 나타납니다. 구약과 신약에 모두 나타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성령의 통찰력으로 왕들을 책망하기도하고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신약에서 성령은 예수님의 사역에, 사도바울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사 역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숨은 죄를 드러내시며 죄를 책망하십니다(요16:8~11).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고(대하36:22),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16:1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이 성령을 덧입을 때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대한 역사와 깊고 넓은 오묘한 역사, 신비한 역사를 성령에 의지하여 통찰하는 능력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체험하고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진 성경말씀을 잘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의해 씌여졌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만이 해석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스트셀러인 고서수준으로 생각하고 몇 번씩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을 쌓고자 하는 목적으로 읽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성경은 고리타분한 이야기책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에 기초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적극적으로 성령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11:13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나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음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그 계시를 깨닫게 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변(分辨)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이 하는 말이 인간적인 사적인 말이 아님을 이야기 합니다. 즉 성령의 가르치신 것만을 말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만일 고린도교인들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사적인 말로 영접한다면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이라는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3:4절까지 에서는 세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인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육에 속한 사람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영적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오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대한 자랑에만 관심을 둡니다.(요일2:16)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예배, 1;1말씀공부, 소감 쓰는 것, 팀 모임에 참석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TV드라마를 더 좋아하고, 돈 버는데 더 관심을 갖습니다. 친구들과 더 어울리기 원하고, 컴퓨터 게임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가리켜 별종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은 똑똑한데 우리는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영적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없기 때문입니다.(사6:9) 우리도 사도바울과 같은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학생제자양성 역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릴 때 우리는 캠퍼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절대성을 믿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둘째, 신령한 사람
15절을 보십시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사람은 다른 말로 영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가 하나님 편에서 정확하게 판단합니다. 모든 가치기준이 영적입니다. 말과 행동도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 아무도 주를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6) 영적인 사람은 분명한 신앙목표가 있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과 복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영적인 사람은 목자님의 코멘트를 잘 받아들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고 방향에 순종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고 있습니까?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더욱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날마다 투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투쟁을 한 것만큼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가을학기에 우리가 한 단계 성장하도록 모두 영적인 투쟁을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기도 모임을 5시 30분으로 앞당기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입니까? 영적인 해석을 잘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을 쟁취할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육신에 속한 사람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참으로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하기 싫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사람은 2:14,15말씀과 달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상대적으로 신령한 사람들에 비해 고린도 성도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초보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2절에서 ‘젖’은 은혜와 축복을 ‘밥’은 희생과 헌신을 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은혜와 축복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고린도 성도들은 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 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 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성도들은 영적으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주님보다 사람을 더 따릅니다. 자신들이 맘에 드는 사람, 자신이 생각할 때 능력 있는 사람을 믿고 따르는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했다는 증거로 시기와 분쟁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경쟁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라지 않고 사람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시기와 분쟁으로 가득한 고린도교회를.....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받고 실족하였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을 했을까요? 이로 인해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시기와 분쟁은 아담의 범죄이후 타락한 인간사의 주된 문제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오늘날도 한국교회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런 시기와 분쟁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런 조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상대를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 모임이 성장하려면 우리가 더욱 영적인 사람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영적인 질서가 회복되고 순종과 헌신의 모습이 다시 살아나야합니다. 그러 할 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신자는 그 자체가 큰 불행입니다. 우리가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캠퍼스 제자 양성역사를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역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영적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는 더욱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적이 되어서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되고 맙니다.
제가 말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영적인 역사에 관심은 있지만 선두에 나서서 제자양성 역사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휘관으로서의 지휘봉을 저에게 주셨지만 저는 그 지휘봉을 놓아두었습니다. 때가 되면 멋지게 지휘하려는 마음만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센타 전반적으로 영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보면서 제자 양성 역사에 회의적인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적으로 판단하는 마음, 미워하는 감정만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어떻게 보면 영적인 수준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성숙한 리더가 없기에 섬기고 가르치고 기도해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센타에서 한 단계 성숙한 시니어 목자로서 거듭나서 모든 동역자들을 품고 기도해 준다면, 전체역사를 성령의 의지하여 리드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도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모임으로 성장시켜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의 안일의 죄와 자기를 사랑하는 죄를 늘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종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저에게 영적인 통찰력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동역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더욱 성장해야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현재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를 회개하므로 변화를 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학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복음의 일군들로 가득한 모임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