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창21a(33:1-20)/ 야곱과 에서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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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21 강
말씀 : 창세기 33:1 - 20
요절 : 창세기 33:10
야곱과 에서의 화해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번 초평 여름 수련회는 성령의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말씀을 깊이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안에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인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얍복 나루터에서 밤새도록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씨름을 해 주시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심으로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혀지자 사람과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오늘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에 관한 말씀입니다. 20년 넘게 묵은 원한과 미움이 눈 녹듯이 녹고 형제 사이는 우애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수련회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영적인 투쟁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합니까? 이 시간 주님께서 야곱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의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환도뼈가 위골된 야곱이 절룩거리며 에서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겼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요셉이 먼저 도망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야곱은 정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맨 앞에 서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두려움이 변하여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깨어진 심령을 가지고 앞장서서 에서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에서를 보자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였습니다. 당시에 일곱 번 몸을 땅에 굽히며 절하는 것은 애굽 왕에게 봉신(奉臣)들이 갖추는 예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낮추고 형을 맞이하였습니다. 정말로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형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에 겸손한 자를 좋아합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 마음으로부터 에서를 높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하자 에서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이 상황은 야곱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잠 16:7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원수 같던 형의 마음이 바뀌어 뜨겁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용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은 것을 깨닫고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거지같은 아들을 끌어안고 용서와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준비한 새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과 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화해를 하였습니다.
에서 편에서 보면 야곱을 용서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자기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빼앗고 축복도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빼앗았습니다. 야곱의 죄를 생각할 때마다 분통이 터졌습니다. 일이 잘 안되면 피해의식에 빠져서 더욱 야곱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복을 주셔서 이제는 자신도 큰 떼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이 자리를 잡게 되자 야곱에 대한 미움도 어느 정도 사그라졌습니다. 이러던 그가 야곱이 온다는 말을 듣고 사백인을 거느리고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에게 엄청난 예물을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밤에 혼자서 깊이 생각하다가 보니 옛날의 원한들이 사라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도 이미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왕에게 예를 갖추는 신하와 같이 야곱이 겸손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에게 어떤 교만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절룩거리며 자기에게 나아오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에서는 회개한 야곱을 마음으로 용서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회개하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와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었습니다. 두 형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에서는 홀몸으로 집을 떠났던 야곱이 떼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나이 차이도 안 나는 형이지만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고 대답하며 인사를 시켰습니다. 먼저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였습니다. 에서는 또 물었습니다.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야곱은 8,10,15절 세 차례에 걸쳐서 형 에서에게 은혜를 입으려 한다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만류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그러자 야곱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의 내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뇌물 성격이 강했지만 나중에는 감사함으로 예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였습니다. 여기서 예물은 복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복을 움켜쥐고자만 하던 데서 이제는 복을 나누어 주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형님과 함께 복을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서도 마지못해하며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내면 문제가 해결되자 형님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처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태조 이성계가 그와 절친한 무학대사를 찾아가 심심하니 군신간이니 사제간이니 무에니 하는 체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욕이나 농담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얼굴을 보니 꼭 주린 개가 뒷간을 바라보는 상이요 늙은 개가 고통하는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전하의 용안을 보니 부처님이 강림하신 것 같다고 하면서 절을 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대로하면서 “대사는 도승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때가 다 떠나지 않은 것 같소. 짐이 아까 무어라고 하였소. 서로 욕담과 농담을 하자고 하였지 존경하여 달라고 하였소. 짐이 대사에게 개 같은 중이라고 하였으니 대사는 짐을 대하여 도야지 같다고 하든지 소와 같다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제가 약속을 감히 어길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이란 말이니 결국 전하는 개가 되고 빈도는 부처가 된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음란한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음란해 보이고, 속이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거짓되어 보이고, 이기적인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회개하고 변화를 받고 보니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를 죽일 것 같던 두려운 형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과 같이 화평이 넘치고 은혜롭게 보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었습니다. 이제 형의 얼굴을 보고 형으로부터는 용서를 얻었습니다. 용서하는 형 안에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복은 모두 선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용서하는 형의 얼굴 속에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각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될 때 무덤덤하게 보이던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한 형제님은 술만 드시면 술주정을 하시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구타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성장하면서 하는 행동들을 보면 꼭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미워하였지만 자신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되자 자신을 용서하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죄의 소욕을 이기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형제를 용서함으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화해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대적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평화하도록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에서는 이제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시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그러면 내가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찌 그리하리이까 하고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라며 완곡히 거절하였습니다. 