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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05년도 성탄메시지(2005.12.11. 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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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132회 작성일 05-12-13 05:33

본문

2005년도 성탄메시지(2005.12.11. 연합예배)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말씀/누가복음 2:1-20
요절/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읽은 본문은 의사며 역사가요 복음 전도자였던 누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한 ‘천사의 성탄 메시지’를 전합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 각 자의 마음에 아기 예수님을 새롭게 탄생시켜주시고, 아기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을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 예수님의 탄생(1-7)

  1,2절을 봅시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예수님께서 탄생한 당시는 로마의 세계였습니다. 로마는 ‘로마의 평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이 슬로건의 의미는 로마제국이 온 세계를 다스릴 때만이 지역 간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총과 칼을 통한 평화는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것일 뿐, 식민지 백성들은 무자비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백성들의 머리수에 세금을 매기고자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황제의 호적명령은 절대적이었고 무시무시했습니다. 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날자가 잡혔던 결혼식도 취소하고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야만 했고, 중환자나 해산이 임박한 임산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4,5절을 봅시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호적하러 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 나사렛 목수 요셉과 그의 정혼녀 마리아도 끼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여 만삭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다윗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는데, 그 거리가 무려 400리 길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의 힘든 여행은 아마도 일주일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요셉이 숨겨두었던 사과를 꺼내어 마리아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마리아, 힘들지? 이거 세계에서 제일 맛이 좋은 한국산 부사인데, 먹고 힘을 내요. 내가 마리아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요셉, 고마워요. 전 당신과 함께라면 지구 끝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만은 이러했지만, 그들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6,7절을 봅시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을 때 마리아가 산통을 시작했습니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베들레헴 여관들은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이미 만원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해산할 방을 얻고자 이 집 저 집으로 뛰었습니다. “방 좀 빌려주세요. 우리 마리아 아이를 낳으려 해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살기가 너무나 각박하여 해산하는 산모에게 방 한간 내어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할 수없이 짐승이 사는 마구간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해산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였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아이를 마구간에서 낳아 구유에 누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구간에 있던 짐승들도 아기 예수님의 가엾은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얼굴을 돌린 채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찬113장) 

  롬 9:5절에 보면,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요 1: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사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기는커녕 도리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고통)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운명을 치유하십니다.

  어떤 형제는 매우 진실하고 핸썸합니다. 그런데 외교관이신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한국, 미국, 이라크, 프랑스, 태국 등을 옮겨 다니며 자랐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친구를 잘 사귈 수가 없었고, 가는 곳마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슬픔과 자의식과 대인공포증이 쌓이고, 성격은 내성적이 되었습니다. 심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벽을 치고, 자기 얼굴을 때리고,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질렀고, 자살충동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으악!” 그러나 내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가 대학에 들어와 우리 모임에 인도되어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마음의 상처와 두려움을 치유하시고, 그를 심정있는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슬픔과 운명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II. 천사의 성탄 메시지(8-20)

  8,9절을 봅시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그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크게 무서워하였습니다. 이때 그 천사가 성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10-12절을 봅시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첫째,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황우석 교수가 세계최초로 난치병 치료에 희망을 주는 줄기세포배양에 성공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매우 기뻤지만, 경쟁국 사람들은 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대기업에 붙었다는 소식, 목자들에게는 양이 붙었다는 소식, 우리 국민들에게는 경제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2006년 월드컵 조 추천에서 한국이 ‘죽음의 조’를 피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대기업에 취직하여 돈을 벌고, 예쁜 아내와 결혼을 하고 레저를 즐기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좋은 학점을 따고 해외어학연수도 다녀옵니다. 무엇보다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버티고 버팁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곧 그 바닥이 드러납니다. 어떤 자매가 한국최대 기업인 S그룹에 취직되어 연수를 받을 때 날 것 같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기쁜 일이지요. 그런데 정작 근무처를 배치 받은 후에는 얼마 못 가서 시들하더니, 몇 달이 지나자 별로 재미없는 업무를 반복해야 하는 것과 힘든 인간관계로 인해서, 조금 과장하면 죽을 맛으로 출근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것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더구나 세상에는 전쟁, 폭탄테러, 지진, 해일, 살인, 강간, 사기, 실직, 자살 등 나쁜 소식들도 넘쳐납니다. 2005년에 이런 소식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해가 갈수록 이런 소식들은 더해갑니다.

  그런데 천사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좋은 뉴스를 가져왔는데, 그 뉴스는 큰 기쁨을 주는 뉴스다.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로마인에게도 기쁨을 주고, 남한사람, 북한사람, 아프리카사람, 아시아사람, 북미사람, 남미사람, 중국사람, 인도사람, 중동사람, 호주사람, 유럽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 병든 사람,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 연세가 든 사람,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뉴스다.” 세상에 이런 뉴스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천사는 11절에서 말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 뉴스는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뉴스입니다.

  어떤 형제는 전교 1등, 전국 모의고사 충북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명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외모도 핸썸하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자기가 작사 작곡한 곡을 직접 부를 때, 뭇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그의 내면에는 참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가 초등학생 때 한 여학생과 수 차례의 그릇된 성 경험을 하게 된 이후로 이중생활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때는 기숙사에서 동성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한동안 하루를 멀다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모텔을 들락거렸습니다. 그의 내면은 황폐화되었고, 홀로 있는 시간이면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도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그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한 친구의 인도로 우리 모임에 와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 8: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시는 말씀으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때 신기하게도 그는 지긋지긋하던 죄의 세력에서 벗어났고, 지금은 은혜가 넘치는 찬양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 은혜로운 싱얼롱 팀 멤버로 섬겼습니다. 

