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소아시아일곱교회5강(3:1-6)/ 사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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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 일곱 교회 제 5 강
말씀 / 요한계시록 3:1-6
요절 / 요한계시록 3:2a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사데 교회가 있는 지역은 상당히 인상적인 곳입니다. 기원전 13세기 경 사데 역사 초기에 이 도시는 오직 산봉우리만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수세기가 지난 후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산 기슭에 제 2의 도시가 형성되어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데 지역은 강에서 사금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금화를 주조한 곳이라고 합니다. 또한 양털의 염색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염직 공업이 흥하였고 크로소스 왕은 부귀영화의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는 물화가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유족하였음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했습니다. 사데교회가 있던 리디아 왕국은 난공 불락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군이 그곳으로 올라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다가 모자가 성벽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모자를 잃어버리면 체벌을 받게 되니 몰래 성벽을 타고 내려왔다가 모자를 찾아서 성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매복해 있던 적군이 그 길을 따라 성벽을 올라가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즉 리디아 왕국은 B.C. 546년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 패하고 멸망하자 헬레니즘 시대를 맞이했으며 알렉산더 사후 그의 장군 셀레우쿠스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비잔틴 제국 때 사데는 요한계시록의 7대 교회 중 하나에 속한 관계로 대교구가 설치되는 등 크게 번성하였으나 잦은 지진과 터키 및 몽고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습니다.
사데 교회를 찾아 가 보니 직경이 2m가 넘고 길이가 20m 이상 되는 원기둥 둘이 있는데 이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들이었다고 합니다. 복원해놓은 신전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데 그 규모가 웅대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데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한참 걸어 들어가니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르테미스 신전 끝에 마치 매표소인양 작은 건물이 보였습니다. 그게 바로 사데교회였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 전각의 맨 끝에 초라하게 붙여 지은 붉은 색의 건물이 바로 사데교회였습니다. 철조망이 쳐진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20여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신전 뒤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가 공인된 뒤에 이 큰 신전을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일곱 영으로 말한 것은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곧 그 영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주된 일은 내적인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을 확증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요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주관하십니다. 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과 말씀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말씀 역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말씀이 잘 살아날 때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과거의 명성만 주장한 채 현재는 생명을 상실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지로 사데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이단의 특별한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죽었다'는 표현은 종종 전통만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많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사데 교회는 화려한 과거가 있었고 외적인 형식과 모습은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모습은 상실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소망으로 인해서 안일하고 부패하여 스피릿이 죽어 있었습니다.
죽은 것은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죽어가는 것은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시들시들합니다. 나무도 죽어가는 나무는 잎이 노랗게 변하고 잎사귀들이 말라버립니다. 죽어가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데 교회는 겉으로는 활동이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외부 활동도 있었고 크기에 걸맞게 사회의 평판도 있었습니다. 성경공부, 예배, 선교 등등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으나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도 시큰둥했고 웃음도 별로 없었고 맥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평판과 실제 모습 사이에는 큰 갭이 있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라는 말씀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깨어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우리는 외부의 평가와 자신의 실제 모습 사이에 있는 갭으로 인해서 고통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동교 센타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센타라고 생각하고 저력이 있는 센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영상드라마 등을 만들어 매우 활발하게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내외부의 이러한 평가와 달리 우리의 실제 모습은 어떠합니까? 센타의 홀은 비어 있고 학생들이 부족해서 동아리 등록이 어려웠습니다. 목자와 양, 동역자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성이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UBF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고 성장한 목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활동을 하지 않고 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살았으나 죽었다는 말씀은 가장 통렬한 표현입니다.
