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두아디라 교회(계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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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 일곱 교회 제 4 강
말씀 / 요한계시록 2:18-29
요절 / 요한계시록 2:19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내가 네 사업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아란 ‘두아의 성읍’이란 뜻입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의 신하였던 셀레우쿠스가 자기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 땅에는 기원전 3세기 초에 주로 마케도니아인들과 유대인들이 강제 이주하여 살았고, 기원전 190년에 버가모 왕조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로마에 예속되었습니다. 로마는 로마의 행정도시인 버가모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을 요새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이고 사데까지는 약 6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서 군사적인 전략기지로서는 부족합한 곳이었습니다. 천연적인 요새나 골짜기,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를 위한 지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곳이어서 훌륭한 도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는 이곳에 강한 수비대를 두게 하였습니다. 베르론 폴린이는 “두아디라의 역사는 파수꾼 성읍의 역사였기에 도시의 운명은 자주 파괴되고 건설되어져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두아디라의 역사와 교회를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합니다.
로마는 문화의 보급지로 혹은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강화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시 자체를 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아무런 지리적인 방어 여건을 갖추고 있기 않았기 때문에 두아디라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입장이 되어버리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시민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단결하도록 하는 동기부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유대인들은 지역적인 약점을 고려하여 자기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생업을 위해 직업 단위로 뭉쳐지고 결국 최초의 길드조직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석으로 군인들의 필요를 만드는 산업이 번성하게 되고, 면직, 모직, 가죽, 빵 제조업, 노예 매매, 질그릇 등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길드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두아디라에서는 꼭두서니라 하는 식물의 뿌리에서 얻는 붉은 색으로 염색을 하여 당지 귀한 붉은 천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호모의 일리아드에는 “두아디라 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주천이 생산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장사인 루디아란 여자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행16:14). 루디아 여인의 고향은 바로 이 두아디라였습니다. “루디아”란 이름은 두아디라 시에 속하는 루디아 주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두아디라에서도 루디아 주의 여자들이 염색하는 기술이 단연 뛰어났다고 합니다. 자주색 옷감은 제일 비싼 것으로, 자주색 자체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색 옷은 귀족들이 입었고 흰색은 원로원 회원들이 입었습니다. 자주색 옷을 만들기 위해서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많이 잡히는 소라나 고동에서 원료를 취하는데 바다가 없는 두아디라에서는 도시 주변에서 나는 ‘꼭두서니’라는 나무 뿌리에서 원료를 취하여 자주색 천을 제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이 얼마나 날카로운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도 아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용납한 죄악에 대해서도 통찰하시면서 주석과 같은 발로 심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시되 잘 한 점뿐만 아니라 고쳐야 할 점도 아십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잘한 점이 있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형제들끼리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며 인내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진실한 신자들이었고 처음부터 꾸준히 주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버렸지만 그들은 처음보다 더욱 열심히 주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들은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숫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 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의 배경에서 살펴본 대로 두아디라 성은 살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길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크리스챤들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길드 조직에 가입하여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업이 다 그러하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많이 내려면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하고 회식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술도 마시고 향락적인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성적인 매매가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크리스챤들은 구원받은 자답게 행동해야 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다보면 그런 것들을 고려할 만큼 마음을 여유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문화적인 압박감을 느끼면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인 비도덕성과 더욱 타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사회적, 문화적인 압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교회의 뿌리가 이러한 문화적인 압력으로 인해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성도덕에 대한 기준들이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혼율과 교회의 이혼율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아담과 이브로 구성된 가정이 이제는 아담과 갑돌이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가 상대적으로 변화되고, 인본주의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도 잘못된 자를 용납하는 것이었습니다. 용납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용납이란 남의 말이나 행동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편안하게 되려면 무엇인가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나쁜 관계, 나쁜 윤리, 나쁜 도덕, 나쁜 신학 등등입니다. 우리가 용납하기 시작하면 공동체에 누룩과 같이 퍼져서 전체를 부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습니다. 그녀는 주의 종들을 꾀어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은 잘못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경을 위험하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통 계시를 주장합니다. 기록된 성경을 벗어나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권위를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들은 권위가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권위를 강탈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나는 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깊은 말씀의 세계를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더 깊은 내용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깊은 진리라는 것들은 말짱 다 헛것입니다.