  얼마 전에 대기업의 스물 여섯 살 된 딸이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 목을 메어 자살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캠퍼스 목자인 저도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녀는 젊음과 아름다움과 예술성까지 가졌고, 현대판 공주로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 소유로 된 주식이 2천억 원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그 많은 것들도 그의 인생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즐길 거리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죄 때문입니다. 롬 3:23절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6:23절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히 9:27절은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죄의 결과로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떨어집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사람이 3도의 화상만 입어도 그 고통이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습니다. ‘구주’란 건져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무서운 죄의 세력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눅 1:71절에 보면, 우리 인간의 원수는 사단이요, 악한 영들입니다. 사단이 오늘날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어려운 취업의 현실을 이용하여 청년들에게서 꿈과 비전을 빼앗고, 두려움과 절망감을 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가족밖에 모르는 소시민적인 존재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30군데 50군데 입사원서를 넣었는데도 취직을 못한 청년들이 이 세상에서 느끼는 배신감과 절망감과 두려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PC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뉴욕대학의 닐 포스트만 교수가 현대인들의 성향을 쓴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이 “죽도록 즐기기”입니다. 엊그제 PC방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던 한 30대 청년이 급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열흘이 넘도록 하루 2,3시간만 자고 게임을 했고, 그 날은 31시간 쉬지 않고 게임을 했다고 합니다. 저희 센터 근방에 PC방이 있는데, 인터넷 게임과 음란물 써핑으로 밤을 홀딱 새고 아침에 벌건 눈으로 나오는 청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름을 그렇게도 잘 지었는지 그 PC방의 이름이 “홀딱 새”입니다. 청년들이 홀딱 새니까 이름을 홀딱 새로 지었는지, 이름이 홀딱 새라 청년들이 홀딱 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사단은 청년들로 하여금 끝없이 즉흥적인 쾌락을 좇게 하여 본능에 충실한 존재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은 악한 영의 세력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복음을 전파하셨고, 많은 병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구원하셨고, 6천 마리의 악한 영에 사로 잡혀 완전히 망가졌던 한 청년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라비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졌던 나사로 삼남매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깨어지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눌러 씌웠을 때, 예수님의 머리와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군병들이 가죽 채찍으로 예수님을 내려칠 때,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졌습니다. 군병들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 형틀에 매달았고, 산 채로 두 손목과 발목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한 군병이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당하며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주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와 악한 영들에게서 구원하십니다. 구주 예수님은 우리를 불순종과 교만의 죄, 음욕의 죄, 이기심의 죄, 미움의 죄, 모든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세계만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일생을 통하여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에 천국을 만드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회복된 만유를 다스리며 왕 노릇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습니다. 오늘이 그 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그 구주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였다. 천사는 계속하여 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구주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였다는 사실이 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구주가 가이사의 궁전에 나서 황금요람에 누워있다면 아무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주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였기 때문에 누구나 다가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큰 자기 비움이요 낮아짐이요 자기 희생입니다.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은 일생 구유의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들어도 얼마나 힘들어합니까? 그런데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의 종이 되어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문둥병이 든 사람을 어루만져 섬김으로 몸과 영혼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상대도 하지 않는 세리 레위를 찾아 그를 제자로 부르셨고, 3년 반 동안 섬겨 성자 마태로 만드셨습니다.

  어떤 자매는 심히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3일에 한번씩 밥상을 던졌습니다. 그 분이 아마도 야구를 잘 했던 모양입니다. 때로는 칼과 가위를 던졌습니다. 이유 없이 어머니를 구타했습니다. 이런 아버지로 인해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기고 어른들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병이 들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하나님이신 데 죄인들의 종이 되어 죽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모든 상처와 불신과 두려움이 치유되었고, 많은 대학생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는 영적 어미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는 권위적인 남편 때문에 상처받는 아내들, 권위적인 상사 때문에 상처받는 직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상처도 치유해주고,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줍니다. 우리가 이 아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의 사랑과 진리와 평화로 다스림을 받을 때, 영혼의 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인종 간, 계층 간, 지역 간, 노사 간에 갈등이 있고, 이념과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갈등이 있습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의 고질병이 있습니다. 인권 문제, 환경오염 문제, 세계 평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이 임하여 다스리실 때, 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이 임할 때 전쟁, 폭탄테러, 살인, 강간, 사기 등의 비극이 그칠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으나 역사에서 사라졌고, 황제도 갔습니다. 가이사의 궁전은 화려하게 보이나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는 약한 것 같으나 강합니다. 곧 사라질 것 같으나 영원합니다. 또한 구주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방법을 보여줍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희생하며 섬기는 곳에 생명이 살아납니다. 구유에 오셔서 구유의 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배우며 따르는 곳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구유! 구유! 구원! 비전! 큰 기쁨!”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천사의 성탄 메시지가 끝나자 허다한 천군이 나타나 메시지를 전해준 그 천사와 함께 웅장한 합창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15-20절을 보십시오. 이때 목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찾아서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목자들처럼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12절에서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는 것은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내 것이 됩니다. 큰 기쁨이 임합니다. 찬양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운명을 치유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죄와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섬김과 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치유하고 살립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습니다. 그 구주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였습니다. 다 같이 요절말씀을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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