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05년 창세기 2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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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23 강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39-41장
요절 / 창세기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어린 소년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요셉은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요셉은 환경과 여건을 이겨내고 의롭게 살고자 했지만 감옥에 갇히는 더욱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요셉의 삶을 볼 때 애매히 고난 받는 것 같고 또한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자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우리는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또한 배우고자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믿음의 승리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드립니다. 요셉처럼 고난과 연단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구속역사 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Ⅰ. 노예가 된 요셉(39:1~10)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을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집에서 형들이 시기할 만큼 사랑받고 섬김 받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환경이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바뀌게 되면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자포자기하거나 미치거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됩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증오와 복수심을 키우며 탈출을 꿈꾸는 일이거나 아버지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편은 참으로 비참해 보이고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도와 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소부재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하나님은 요셉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요셉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요셉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쓴 뿌리를 품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요셉처럼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런 처지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가 된 기막힌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슬픔에 빠져 있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다만 은혜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시고 소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는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참으로 믿는 사람으로서 복의 근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처지를 원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충성스럽게 자신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복의 근원인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며 또한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자신의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은 보디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였으나 실은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보통의 노예들은 노예근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적당히 눈치껏 요령을 피우고 눈가림만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았습니다.(골 3:23) 이는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며 범사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또한 그 길을 형통하게 열어 주십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분명한 하나님과의 개인 신앙을 갖고 행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충성을 다하여 승리해 가는 요셉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또 다른 사건이 생겼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능력도 있고 영적 권위도 있어 보였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한 그 주인의 처가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유혹이 있었을 때 요셉은 분명하게 거절하며 말하였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39:8,9) 요셉의 이 말 가운데는 그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분별력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분명한 자세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보디발 여사의 날마다 계속되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날마다 계속되면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래 눈 한 번 딱 감고…”라든가, “나는 종에 불과하고 상대는 여주인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내 운명인걸 어떻게 하랴.” 등 등 핑계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뢰해준 주인도 배반하지 않았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이 말은 요셉의 단호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요셉은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불같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요셉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 후서 2:21, 22절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정욕은 불같이 청년을 향하여 유혹의 화살을 날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다윗 같은 위대한 종도 정욕을 피하지 못했을 때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죄로 인하여 왕권이 흔들리고 자식들 간에 죽고 죽이는 큰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정욕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결국 왕국이 분열되는 이스라엘의 비극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정욕을 피해야만 합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119:9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는 과거 정욕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삶에서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로 이제 심령이 깨끗해졌습니다. 과거의 죄는 이미 다 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 받은 후인 현재부터가 문제입니다. 늘 요셉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Ⅱ. 감옥에 갇힌 요셉(39:11~40:23)
요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죄를 범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요셉은 보디발 여사의 집요한 유혹에 단호하게 대처하기 위해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시무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에 아무도 없고 보디발 여사만 있었습니다.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을 강요하는 보디발 여사를 피해 요셉은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갔습니다. 그러자 독이 오를대로 오른 보디발 여사는 자작극을 꾸며 요셉을 모함하였습니다. 정욕적인 사람들의 문제는 정욕의 불길이 지나가면 미움이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범하고 난 후 미워하는 마음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하여 심히 미워하였던 것처럼 보디발 여사도 요셉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자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요셉을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그는 집사람들을 불러 요셉의 옷을 보여주며 요셉이 자기를 겁간코자 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요셉이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보디발에게 요셉의 옷을 증거로 내밀었고 자초지종을 모르는 보디발은 대노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에게 충성되고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요셉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의로운 요셉이 졸지에 강간 미수범이라는 파렴치범의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는데 왜 이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보고만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신건가?” 등등 불신의 말을 쏟아 붓기 쉬웠을 것입니다. 요셉이 처했던 것과 같은 상황과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이 말들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얼마나 자주 했던가 생각해보면 요셉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의 인생은 기구하기만 합니다. 