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여자는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음란을 말할 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영적 음란이라고 표현합니다. 골로새서에서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숭배하고 쾌락을 찬양하고 순종하기보다 변론하고, 저항을 부추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 분위기에 따라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 여자는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은 그 기회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과 부도덕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였을 것입니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은 죄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 34은 말씀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를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에게 징벌을 선언하셨습니다. 첫번째 징계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킬 것입니다. 두 번째 징계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징계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은 음란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랐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 죄로 인해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입니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십니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모든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깊은 지식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 합니다. 사실 자유주의 신학은 바로 이런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성경을 벗어나서 추구되다 보니 학문의 영역에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해보았다니 안되더라고 말하고 성경으로 돌아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교회들이 왜 자신들은 성장하지 않고 보수적인 교회들이 성장하는 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보수적인 교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실험하기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믿습니다. 오늘날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복음 신앙과 의와 선과 진실을 보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26-29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의 권세입니다. 요한계시록 12:5에는 예수님 자신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권세를 주께서는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또 주께서 약속하신 새벽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계 22:16).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끝까지 가짐으로써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뒤로 물러나는 자가 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는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의 악을 용납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작은 악의 포용은 우리를 부패시키고 우리 교회를 부패시키고 나아가 만국 교회를 부패시킵니다. 그러므로 악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진리와 관용의 균형을 이룸으로 가능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서 있어야만 하는 곳과 서 있기를 원하는 곳 즉 삶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할까요?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어떤 일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크리스챤들은 영화를 보러 가야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할로윈데이를 축하 해야만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춤을 추어야만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수도승과 같이 되라는 유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동시에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중 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토굴에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재빠르게 붙잡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우리는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균형을 잃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관용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은 재미가 없는 믿음입니다. 웃음이 없는 영혼들입니다. 즐거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지만 미움을 샀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엄격한 기준으로 주위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측정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관점을 갖게 되면 외식하게 됩니다. 사람이 규칙을 엄수하는 사람이요 영적인 목록들을 만드는 자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않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겉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율법주의로 인해서 질식하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국립묘지에 가보면 아주 인상적입니다. 잘 깎여진 잔디와 비석들이 대각선으로 앞줄과 옆줄이 딱 맞게 줄을 맞추어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희미한 빛이 있습니다. 그들은 완벽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어디든지 먼지 쓰레기 하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아왔던 어떤 장소보다도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를 그것을 보고 거의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없이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을 보고 죽은 사람의 뼈가 가득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는 멋있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화를 내는 설교자들과 화가 난 회중들과 함께 교회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이 좌절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사랑과 행복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불균형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관용입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입니다. 이것은 어떤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 위치에 있는 문제는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죄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느끼는 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이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는 진리를 타협적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셔,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것으로 행복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저런 방식으로 살거야.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실거야. 그것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오늘은 아니냐.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 나는 이전보다 더 깊은 것을 알아. 그게 뭐 대수야.” 어던 사람들은 너무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생각없이 행동합니다.
관용과 자유주의와 타협하는 문제는 작게 시작하지만 곧 점점 더 멀리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편협하고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시킵니다. 곧 우리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로부터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관용을 가진 진리. 그것이 균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 여자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관용없는 진리를 대표합니다. 여자는 또 다른 한 쪽을 대표합니다. 자유주의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균형을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지 않고 긍휼의 마음으로 이 여인의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는 그녀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셨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 요1:14절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7절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이 균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내가 서 있어야 할 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은혜와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우리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1. 이것은 성경에 따르면 중요한 문제인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이제까지 행해왔던 다른 기준으로 볼 우 있는가? 내가 생각한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그것은 여론에 기초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겉핥기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변덕스럽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어떤 문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도 있고 아예 다루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많이 다루고 있고 어떤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전에 들어왔던 원칙이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 것이 있습니다. 소수의 문제들은 다양합니다. 모든 문제를 사랑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2.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로마서 14:5에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의심하면서 행하면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의심하고 먹으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확신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깨끗합니다.
3. 나의 결정이 어린 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결정이 어린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거나 담대히 죄를 짓게 만드는 악영향을 준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14:13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롬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원칙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섬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섬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4. 이것은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가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 행동, 태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리의 노력이나 선행과 관계없이우리에게 완전한 용서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5. 나의 영적인 역할 모델은 무엇인가? 다른 목자님이나 사람들에게 나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공동체 앞에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회색지대에 서 있습니다.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 모델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총체적으로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같이 나를 본 받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원칙은 성숙한 목자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요동하지 말고 성경에 밝히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켜야겠습니다.