표면상 야곱의 자식들과 가축 떼가 에서의 용사들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 야곱은 자기의 고향인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일은 가나안 땅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에서의 제의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배우는 것은 야곱은 에서의 도움 없이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서 나가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자신의 양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말을 타고 있는 에서를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수준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형편과 수준에 따라서 사는데 법을 배우게 되면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이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비교의식과 탐욕으로 인해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주 5일제 근무가 시행되자 5일제 근무자들은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7%나 되는 6일제 근무자들은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비교의식과 탐욕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불평하고 원망하면 결코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족하는 삶을 살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너무나 자족해서 또 문제가 되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도록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에 긴장이 풀어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제 절박한 인생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적당히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고 안주하였습니다. 아마 그곳은 초장이 많아서 양치기가 좋았을 것입니다(37:14). 속곳은 요단강 동편 지역입니다.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기보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게으름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적인 유익을 좇아갔습니다. 야곱은 숙곳에서 옮겨 세겜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로 인하여 자녀들과 가정에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이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육신적인 크리스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절박한 인생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 살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즐기지 못했던 세상 쾌락과 잔재미를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지만 일단 쉬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살던 사람이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게 되자 연애하고 세상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을 봅니다. 또 이기심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세상의 꿈을 좇아서 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서 살기 시작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번 수양회에서 많은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능력으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한 목자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잡고 이를 위해서 열심히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굴러가는 바퀴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멈춘 자전거는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일을 이루고 난 후에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하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빌3:12). 우리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배웠습니다. 용서는 구원과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미운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하나님과 만나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하고, 마음이 평화로우려면 마음 속의 두려움과 분노를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우리가 자기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현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화목케 하는 직책을 힘써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가정에, 우리 캠퍼스에, 이 땅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33:1 - 20
요절 : 창세기 33:10
야곱과 에서의 화해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번 초평 여름 수련회는 성령의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말씀을 깊이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안에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인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얍복 나루터에서 밤새도록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씨름을 해 주시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심으로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혀지자 사람과도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오늘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에 관한 말씀입니다. 20년 넘게 묵은 원한과 미움이 눈 녹듯이 녹고 형제 사이는 우애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수련회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영적인 투쟁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합니까? 이 시간 주님께서 야곱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의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환도뼈가 위골된 야곱이 절룩거리며 에서를 만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겼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요셉이 먼저 도망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야곱은 정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맨 앞에 서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두려움이 변하여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깨어진 심령을 가지고 앞장서서 에서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에서를 보자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였습니다. 당시에 일곱 번 몸을 땅에 굽히며 절하는 것은 애굽 왕에게 봉신(奉臣)들이 갖추는 예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낮추고 형을 맞이하였습니다. 정말로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형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에 겸손한 자를 좋아합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 마음으로부터 에서를 높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하자 에서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이 상황은 야곱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잠 16:7절에 의하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원수 같던 형의 마음이 바뀌어 뜨겁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용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멀리 떠나갔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돼지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은 것을 깨닫고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거지같은 아들을 끌어안고 용서와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준비한 새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과 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화해를 하였습니다.
