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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051cor2(고전1:18-2:5)/ 하나님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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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833회 작성일 05-09-25 08:18

본문

2005년 가을 고린도전서 2 강
말씀 / 고린도전서 1:18 - 2:5
요절 / 고린도전서 2:2

하나님의 지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늘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철학과 수사학 등 세상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십자가의 복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개인 개인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지혜보다 단순하며 소박한 말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임을 믿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복음을 줄인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비참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요17:1).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정치적인 자유와 사회적 정의와 평화, 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 왕조를 재건하지도 않았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명기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을 응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실 수 있는 것은 그의 죽으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메시아적 사건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을 제하시고 마음에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영혼에 쉼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23,24절도 보십시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23,24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야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을 그들의 왕이나 구원자로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고 신성모독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또  십자가의 도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지혜를 추구하고 예술과 학문을 연마하여 세계사에 지식과 학문의 근원이 되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소박한 진리가 그들의 입맛을 돋우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들의 허영을 채우지 못했고 호기심과 변론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교만과 고집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멸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기록된 이사야 29:14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19,20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습니까? 그들이 똑똑하다고 하지만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자라면 하나님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의 지혜와 학식을 자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있는 학문이 기독교의 계시와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승리로 인하여 부끄럽게 되고 무색케 되었습니다. 이방인 정치가와 철학자, 유대인 랍비와 박사들,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이 모두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 합니다”(21절). 세상의 뽐내는 학문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무지가 넘치고 있으며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을 뽐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지성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복음의 비밀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구원의 도를 자기 머리로 깨닫게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더욱 교만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지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명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유토피아를 이 땅에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생각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1,2차 세계 대전과 공산주의의 붕괴와 미국의 화려한 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킵니다. 전도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전도하고 있으면 가끔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봅니다. 그러나 전도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포되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복음서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서도 계속해서 기적을 구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기적을 행해주시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신과 완악함으로 인해서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가장 강력한 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적이요 죽은 자가 부활함으로 인해서 유일한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기 때문이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누구든지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까? 이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조건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교회는 세상 가치관으로 볼 때 똑똑한 사람, 부자들이 별로 없고 가난하고 배경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율법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죄 가운데서 뒹굴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시대를 볼 때 술취함과 음란과 거짓과 부도덕함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자들 가운데 하나로 살다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자들을 택하셨습니까?

  27-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하다고 무시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대부분이 어부였습니다. 그 중에는 매국노라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배운 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촌사람들로서 이방인과 같이 여김을 받던 지방 출신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이요 창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지혜와 지식을 소유한 성경 선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박사들이 놀랐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3,14).”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 진리를 추구하는 열심, 거룩한 삶을 보고 사람들은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30,3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거룩하지 못하나 예수님을 통해서 죄씻음을 받고 거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본래 죄의 종이었으나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2:1-5절에서 자신의 전도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연사나 고매한 철학자인 체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말의 유창함이나 깊은 이성과 특이한 학문과 저술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은 표현과 웅변으로 귀를 매혹시키려고도 하지 않고 고상한 생각으로 그들의 상상을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기술인 언어나 지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학문의 도시인 다소에서 헬라 철학을 배웠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2). 그에게는 정말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하심과 풍성하고 깊은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7-12).”

  우리는 말씀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한 번 메시지를 전하면 3천 명씩 회개하는 능력있는 말씀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3천명이 아니라도 한 사람이라도 말씀 앞에 꺼꾸러지고 회개시킬 수 있는 말씀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을 멋있게 하고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전하고자 철학책을 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할 뿐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목사와 설교’라는 책에서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야 말로 가장 위대한 주제입니다. 서양 속담에 금은 도금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은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도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그 자체를 잘 드러내어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 자체가 가장 권세 있는 메시지요, 웅변이요, 능력입니다. ‘생활의 발견’의 저자 임어당은 ‘나는 왜 크리스챤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유식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목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공부할 때 복잡한 신학 이론이 그의 영적인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그후 30년 동안 기독교를 등지고 인본주의를 신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가서 목사님이 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단순한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의 모든 의심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 자체가 가장 권세 있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말을 조리 있게 잘 못하기 때문에 목자가 될 수 없다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말을 잘 한다고 훌륭한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님과 십자가의 복음만을 확신있게 전하면 됩니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의 강한 우상 문화, 죄의 세력, 핍박에 맞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말도 졸하고, 키도 작고,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건강도 좋지 않았고 볼품도 없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그의 적들은 바울을 경멸했습니다. “저희 말이 그 몸으로 대할 때에는 약하고 그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고후10:10).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인간적인 것들이 없어서 약해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비록 그가 남과 같이 훌륭한 웅변술은 없었더라도 그가 미천한 연사가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를 이방신 허메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그들에게 온 신으로 여겼습니다(행 14:12). 그는 자신의 사역을 위하여 용기나 결단이 부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자처럼 호언하지도 않았고 겸손과 주의 깊게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 부여된 권위와 명예와 허영으로 차 있지도 않았고 일을 잘못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성실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복음 사역자로서 바울이 이렇게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겸손과 염려로 일을 했지만 자신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 진리를 보통 사람들의 말로 평범하게 전했습니다. 성령이 전하는 대로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났고 사람들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면서 성령이 그 진리를 나타내도록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도록 성령의 역사에 맡겼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함으로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5). 즉 세상의 수사학이나 논리가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하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전파될 때에, 구원받고 변화되는 역사는 말씀에 따르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와 역사에 근거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만 나타나시며 영광을 받으시도록 전파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전도하고 말씀을 전해야하겠습니까? 말씀을 깊이 파야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머리를 짜내서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서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심기고 감동 감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되도록 말씀을 드러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알기에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십자가의 도가 우리를 날마다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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