형들의 시기심으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로운 믿음의 삶을 살았는데, 도리어 악인으로부터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었으니 너무도 기가 막히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불평이나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해하고 모함한 형들과 보디발 여사에게도 나중에 복수할 힘과 능력이 생겼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분별력이 없어 자신을 고소하는 부정한 여자의 말만 듣고 아무 잘못 없을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하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보디발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곧 개인 신앙이 분명하고 견고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때도 사람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충성을 다했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깊은 피해의식이 듭니다. 공연히 헛수고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사단이 심어주는 불신에 찬 생각을 물리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요셉으로부터 배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불평부터 하는데 요셉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39: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요셉이 비록 옥에 갇혔으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전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기고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기가 막히고 원통한 옥살이를 하면서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현실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온전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직시하였고,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더하셨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더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할 만한 힘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도우십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항상 도우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던 다윗에 대해 사무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요셉이나 다윗처럼 상황과 여건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신의 말을 내뱉기보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요셉이 감옥 안에서도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충성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루는 옥에 평상시와 다른 이상한 분위기가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애굽의 거물급 관리 두 사람이 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시대의 특성상 왕의 최측근이요 최고위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느헤미야도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는데 왕이 느헤미야의 기색을 알고 느낄만큼 왕의 최측근으로서 왕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아 예루살렘 재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기결수가 아니라 미결수였습니다. 그래서 시위대장도 이들이 바로에게 범죄하여 바로의 노함을 받아 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특별 대우를 하였습니다. 시위대장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종하게 하였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도 비록 요셉을 옥에 가두기는 하였지만 그가 얼마나 충성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물급인 두 사람에 대하여 수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역시 요셉은 이번에도 섬기는 목자의 심정으로 이들을 섬겼습니다. 그가 형식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섬기지 않고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의 내면까지 살피며 섬겼다는 것이 한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났습니다. 어느날 요셉이 이들을 섬기기 위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었는데 각기 몽조가 달랐고 또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요셉은 그들의 얼굴 표정만을 보고도 그 마음의 괴로움을 읽을 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동역자의 얼굴 표정마저 제대로 읽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또 다른 동역자들의 문제에 대해 관심 갖지 못하고 무관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기보다 자기가 먼저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자신의 문제를 뛰어넘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살펴가며 섬기고 위로와 문제해결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비참한 처지가 되어서도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온전하게 감당한 요셉을 우리가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이미 이 비밀을 잘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요셉은 이들을 도울 때도 분명하게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40:8b) 요셉은 이들의 꿈 얘기를 듣고 그들에게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사흘 후에 그의 전직이 회복될 것이라는 길몽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해 주면서 그의 전직이 회복되면 자기를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요셉의 꿈의 해석이 길한 것을 보고 자기의 꿈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흉몽이었습니다. 그가 사흘 안에 사형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조금도 꾸미거나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석 그대로 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흘 뒤에 요셉의 꿈의 해석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습니다.
Ⅲ. 총리가 된 요셉(41장)
요셉의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가 형통하였던 것이 아무 의미도 없고 결국 고난만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 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역사하십니다. 또한 더욱 크고 큰 복을 예비하시고 주십니다. 고난이 클수록 상급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때에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요셉은 이런 자세로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오묘하고 더욱 큰 축복을 주시는 것인지 우리는 요셉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만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억울한 사정을 고하였다면 요셉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전직이 회복되어 보디발家의 가정총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문의 가정총무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를 섬기고 한 민족을 이루는 역사에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왕과 같이 되는 꿈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고 이루는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이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성장하였을 때에 바로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이 된지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초장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깜짝 놀라 잠시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또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온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린 것이었습니다. 꿈을 깬 아침에 바로는 마음에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꿈을 말하고 해석을 명하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요셉으로부터 꿈 해석을 받았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자신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고하였습니다. 바로는 즉시 요셉을 옥에서 내어 자신에게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앞에 선 요셉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41:16을 보십시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도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증거하고 높였습니다. 이는 요셉의 내면성이 한 나라를 능히 섬기고도 남을 만큼 성장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 것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해 풍년 뒤에 무서운 일곱 해 흉년이 들게 하시는데 그 일곱 해 흉년이 얼마나 심한지 이전의 일곱 해 풍년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에게 꿈만 해석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대비책까지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고, 나라에 이것을 대비할 관리들을 두어서 일곱 해 풍년 때 수확의 오분의 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함으로써 일곱 해 흉년을 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땅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은 바로 왕은 요셉의 지혜와 명철을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41:38, 39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바로는 즉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였습니다. 