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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05고전8강(7:1-40)/ 없는 자 같이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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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721회 작성일 05-11-1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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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가을 고린도전서 8 강                                                       
말씀 / 고린도전서 7:1 - 40
요절 / 고린도전서 7:29

없는 자 같이 살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문의해 온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목자의 심정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바울은 결혼에 관한 몇 가지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닥칠 환난을 느끼고 있었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사나 육체의 욕심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결혼의 진리를 마음 깊이 영접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기본적인 결혼의 진리(1-7)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독신에 대해 편지로 문의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 시에는 극단적으로 방탕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강하게 반발해서 교회 내에는 아주 금욕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결혼을 죄악시하며, 결혼을 했더라도 성관계를 갖지 않고 살라고 했습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을 것인데 그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것입니다(딤전4:1-3). 요즈음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인 것처럼 교만을 떠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1,2).” 바울은 음행의 연고로 결혼을 하라고 명했습니다. 결혼의 목적 중에 하나는 죄에 대한 치료제로서 간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욕적인 삶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무척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무한정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도가 지나치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봇물처럼 터져 버립니다. 그래서 독신을 주장하다가 음행의 죄에 빠져서 더욱 비참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음행의 연고로 한 남자마다 한 여자를 두고, 한 여자마다 한 남자를 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쳤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남편은 그 아내에게 결혼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결혼한 부부는 서로가 자신의 몸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고,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싸움 좀 했다고 이불을 싸들고 딴 방으로 간다든지, 돌아누워 잔다든지 하면 오해가 증폭이 되기 쉽습니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부부 관계를 파괴하고자 합니다.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금식기도를 해야 할 때라든지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는 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합의해야 합니다. 합의상 분방했더라도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장기화되면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사단의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다가 사단에게 틈을 주지 말고 결혼하고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음란하고 패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결혼을 하고 몸과 마음의 순결을 지킬 것을 권면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 말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하든 안하든 하나님께 받은 은사대로 살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은 독신으로 사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와 복음을 위해 결혼 생활도 포기하고 전폭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제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11,12).”

Ⅱ 독신과 이혼에 관한 진리(8-24)

  바울은 일반적인 결혼의 진리를 말한 후 구체적으로 독신과 이혼에 관한 진리를 말씀합니다.

첫째, 독신에 관한 진리(8,9)
  혼인하지 아니한 자는 결혼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도 바울은 특히 과부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같이 그냥 지낼 것을 권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결혼을 했으나 아내를 잃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평생 독신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사실은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은 독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결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 살면서 개척 역사를 섬기고, 세계 선교 역사를 섬기고자 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독신주의자들이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독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실현, 자기성취를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고 일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성적 욕구는 몇 사람을 두고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 이혼에 관한 진리(10-16)
  바울은 이제 혼인한 자들에게 명합니다. 명하는 자는 바울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그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는 남편과 아내 둘 다 신자인 경우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으로 이혼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2)”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절대로 이혼할 수 없습니다. 만약 별거하더라도 혼자 살든지 다시 화합해야 합니다. 이혼이란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죄악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부정하는 큰 죄악입니다. 결혼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한 몸을 나누는 것처럼 두 사람에게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또 어린 자녀들에게 가슴을 찢는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이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 2:16절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혼 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결코 이혼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한 남자는 아내가 너무 싫어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어서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결혼 상담소를 찾아가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자는 이러이러하다며 그런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결혼 상담소의 직원이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3만명의 여성 가운데 그의 이상형과 가장 맞는 한 여성을 골라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장 잘 맞는 여성입니다.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장 합당한 배필이니 사귀어보도록 하시오.’ 그런데 사진을 보니, 얼마 전에 이혼한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는 아내가 싫어서 이혼했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그 아내가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이상적인 아내였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폴 투루에니가 말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란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니다.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을 가진 가정이다.”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나지 않는 가정은 없습니다. 문제 없는 가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를 극복하며 나아가 이기는 것이 가정의 매력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러면 안 믿는 아내나 남편이 이혼을 요구해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제 믿는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을 경우에 대해서 말합니다. 믿는 아내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핍박을 하는 것은 함께 살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지만 남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안 믿는 남편이 아내의 감동적인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거룩하게 된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 아내나 남편이 함께 살기를 원치 않고 이혼하기로 결정하였으면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모로든 결혼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쪽은 반드시 믿지 않는 배우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화합하지 못하는 근거는 그리스도인 배우자의 믿음 때문입니다. 성경은 음행한 경우와 그리스도인 배우자가 믿음이 없어서 이혼을 요구할 경우에 이혼을 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로 인해서 두 사람이 불평등한 멍에를 메고 계속 안달하는 것보다 주님의 평강을 아는 것이 더 절대적인 우선 순위를 갖습니다. 믿는 여성이 심하게 핍박을 받고 인권이 무너질 정도라면 그들로 갈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15). 그러므로 가능한 한 화평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아내 된 자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가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동역자를 끝까지 품고 사랑으로 섬겨야합니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해야 합니다.

  바울은 결혼과 독신에 관한 진리를 여러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이런 권고 속에서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 바울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17). 18-24절은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입니다. 또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그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유 할 수 있다면  차라리 사용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신자들은 그로 인해서 자의식을 느끼고 어찌하든지 할례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한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당시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노예들은 ‘말하는 당나귀’ 취급을 받았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노예 출신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의식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안에서는 종이라도 자유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자유를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유자들은 주님 안에서 겸손히 종이 되어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직업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 다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현재 내가 있는 곳에서, 나에게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Ⅲ. 미혼 남녀의 결혼에 관한 진리(25-40)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처녀 딸을 가진 부모가 자기 딸을 결혼시켜야 할 것인지, 그냥 지내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처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말하고 개인적인 의견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의 자비하심을 받은 자로서 권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세 가지 의견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자기 생각으로는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26). 여기에서 임박한 환난이란 당시 고린도에 위급한 대 박해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주의 재림에 따르는 심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재림이 가까울 때 극심한 환난이 따를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19-22). 그러므로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혼자 있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매였으면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젊은 과부가 되었으면 안나와 같이 그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안나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지만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성전에 나와서 주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목회를 해 가면서 젊은 과부가 정욕으로 인해서 넘어지고 주님을 배반하는 것을 보고서 나중에는 생각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쓴 편지인 디모데전서에서는 젊은 과부는 정욕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보다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림으로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딤전5:14).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난이 다가오는 때에 결혼을 하면 육신에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아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29-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입니다. 결혼이라든지, 사업이라든지,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은 다 지나가는 형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고 파는 일, 세상 물건 쓰는 일, 울고 웃고 하는 일,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일 등 결국 다 지나가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에 얽매여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물질도 필요하고 여러 인간 관계도 필요합니다. 쇼핑도 해야 하고, 세상 물건도 써야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사업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요일 2:15-17절은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입니다.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합니다(32-34). 바울은 주님에 대한 흐트러지지 않는 헌신을 강조합니다. 3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처녀 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기를 원합니까? 36절을 보십시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당시 사회에서 딸의 결혼은 부모들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딸의 결혼에 대한 아버지의 결정권이 컸습니다(고후11:2). 부모가 생각하는 것이 처녀로 살게 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는 결혼을 시켜야 합니다. 또 혼기도 지나고 처녀 본인이나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결혼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는 처녀 딸을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38).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금욕주의자들처럼 죄악시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혼을 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또한 결혼한 사람들도 남편과 아내에게 얽매이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가정 생활도 행복하고 만족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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