말씀 / 요한계시록 2:18-29
요절 / 요한계시록 2:19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내가 네 사업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아란 ‘두아의 성읍’이란 뜻입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의 신하였던 셀레우쿠스가 자기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 땅에는 기원전 3세기 초에 주로 마케도니아인들과 유대인들이 강제 이주하여 살았고, 기원전 190년에 버가모 왕조에 의해 다스려지다가 로마에 예속되었습니다. 로마는 로마의 행정도시인 버가모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을 요새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이고 사데까지는 약 6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서 군사적인 전략기지로서는 부족합한 곳이었습니다. 천연적인 요새나 골짜기,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를 위한 지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곳이어서 훌륭한 도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는 이곳에 강한 수비대를 두게 하였습니다. 베르론 폴린이는 “두아디라의 역사는 파수꾼 성읍의 역사였기에 도시의 운명은 자주 파괴되고 건설되어져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두아디라의 역사와 교회를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합니다.
로마는 문화의 보급지로 혹은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강화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시 자체를 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아무런 지리적인 방어 여건을 갖추고 있기 않았기 때문에 두아디라는 전쟁이 있을 때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입장이 되어버리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시민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단결하도록 하는 동기부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유대인들은 지역적인 약점을 고려하여 자기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생업을 위해 직업 단위로 뭉쳐지고 결국 최초의 길드조직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석으로 군인들의 필요를 만드는 산업이 번성하게 되고, 면직, 모직, 가죽, 빵 제조업, 노예 매매, 질그릇 등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길드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두아디라에서는 꼭두서니라 하는 식물의 뿌리에서 얻는 붉은 색으로 염색을 하여 당지 귀한 붉은 천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호모의 일리아드에는 “두아디라 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주천이 생산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장사인 루디아란 여자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행16:14). 루디아 여인의 고향은 바로 이 두아디라였습니다. “루디아”란 이름은 두아디라 시에 속하는 루디아 주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두아디라에서도 루디아 주의 여자들이 염색하는 기술이 단연 뛰어났다고 합니다. 자주색 옷감은 제일 비싼 것으로, 자주색 자체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색 옷은 귀족들이 입었고 흰색은 원로원 회원들이 입었습니다. 자주색 옷을 만들기 위해서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많이 잡히는 소라나 고동에서 원료를 취하는데 바다가 없는 두아디라에서는 도시 주변에서 나는 ‘꼭두서니’라는 나무 뿌리에서 원료를 취하여 자주색 천을 제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배경 가운데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이 얼마나 날카로운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폐부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도 아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용납한 죄악에 대해서도 통찰하시면서 주석과 같은 발로 심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시되 잘 한 점뿐만 아니라 고쳐야 할 점도 아십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잘한 점이 있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였고 형제들끼리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며 인내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진실한 신자들이었고 처음부터 꾸준히 주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버렸지만 그들은 처음보다 더욱 열심히 주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들은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숫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 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의 배경에서 살펴본 대로 두아디라 성은 살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길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크리스챤들도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길드 조직에 가입하여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업이 다 그러하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많이 내려면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하고 회식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술도 마시고 향락적인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성적인 매매가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크리스챤들은 구원받은 자답게 행동해야 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다보면 그런 것들을 고려할 만큼 마음을 여유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문화적인 압박감을 느끼면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인 비도덕성과 더욱 타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사회적, 문화적인 압력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교회의 뿌리가 이러한 문화적인 압력으로 인해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성도덕에 대한 기준들이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혼율과 교회의 이혼율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아담과 이브로 구성된 가정이 이제는 아담과 갑돌이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리가 상대적으로 변화되고, 인본주의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도 잘못된 자를 용납하는 것이었습니다. 용납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용납이란 남의 말이나 행동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편안하게 되려면 무엇인가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나쁜 관계, 나쁜 윤리, 나쁜 도덕, 나쁜 신학 등등입니다. 우리가 용납하기 시작하면 공동체에 누룩과 같이 퍼져서 전체를 부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습니다. 그녀는 주의 종들을 꾀어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경은 잘못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경을 위험하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통 계시를 주장합니다. 기록된 성경을 벗어나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권위를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들은 권위가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권위를 강탈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나는 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깊은 말씀의 세계를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더 깊은 내용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깊은 진리라는 것들은 말짱 다 헛것입니다.