에서 편에서 보면 야곱을 용서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자기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빼앗고 축복도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빼앗았습니다. 야곱의 죄를 생각할 때마다 분통이 터졌습니다. 일이 잘 안되면 피해의식에 빠져서 더욱 야곱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복을 주셔서 이제는 자신도 큰 떼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이 자리를 잡게 되자 야곱에 대한 미움도 어느 정도 사그라졌습니다. 이러던 그가 야곱이 온다는 말을 듣고 사백인을 거느리고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에게 엄청난 예물을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밤에 혼자서 깊이 생각하다가 보니 옛날의 원한들이 사라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도 이미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왕에게 예를 갖추는 신하와 같이 야곱이 겸손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에게 어떤 교만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절룩거리며 자기에게 나아오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에서는 회개한 야곱을 마음으로 용서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회개하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와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었습니다. 두 형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에서는 홀몸으로 집을 떠났던 야곱이 떼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나이 차이도 안 나는 형이지만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고 대답하며 인사를 시켰습니다. 먼저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였습니다. 에서는 또 물었습니다.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야곱은 8,10,15절 세 차례에 걸쳐서 형 에서에게 은혜를 입으려 한다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만류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그러자 야곱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의 내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뇌물 성격이 강했지만 나중에는 감사함으로 예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였습니다. 여기서 예물은 복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복을 움켜쥐고자만 하던 데서 이제는 복을 나누어 주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형님과 함께 복을 나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에서도 마지못해하며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내면 문제가 해결되자 형님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처럼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태조 이성계가 그와 절친한 무학대사를 찾아가 심심하니 군신간이니 사제간이니 무에니 하는 체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욕이나 농담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얼굴을 보니 꼭 주린 개가 뒷간을 바라보는 상이요 늙은 개가 고통하는 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전하의 용안을 보니 부처님이 강림하신 것 같다고 하면서 절을 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대로하면서 “대사는 도승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때가 다 떠나지 않은 것 같소. 짐이 아까 무어라고 하였소. 서로 욕담과 농담을 하자고 하였지 존경하여 달라고 하였소. 짐이 대사에게 개 같은 중이라고 하였으니 대사는 짐을 대하여 도야지 같다고 하든지 소와 같다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제가 약속을 감히 어길 리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이란 말이니 결국 전하는 개가 되고 빈도는 부처가 된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음란한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음란해 보이고, 속이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거짓되어 보이고, 이기적인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회개하고 변화를 받고 보니 마음의 평화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를 죽일 것 같던 두려운 형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과 같이 화평이 넘치고 은혜롭게 보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었습니다. 이제 형의 얼굴을 보고 형으로부터는 용서를 얻었습니다. 용서하는 형 안에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복은 모두 선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용서하는 형의 얼굴 속에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각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될 때 무덤덤하게 보이던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한 형제님은 술만 드시면 술주정을 하시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구타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성장하면서 하는 행동들을 보면 꼭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미워하였지만 자신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되자 자신을 용서하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죄의 소욕을 이기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형제를 용서함으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화해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대적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평화하도록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에서는 이제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시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그러면 내가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찌 그리하리이까 하고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라며 완곡히 거절하였습니다. 표면상 야곱의 자식들과 가축 떼가 에서의 용사들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 야곱은 자기의 고향인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일은 가나안 땅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에서의 제의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배우는 것은 야곱은 에서의 도움 없이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서 나가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자신의 양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말을 타고 있는 에서를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수준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형편과 수준에 따라서 사는데 법을 배우게 되면 행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이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비교의식과 탐욕으로 인해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주 5일제 근무가 시행되자 5일제 근무자들은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67%나 되는 6일제 근무자들은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비교의식과 탐욕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사람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불평하고 원망하면 결코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족하는 삶을 살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너무나 자족해서 또 문제가 되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도록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에 긴장이 풀어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제 절박한 인생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적당히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짓고 안주하였습니다. 아마 그곳은 초장이 많아서 양치기가 좋았을 것입니다(37:14). 속곳은 요단강 동편 지역입니다.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기보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게으름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적인 유익을 좇아갔습니다. 야곱은 숙곳에서 옮겨 세겜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로 인하여 자녀들과 가정에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이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육신적인 크리스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절박한 인생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 살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즐기지 못했던 세상 쾌락과 잔재미를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지만 일단 쉬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살던 사람이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게 되자 연애하고 세상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을 봅니다. 또 이기심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세상의 꿈을 좇아서 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서 살기 시작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번 수양회에서 많은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능력으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한 목자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잡고 이를 위해서 열심히 투쟁해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굴러가는 바퀴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멈춘 자전거는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일을 이루고 난 후에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하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빌3:12). 우리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배웠습니다. 용서는 구원과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미운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하나님과 만나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하고, 마음이 평화로우려면 마음 속의 두려움과 분노를 없애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우리가 자기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현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화목케 하는 직책을 힘써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가정에, 우리 캠퍼스에, 이 땅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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