이제 요셉은 바로의 인장반지를 끼고 세마포 옷을 입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바로의 버금 수레를 타며 애굽을 치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오늘날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수의 신분에서 일약 최강대국의 총리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요 섭리입니까? 이제 요셉의 모든 고난과 환난의 때가 지나고 영광과 기쁨의 때가 도래하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아리따운 아내를 얻고 두 아들도 얻었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 우리는 요셉의 신앙 간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장자인 므낫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차자인 에브라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삶의 중심에 항상 하나님이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영광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노예나 죄수였을 때 충성되었던 것처럼 충성하였습니다. 그는 애굽 온 땅을 순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칠년 풍년 동안에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장래를 준비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이 이러한 충성된 자세와 헌신으로 인하여 일곱 해 흉년이 들었을 때 각 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었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을 때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또 하나 배우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우리는 가끔 내가 큰일을 할 재목인데 나를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큰 것을 맡기시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서 자기가 팔린 집에서 섬기는 일이나 죄수로서 감옥에서 섬겼던 일들은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볼품없는 일이며 무의미한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사람 편에서 이 비천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내면성을 훈련하시고 연단하셔서 크고 놀라운 일에 쓰임 받는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심으로 애굽의 복의 근원이요 세상의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고 쓰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들어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며 이 시대의 복의 근원으로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난 가운데 있던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떤 고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불꽃같은 눈길로 우리를 살피시고 전능하신 오른 팔로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환난이나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미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환난이나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 말씀이 얼마나 요셉의 인생에 정확하게 역사하였습니까? 또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아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며 이 시대를 섬길만한 종들로 빚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간이나 억울한 노예와 죄수로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셨고 그가 쓰임 받을 만한 종으로 준비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단 번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을 잘 받아 준비된 종들로서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39-41장
요절 / 창세기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어린 소년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요셉은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요셉은 환경과 여건을 이겨내고 의롭게 살고자 했지만 감옥에 갇히는 더욱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요셉의 삶을 볼 때 애매히 고난 받는 것 같고 또한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자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우리는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또한 배우고자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믿음의 승리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드립니다. 요셉처럼 고난과 연단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구속역사 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Ⅰ. 노예가 된 요셉(39:1~10)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을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집에서 형들이 시기할 만큼 사랑받고 섬김 받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환경이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바뀌게 되면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자포자기하거나 미치거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됩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증오와 복수심을 키우며 탈출을 꿈꾸는 일이거나 아버지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편은 참으로 비참해 보이고 절망적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도와 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소부재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하나님은 요셉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요셉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요셉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쓴 뿌리를 품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요셉처럼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런 처지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가 된 기막힌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슬픔에 빠져 있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다만 은혜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시고 소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는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참으로 믿는 사람으로서 복의 근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처지를 원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충성스럽게 자신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복의 근원인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며 또한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자신의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은 보디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였으나 실은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보통의 노예들은 노예근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적당히 눈치껏 요령을 피우고 눈가림만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았습니다.(골 3:23) 이는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며 범사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또한 그 길을 형통하게 열어 주십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분명한 하나님과의 개인 신앙을 갖고 행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충성을 다하여 승리해 가는 요셉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또 다른 사건이 생겼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능력도 있고 영적 권위도 있어 보였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한 그 주인의 처가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유혹이 있었을 때 요셉은 분명하게 거절하며 말하였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39:8,9) 요셉의 이 말 가운데는 그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분별력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분명한 자세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보디발 여사의 날마다 계속되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날마다 계속되면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래 눈 한 번 딱 감고…”라든가, “나는 종에 불과하고 상대는 여주인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내 운명인걸 어떻게 하랴.” 등 등 핑계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뢰해준 주인도 배반하지 않았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이 말은 요셉의 단호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요셉은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불같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요셉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 후서 2:21, 22절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정욕은 불같이 청년을 향하여 유혹의 화살을 날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다윗 같은 위대한 종도 정욕을 피하지 못했을 때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죄로 인하여 왕권이 흔들리고 자식들 간에 죽고 죽이는 큰 비극을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정욕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결국 왕국이 분열되는 이스라엘의 비극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정욕을 피해야만 합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119:9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우리는 과거 정욕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삶에서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로 이제 심령이 깨끗해졌습니다. 과거의 죄는 이미 다 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 받은 후인 현재부터가 문제입니다. 늘 요셉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Ⅱ. 감옥에 갇힌 요셉(39:11~40:23)