이런 좌절 속에서 저는 한 가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변화와 성장의 계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좌절 속에서 우리는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망 가운데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쓸모없게 된 죄인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첫째, 주님은 먼저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영어로는 “Wake up!”입니다.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무지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자기 도취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죄의 잠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리디아 왕국이 멸망할 때 적군들이 성벽에 올라갔지만 군사들이 다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믿고 있었고 자기들의 힘과 재물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에 나온 여러 교회들을 책망하실 때 그들 안에 있는 니골라 당이라든가 사단의 위라든가, 이세벨 등을 거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고 있는 환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사단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세상 것에 취해서 영적인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둘째,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남아 있는 바 죽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아직 까지 살아 있는 그것을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타다 남은 그을린 나무에서 아직 타고 있는 불을 일으켜 다시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에 성령의 불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직 살아 있는 것, 남아 있는 그것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에 물을 주고 사랑을 주고 관심을 기울여 돌보는 가운데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양들과의 일대일 관계성이 죽어가지만 아직 살아 있는 관계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살려야 합니다. 남아 있는 죽게 된 요회 모임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남아 있는 은사를 사용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 남아 있는 바 죽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지금은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을 주고 기도해 주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살려야겠습니다. 죽어버리면 사랑도 시기도 미움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들이 살아나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번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를 통해서 캠퍼스에서 남은 자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소망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다가 우리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헌신한 종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희망의 역사를 보고 많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타락해도 소수의 남아 있는 자는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세상 소원으로 가득하지만 아직도 영적인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찾고 이들을 사랑하고 양육하여 영적인 거목들로 키워야 합니다. 바이블 아카데미 이후에 추수 감사제와 성탄 연합 예배를 준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말씀으로 충만해져야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을 통해서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가 받고 들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합니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405장).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회개케 하셨고 예수 믿게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의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됩니다. 지키라는 말씀은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받은 바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말씀을 받아도 맹숭맹숭하게 받으면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먼저 충격을 먹고 순종하여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회개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악된 생활 습관을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죽은 영혼을 깨우치고 살리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죽고자하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십자가, 기도의 십자가, 제자 양성의 십자가, 섬김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겠습니다.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살아납니다.
감사한 것은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서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타락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흰옷은 자신의 더럽혀지지 않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옷이며 그의 피로 죄를 씻음 받은 옷을 말합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장차 이들은 에녹처럼 주와 동행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 천사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음란과 탐욕, 타협과 안일로 그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더럽혀졌다 해도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아직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양들과 리더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떠들썩한 외적 모양이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변화된 삶,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판과 현실적인 나, 내가 소망하는 나와 현재적인 나 사이에 생기는 갭으로 인해서 좌절이 있지만 이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이기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계시록 3:1-6
요절 / 요한계시록 3:2a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사데 교회가 있는 지역은 상당히 인상적인 곳입니다. 기원전 13세기 경 사데 역사 초기에 이 도시는 오직 산봉우리만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수세기가 지난 후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산 기슭에 제 2의 도시가 형성되어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데 지역은 강에서 사금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금화를 주조한 곳이라고 합니다. 또한 양털의 염색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염직 공업이 흥하였고 크로소스 왕은 부귀영화의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는 물화가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유족하였음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했습니다. 사데교회가 있던 리디아 왕국은 난공 불락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군이 그곳으로 올라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다가 모자가 성벽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모자를 잃어버리면 체벌을 받게 되니 몰래 성벽을 타고 내려왔다가 모자를 찾아서 성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매복해 있던 적군이 그 길을 따라 성벽을 올라가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즉 리디아 왕국은 B.C. 546년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 패하고 멸망하자 헬레니즘 시대를 맞이했으며 알렉산더 사후 그의 장군 셀레우쿠스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비잔틴 제국 때 사데는 요한계시록의 7대 교회 중 하나에 속한 관계로 대교구가 설치되는 등 크게 번성하였으나 잦은 지진과 터키 및 몽고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습니다.
사데 교회를 찾아 가 보니 직경이 2m가 넘고 길이가 20m 이상 되는 원기둥 둘이 있는데 이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들이었다고 합니다. 복원해놓은 신전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데 그 규모가 웅대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데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한참 걸어 들어가니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르테미스 신전 끝에 마치 매표소인양 작은 건물이 보였습니다. 그게 바로 사데교회였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 전각의 맨 끝에 초라하게 붙여 지은 붉은 색의 건물이 바로 사데교회였습니다. 철조망이 쳐진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20여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신전 뒤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가 공인된 뒤에 이 큰 신전을 교회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일곱 영으로 말한 것은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곧 그 영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주된 일은 내적인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을 확증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요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주관하십니다. 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과 말씀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데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말씀 역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말씀이 잘 살아날 때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과거의 명성만 주장한 채 현재는 생명을 상실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지로 사데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이단의 특별한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죽었다'는 표현은 종종 전통만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많이 쓰여졌다고 합니다. 사데 교회는 화려한 과거가 있었고 외적인 형식과 모습은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모습은 상실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소망으로 인해서 안일하고 부패하여 스피릿이 죽어 있었습니다.