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여자는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음란을 말할 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영적 음란이라고 표현합니다. 골로새서에서 탐심을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숭배하고 쾌락을 찬양하고 순종하기보다 변론하고, 저항을 부추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 분위기에 따라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 여자는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은 그 기회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과 부도덕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였을 것입니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은 죄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 34은 말씀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를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에게 징벌을 선언하셨습니다. 첫번째 징계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킬 것입니다. 두 번째 징계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징계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은 음란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랐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 죄로 인해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입니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십니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모든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깊은 지식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 합니다. 사실 자유주의 신학은 바로 이런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성경을 벗어나서 추구되다 보니 학문의 영역에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해보았다니 안되더라고 말하고 성경으로 돌아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교회들이 왜 자신들은 성장하지 않고 보수적인 교회들이 성장하는 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보수적인 교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실험하기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믿습니다. 오늘날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복음 신앙과 의와 선과 진실을 보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26-29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의 권세입니다. 요한계시록 12:5에는 예수님 자신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권세를 주께서는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또 주께서 약속하신 새벽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계 22:16).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끝까지 가짐으로써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뒤로 물러나는 자가 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는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의 악을 용납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작은 악의 포용은 우리를 부패시키고 우리 교회를 부패시키고 나아가 만국 교회를 부패시킵니다. 그러므로 악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진리와 관용의 균형을 이룸으로 가능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서 있어야만 하는 곳과 서 있기를 원하는 곳 즉 삶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할까요?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어떤 일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크리스챤들은 영화를 보러 가야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할로윈데이를 축하 해야만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춤을 추어야만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수도승과 같이 되라는 유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동시에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중 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토굴에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재빠르게 붙잡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우리는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균형을 잃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관용이 없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은 재미가 없는 믿음입니다. 웃음이 없는 영혼들입니다. 즐거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지만 미움을 샀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엄격한 기준으로 주위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측정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관점을 갖게 되면 외식하게 됩니다. 사람이 규칙을 엄수하는 사람이요 영적인 목록들을 만드는 자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않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겉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율법주의로 인해서 질식하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국립묘지에 가보면 아주 인상적입니다. 잘 깎여진 잔디와 비석들이 대각선으로 앞줄과 옆줄이 딱 맞게 줄을 맞추어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희미한 빛이 있습니다. 그들은 완벽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어디든지 먼지 쓰레기 하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아왔던 어떤 장소보다도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를 그것을 보고 거의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없이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을 보고 죽은 사람의 뼈가 가득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는 멋있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화를 내는 설교자들과 화가 난 회중들과 함께 교회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이 좌절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사랑과 행복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불균형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없는 관용입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입니다. 이것은 어떤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 위치에 있는 문제는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죄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느끼는 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이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는 진리를 타협적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셔,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것으로 행복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저런 방식으로 살거야.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실거야. 그것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되지만 오늘은 아니냐.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 나는 이전보다 더 깊은 것을 알아. 그게 뭐 대수야.” 어던 사람들은 너무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생각없이 행동합니다.
관용과 자유주의와 타협하는 문제는 작게 시작하지만 곧 점점 더 멀리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편협하고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시킵니다. 곧 우리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로부터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관용을 가진 진리. 그것이 균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 여자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관용없는 진리를 대표합니다. 여자는 또 다른 한 쪽을 대표합니다. 자유주의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균형을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지 않고 긍휼의 마음으로 이 여인의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는 그녀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셨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 요1:14절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7절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러면 우리가 이 균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내가 서 있어야 할 때를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은혜와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우리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1. 이것은 성경에 따르면 중요한 문제인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이제까지 행해왔던 다른 기준으로 볼 우 있는가? 내가 생각한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그것은 여론에 기초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겉핥기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변덕스럽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습니다. 어떤 문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도 있고 아예 다루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많이 다루고 있고 어떤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전에 들어왔던 원칙이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 안에서 하나로 통일된 것이 있습니다. 소수의 문제들은 다양합니다. 모든 문제를 사랑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2.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로마서 14:5에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의심하면서 행하면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의심하고 먹으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확신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깨끗합니다.
3. 나의 결정이 어린 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결정이 어린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거나 담대히 죄를 짓게 만드는 악영향을 준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14:13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롬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원칙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섬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섬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4. 이것은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가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 행동, 태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리의 노력이나 선행과 관계없이우리에게 완전한 용서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나의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나의 행동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5. 나의 영적인 역할 모델은 무엇인가? 다른 목자님이나 사람들에게 나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공동체 앞에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회색지대에 서 있습니다. 정말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 모델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총체적으로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같이 나를 본 받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원칙은 성숙한 목자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요동하지 말고 성경에 밝히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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