요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죄를 범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요셉은 보디발 여사의 집요한 유혹에 단호하게 대처하기 위해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시무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에 아무도 없고 보디발 여사만 있었습니다.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을 강요하는 보디발 여사를 피해 요셉은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갔습니다. 그러자 독이 오를대로 오른 보디발 여사는 자작극을 꾸며 요셉을 모함하였습니다. 정욕적인 사람들의 문제는 정욕의 불길이 지나가면 미움이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범하고 난 후 미워하는 마음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하여 심히 미워하였던 것처럼 보디발 여사도 요셉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자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요셉을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그는 집사람들을 불러 요셉의 옷을 보여주며 요셉이 자기를 겁간코자 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요셉이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보디발에게 요셉의 옷을 증거로 내밀었고 자초지종을 모르는 보디발은 대노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에게 충성되고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요셉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의로운 요셉이 졸지에 강간 미수범이라는 파렴치범의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는데 왜 이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보고만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신건가?” 등등 불신의 말을 쏟아 붓기 쉬웠을 것입니다. 요셉이 처했던 것과 같은 상황과 비교할 수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이 말들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얼마나 자주 했던가 생각해보면 요셉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의 인생은 기구하기만 합니다. 형들의 시기심으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로운 믿음의 삶을 살았는데, 도리어 악인으로부터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었으니 너무도 기가 막히고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불평이나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해하고 모함한 형들과 보디발 여사에게도 나중에 복수할 힘과 능력이 생겼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분별력이 없어 자신을 고소하는 부정한 여자의 말만 듣고 아무 잘못 없을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하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보디발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곧 개인 신앙이 분명하고 견고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때도 사람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충성을 다했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깊은 피해의식이 듭니다. 공연히 헛수고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사단이 심어주는 불신에 찬 생각을 물리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요셉으로부터 배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불평부터 하는데 요셉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39: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요셉이 비록 옥에 갇혔으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전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기고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기가 막히고 원통한 옥살이를 하면서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현실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온전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직시하였고,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더하셨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더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할 만한 힘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도우십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항상 도우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던 다윗에 대해 사무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요셉이나 다윗처럼 상황과 여건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신의 말을 내뱉기보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요셉이 감옥 안에서도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충성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루는 옥에 평상시와 다른 이상한 분위기가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애굽의 거물급 관리 두 사람이 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시대의 특성상 왕의 최측근이요 최고위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느헤미야도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는데 왕이 느헤미야의 기색을 알고 느낄만큼 왕의 최측근으로서 왕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아 예루살렘 재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은 기결수가 아니라 미결수였습니다. 그래서 시위대장도 이들이 바로에게 범죄하여 바로의 노함을 받아 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특별 대우를 하였습니다. 시위대장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종하게 하였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도 비록 요셉을 옥에 가두기는 하였지만 그가 얼마나 충성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물급인 두 사람에 대하여 수종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역시 요셉은 이번에도 섬기는 목자의 심정으로 이들을 섬겼습니다. 그가 형식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섬기지 않고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의 내면까지 살피며 섬겼다는 것이 한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났습니다. 어느날 요셉이 이들을 섬기기 위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었는데 각기 몽조가 달랐고 또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요셉은 그들의 얼굴 표정만을 보고도 그 마음의 괴로움을 읽을 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동역자의 얼굴 표정마저 제대로 읽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또 다른 동역자들의 문제에 대해 관심 갖지 못하고 무관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기보다 자기가 먼저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문제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자신의 문제를 뛰어넘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살펴가며 섬기고 위로와 문제해결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비참한 처지가 되어서도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온전하게 감당한 요셉을 우리가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이미 이 비밀을 잘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요셉은 이들을 도울 때도 분명하게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40:8b) 요셉은 이들의 꿈 얘기를 듣고 그들에게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사흘 후에 그의 전직이 회복될 것이라는 길몽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해 주면서 그의 전직이 회복되면 자기를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요셉의 꿈의 해석이 길한 것을 보고 자기의 꿈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흉몽이었습니다. 그가 사흘 안에 사형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조금도 꾸미거나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석 그대로 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흘 뒤에 요셉의 꿈의 해석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습니다.