죽은 것은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죽어가는 것은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시들시들합니다. 나무도 죽어가는 나무는 잎이 노랗게 변하고 잎사귀들이 말라버립니다. 죽어가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데 교회는 겉으로는 활동이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외부 활동도 있었고 크기에 걸맞게 사회의 평판도 있었습니다. 성경공부, 예배, 선교 등등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으나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도 시큰둥했고 웃음도 별로 없었고 맥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평판과 실제 모습 사이에는 큰 갭이 있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라는 말씀은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깨어나게 합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우리는 외부의 평가와 자신의 실제 모습 사이에 있는 갭으로 인해서 고통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동교 센타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센타라고 생각하고 저력이 있는 센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영상드라마 등을 만들어 매우 활발하게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내외부의 이러한 평가와 달리 우리의 실제 모습은 어떠합니까? 센타의 홀은 비어 있고 학생들이 부족해서 동아리 등록이 어려웠습니다. 목자와 양, 동역자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성이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UBF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고 성장한 목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활동을 하지 않고 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살았으나 죽었다는 말씀은 가장 통렬한 표현입니다.
이런 좌절 속에서 저는 한 가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변화와 성장의 계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좌절 속에서 우리는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찾게 됩니다. 우리는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망 가운데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쓸모없게 된 죄인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첫째, 주님은 먼저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영어로는 “Wake up!”입니다.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무지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자기 도취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죄의 잠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잠에서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리디아 왕국이 멸망할 때 적군들이 성벽에 올라갔지만 군사들이 다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믿고 있었고 자기들의 힘과 재물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에 나온 여러 교회들을 책망하실 때 그들 안에 있는 니골라 당이라든가 사단의 위라든가, 이세벨 등을 거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고 있는 환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사단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세상 것에 취해서 영적인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둘째,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남아 있는 바 죽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아직 까지 살아 있는 그것을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타다 남은 그을린 나무에서 아직 타고 있는 불을 일으켜 다시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는 것처럼 마음에 성령의 불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직 살아 있는 것, 남아 있는 그것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에 물을 주고 사랑을 주고 관심을 기울여 돌보는 가운데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양들과의 일대일 관계성이 죽어가지만 아직 살아 있는 관계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살려야 합니다. 남아 있는 죽게 된 요회 모임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남아 있는 은사를 사용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 남아 있는 바 죽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지금은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을 주고 기도해 주고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살려야겠습니다. 죽어버리면 사랑도 시기도 미움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들이 살아나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번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를 통해서 캠퍼스에서 남은 자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소망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다가 우리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헌신한 종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희망의 역사를 보고 많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타락해도 소수의 남아 있는 자는 있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세상 소원으로 가득하지만 아직도 영적인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찾고 이들을 사랑하고 양육하여 영적인 거목들로 키워야 합니다. 바이블 아카데미 이후에 추수 감사제와 성탄 연합 예배를 준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말씀으로 충만해져야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을 통해서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내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가 받고 들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합니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405장).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회개케 하셨고 예수 믿게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의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됩니다. 지키라는 말씀은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받은 바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말씀을 받아도 맹숭맹숭하게 받으면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먼저 충격을 먹고 순종하여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회개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악된 생활 습관을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죽은 영혼을 깨우치고 살리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죽고자하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십자가, 기도의 십자가, 제자 양성의 십자가, 섬김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겠습니다.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살아납니다.
감사한 것은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서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타락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흰옷은 자신의 더럽혀지지 않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옷이며 그의 피로 죄를 씻음 받은 옷을 말합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장차 이들은 에녹처럼 주와 동행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 천사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음란과 탐욕, 타협과 안일로 그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더럽혀졌다 해도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아직 죽지 않고 남아 있는 양들과 리더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떠들썩한 외적 모양이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변화된 삶,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판과 현실적인 나, 내가 소망하는 나와 현재적인 나 사이에 생기는 갭으로 인해서 좌절이 있지만 이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이기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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