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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소아시아 일곱교회(3:14-22)/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라오디게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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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132회 작성일 05-12-02 21:00

본문

소아시아 일곱 교회 제 7 강
말씀 / 요한계시록 3:14-22
요절 / 요한계시록 3:15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특강 마지막입니다. 우리는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 교회와 가장 흡사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리쿠스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골짜기는 무엇보다 안정감이 있고 아늑한 분위기를 연상시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과 60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도시의 피해가 막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시민들은 외부의 원조없이 시를 재건하면서 부유한 도시임을 입증했습니다.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교통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다니기에 불편하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발전되기는 어렵습니다. 요즈음은 주차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지요? 리쿠스 골짜기는 에베소와 동부의 메소보다미아 지역을 잇는 동서의 교통로, 페르가뭄과 남부의 비시디아나 밤빌리아를 잇는 남북교통로가 서로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일찍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각광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에 유대인들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많은 금을 거래하여 라오디게아는 황금이 많은 도시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실로 많은 은행과 고리 대금업자들이 있어 현물을 많이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라는 지리적인 위치는 좋은 점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약 13Km 떨어진 높은 지역에 위치한 히에라볼리는 도시의 주 산업 중의 하나가 양모 염색업이었습니다. 염색의 폐수는 자연스럽게 골짜기에 위치한 라오디게아로 흘러 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골짜기에 위치한 라오디게아 주민들은 이 폐수에서 비롯되는 눈병이나 귓병을 고질적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오디게아 주민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만들었습니다. 귓병을 치료하는 약과 안약은 도시민을 위한 치료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차원에서 특별한 것으로 명성을 얻는데 까지 이르게 되어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의료도시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의사 갈렌에 의하면 이 도시에서 생산되어 귓병을 치료하는 약은 나드(Nard)향료를 혼합 조제하여 만든 것으로 라오디게아에서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콜로니온(Kolourion)이라고 불리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프리지아의 돌 가루 재료를 조제한 것이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가 유명한 의료 도시가 되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오디게아가 지리적으로 골짜기에 위치해 있음으로 두 줄기의 물이 흘러 내려오는데 하나는 히에라볼리에서부터 내려오는 온천수이고 또 하나는 바바산(baba dag)에서부터 만년설이 녹아 내려오는 냉천수입니다. 각기 다른 성질의 물이 이곳에서 만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라오디게아에서 발견되는 동전에는 젱키스(Zeuxis)나 알렉산더 프라테티스(Alexander Phlathetes)와 같은 유명한 의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정도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목화 재배를 하고 있어 섬유공업으로 유명합니다. 역사가 스트라보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의 주요 산업은 양질의 흑양모 생산과 직조 그리고 염색업이었으며 목화의 생산지로도 유명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로마의 상원 의원들이 입고 다녔던 흰 옷들을 만들만큼 면직물 공업이 유명한 곳이었고, 흰 면 옷은 이 지방의 중요 특산품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즉 라오디게아의 산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즉 도시가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인한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2차 산업 즉 제조업을 발달시킨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가 도시를 찾아온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게하는 3차 산업 도시였다면 라오디게아는 제조업을 발달시켜 수출을 하는 자본과 기술을 가진 도시로서 부요함을 유지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가장 실속있게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아멘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항상 예하고 순종하셨습니다. 또 그는 충성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시되 죽기까지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참된 증인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서 참된 증인이 되십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창조의 주관자이시오 창조의 근본이 되십니다. 그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청지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이런 분으로 소개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말씀은 “아무도 너를 모른다. 사람들은 실제 이상으로 너를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너 자신도 너를 모르는구나. 너는 너의 행위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의 속 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한때는 열성적이고 건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면서 라오디게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분발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그 교회가 건전한 상태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교회가 타락하였고, 열성을 잃으면서 차가와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태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도 식어졌습니다. 전도와 섬김에 대해서도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지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도 식어버려서 미지근해져버렸습니다. 성경 공부에 대한 열망도 식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시간을 드리고 헌신하는 것을 보면 기뻤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시간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시간을 충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티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했습니다. 미지근하다는 말은 사실은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적당주의였습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하는 그들을 토하여 내 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병들게 되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아마도 그 교회의 훌륭한 사람들이 죽고 교회의 부요함으로 인해 세속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박해가 없어짐으로 안일해지고 기도에 태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돈 버는 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복음 역사에 적게 바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과 타협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전도하는 일과 다른 형제 자매를 섬기는 일에 신경을 꺼버렸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 눈먼 소경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절망스럽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영적인 실재가 어떠합니까?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자만감에 빠질수록 더욱 곤고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주십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예수님은 그들을 권하십니다. 이는 부드럽게 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근본이신 분으로서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지만 부드럽게 권하십니다.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마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요7:37절에서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십니다. 요6:35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고 하십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쉼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과 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께 접속해서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을 다운로드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방식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금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투쟁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만이 믿음을 심어 주시고 자라게 하시고 완전케 하십니다. 흰옷은 순결을 말합니다. 흰옷은 은혜로만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는 천국에서 흰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순결한 옷을 입습니다. 안약은 지혜입니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라고 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안경을 끼고 이 세상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바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소망 가운데, 영적인 성장을 하도록 훈련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가장 합당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불신자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 불신자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우리는 누가 문을 두드릴 때 일어나서 문을 열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마음 문을 닫고 있는 신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권세도 있고 힘도 있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부드럽게 말씀하시면서 두드리십니다. 저는 집에 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가끔가다 발로 문을 차면서 빨리 문을 열도록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로 문을 차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두드리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문을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시고 그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길은 한마디로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게 되는 것이요 그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재정 문제 속으로, 우리의 사업 속으로, 우리의 가정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적 상태가 뜨겁든지 차든지 해야지 미지근한 것은 싫어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적당히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면 하고, 안하면 안하는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온도를 높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하는 것들은 그 때뿐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과 교제를 갖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은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회개에 힘쓰는 가운데 예수님의 마음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지게 됩니다. 개인 개인이 주님과 올바르게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써만이 교회가 올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뜨거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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