Ⅲ. 총리가 된 요셉(41장)
요셉의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가 형통하였던 것이 아무 의미도 없고 결국 고난만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 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역사하십니다. 또한 더욱 크고 큰 복을 예비하시고 주십니다. 고난이 클수록 상급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때에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요셉은 이런 자세로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오묘하고 더욱 큰 축복을 주시는 것인지 우리는 요셉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만일,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억울한 사정을 고하였다면 요셉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전직이 회복되어 보디발家의 가정총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문의 가정총무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를 섬기고 한 민족을 이루는 역사에 부르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왕과 같이 되는 꿈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고 이루는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이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성장하였을 때에 바로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이 된지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초장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서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깜짝 놀라 잠시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또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온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린 것이었습니다. 꿈을 깬 아침에 바로는 마음에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술객과 박사를 모두 불러 그들에게 꿈을 말하고 해석을 명하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요셉으로부터 꿈 해석을 받았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자신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고하였습니다. 바로는 즉시 요셉을 옥에서 내어 자신에게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앞에 선 요셉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41:16을 보십시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도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증거하고 높였습니다. 이는 요셉의 내면성이 한 나라를 능히 섬기고도 남을 만큼 성장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 것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해 풍년 뒤에 무서운 일곱 해 흉년이 들게 하시는데 그 일곱 해 흉년이 얼마나 심한지 이전의 일곱 해 풍년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에게 꿈만 해석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대비책까지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고, 나라에 이것을 대비할 관리들을 두어서 일곱 해 풍년 때 수확의 오분의 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함으로써 일곱 해 흉년을 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땅이 흉년을 인하여 멸망치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은 바로 왕은 요셉의 지혜와 명철을 즉각 알아보았습니다. 41:38, 39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바로는 즉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였습니다. 이제 요셉은 바로의 인장반지를 끼고 세마포 옷을 입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바로의 버금 수레를 타며 애굽을 치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오늘날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수의 신분에서 일약 최강대국의 총리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요 섭리입니까? 이제 요셉의 모든 고난과 환난의 때가 지나고 영광과 기쁨의 때가 도래하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아리따운 아내를 얻고 두 아들도 얻었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 우리는 요셉의 신앙 간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장자인 므낫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차자인 에브라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삶의 중심에 항상 하나님이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영광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노예나 죄수였을 때 충성되었던 것처럼 충성하였습니다. 그는 애굽 온 땅을 순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칠년 풍년 동안에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장래를 준비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이 이러한 충성된 자세와 헌신으로 인하여 일곱 해 흉년이 들었을 때 각 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었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을 때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또 하나 배우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우리는 가끔 내가 큰일을 할 재목인데 나를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큰 것을 맡기시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서 자기가 팔린 집에서 섬기는 일이나 죄수로서 감옥에서 섬겼던 일들은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볼품없는 일이며 무의미한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사람 편에서 이 비천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내면성을 훈련하시고 연단하셔서 크고 놀라운 일에 쓰임 받는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심으로 애굽의 복의 근원이요 세상의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고 쓰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들어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며 이 시대의 복의 근원으로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립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난 가운데 있던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떤 고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실패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불꽃같은 눈길로 우리를 살피시고 전능하신 오른 팔로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환난이나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미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환난이나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 말씀이 얼마나 요셉의 인생에 정확하게 역사하였습니까? 또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아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며 이 시대를 섬길만한 종들로 빚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13년간이나 억울한 노예와 죄수로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셨고 그가 쓰임 받을 만한 종으로 준비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단 번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을 잘 받아 준비된 종들로서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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