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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05gen20(창32장)/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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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69회 작성일 05-07-1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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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20 강                                                       
말씀 / 창세기 31,32장
요절 / 창세기 32:28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31장은 야곱이 밧단아람에 있는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32장은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32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 홀로 남아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복을 구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투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습니다. 야곱은 그들을 보고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며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진영의 군대를 보내사 호위하고 계셨습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는데 여기서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반환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4,5).”  그런데 사자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 야곱을 만나려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백명은 대대급의 병력입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을 데리고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환영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태도를 보아서 여차하면 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고 답답해하는 것입니까? 20년 전의 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과 만나 용서받아야 해결됩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적인 투쟁을 하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써봅니다. 그것으로도 안 되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야곱은 죄와 그로 인한 심판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내면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다가오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어둡게 보았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 불신을 심고 문제를 왜곡하고 영적인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단의 불화살을 막아야 합니다. 야곱은 아직까지 온전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에서가 자기를 죽이면 이제까지 쌓아 놓은 모든 재물과 자녀들과 아내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여차하면 반타작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두 떼로 나누어서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피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9-12).” 그의 기도는 형식은 잘 갖추었으나 회개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는데 내면의 두려움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불안 문제, 두려움 문제, 죄 문제는 인간의 성실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알 것은 다 아는데 믿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도가 끝나고 구체적으로 형의 마음을 녹이기 위한 선물 공세를 펼칩니다. 그가 준비한 짐승은 550마리로서 시가로 6억 7천만원 정도입니다. 야곱은 이 선물을 각각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파상 공세를 펼친 것입니다. 암염소 이백과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과 숫양 이십, 젖나는 약대 삽십과 그 새끼, 암소 사십, 황소 열, 암나귀 이십과 그 새끼 열을 보냈습니다. 그는 처음에 좋은 것으로 주고 나중에 값싼 것을 준 것이 아니라 갈수록 비싸고 값이 나가는 것으로 하여 에서의 마음을 녹이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자신을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예물을 앞서 보내고 무리 가운데서 밤을 보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4)” 이 말씀은 악착같이 살아온 야곱이라는 사람의 인생의 결국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이기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싸워서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죄 문제와 두려움 문제 앞에서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었습니다. 칠흙 같이 어두운 밤은 그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홀로 된 그의 상태는 그가 얻은 그 어떤 것들도 그의 내면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도, 자식들도, 아내들도, 명예도 그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소리를 쳐보기도 하고 울어도 보고 머리를 쥐어뜯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아도 봤지만 그 자신의 내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아이들과 네 아내를 남겨두고 얍복강에 투신자살할 수도 없었습니다. 야곱은 고독하였습니다. 그는 혼자서 자기의 문제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자기의 내면 문제이기 때문에 혼자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고독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죄 문제라도 목자님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어떤 문제는 하나님과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센타에 그렇게 사람이 많지만 아무도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고독은 필수과정입니다. 인격은 행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병든 인격으로 인해서 우리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고독을 견디면서 내면이 치유될 때 우리의 인격은 행복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방법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해결하고자 하면 갈등만 빚기 쉽습니다.

  2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어떤 사람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렵고 답답해 하는 야곱을 먼저 찾아와서 붙잡고 씨름을 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쓰고 힘을 쓰고 용을 썼습니다. 안다리 후리기, 들배지기, 잡치기, 앞다리 잡아들어 올리기, 바깥 다리 걸기 등등 아는 기술을 다 써보았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 해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는 문제 앞에서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목자님을 통해서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싸워 주십니다. 때로 목자는 양들과 영적인 씨름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면서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소감을 쓰면서 영적인 씨름을 합니다. 금식하면서 죄를 끊는 투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씨름을 해도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습니다. 환도뼈는 힘의 근원입니다. 환도뼈는 가장 단단한 뼈이며 웬만해서는 위골되지 않습니다. 한 의사 목자님에 의하면 네 명의 의사가 시신의 환도뼈를 뽑으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환도뼈는 말 한 마리가 온 힘을 다해 뽑아도 뽑히지 않는 견고한 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정말 야곱의 환도뼈를 하나님께서 엄청난 힘으로 강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야곱의 환도뼈는 무엇을 의미하며 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까? 씨름을 하다가 이기지 못하니까 환도뼈를 치는 것은 반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발견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삶이었다. 속이고 도망치는 삶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붙잡혔습니다. 오도 가도 못합니다. 환도뼈는 사람의 몸을 지지하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뼈였습니다. 야곱의 환도뼈는 야곱의 강한 인간성과 죄성을 상징합니다. 강한 야곱의 인간성은 좋게 볼 수도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그것은 자기 판단에 기초한 불굴의 고집스러움입니다. 그는 웬만해서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는 강한 인간성입니다. 이제 까지 야곱의 삶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그의 환도뼈였습니다. 이런 그는 결국 에서 문제 앞에서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자기발견하지 않고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을 도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완고한 고집과 죄성을 상징하는 그의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사람이 환도뼈가 부러지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도망가 봤자 금방 잡힐 것이 뻔합니다. 기도를 배우려면 환도뼈가 부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환도뼈가 부러져야 합니다.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를 섬기신다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열매 맺는 사람들을 보면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자기가 팍 죽어야 합니다. 자기 뜻이 죽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서야 합니다.

  그 사람은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환도뼈를 얻어맞은 야곱은 심한 고통 가운데 아파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야곱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사람의 발을 찰거머리처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날이 새려고 하니 갈수 있도록 야곱에게 제발 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놔라 제발” 그 말을 하면서 뿌리치고 발로 차며 “제발 내발 놓으라니까 제발 내발 놔, 놔, 놔!” 하며 어찌하든지 떨쳐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엄청나게 아픈 가운데서도 그 사람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씨름하는 중에 자기와 씨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울면서 간청하였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구하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는 명예를 얻었고 사랑을 얻었고 자식을 얻었고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 말고 진짜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복이 무엇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말은 너의 존재가 무엇이냐? 네가 누구냐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너는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 이에 대해서 그는 야곱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곱이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나는 사기꾼입니다. 나는 야비한 놈입니다. 나는 자기 밖에 모르는 비정한 놈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를 인정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복을 계속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육신의 모습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정말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는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속이는 삶을 살았고 거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도 믿음으로 살기보다 거래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는 야곱의 내적인 투쟁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깨어지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 소감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이렇게 비참한 죄인이로구나!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놈이구나!”라고 깨닫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흘리신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 동안 야곱은 ‘사람과 싸우는 자’로 살았습니다. 사람과 경쟁하고 사람을 이기고 최고가 되는 것이 인생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싸우는 자란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영적인 씨름을 하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 자기를 발견하고 죄인으로서 자기를 인정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에서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었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집불통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을 쟁취하던 사람이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은 존재가 변화되자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거기서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29).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습니다. 이 31절이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는 야곱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야곱은 비록 환도뼈로 인해서 절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본 그의 내면은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그의 심령에 찬란히 빛났습니다. 자유, 기쁨, 거룩함이 넘쳤습니다. 그의 몸은 절룩거렸지만 그의 마음은 마치 나비처럼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환경이 변한 것은 없지만 그의 내면이 바뀌자 모든 것이 바뀌어 보였습니다. 그의 저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진정한 복은 소유가 아닙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만나고 죄문제를 해결함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존재가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저희가 이번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이런 영적인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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