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05고전6강(5:1-13)/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05년 가을 고린도전서 제 6 강
말씀; 고린도전서 5:1 - 13
요절; 고린도전서 5:7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는 영지주의의 누룩이 퍼져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방탕한 분파’와 ‘금욕적인 분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스스로 방탕에 빠짐으로써 육체라는 ‘감옥’에서 도피하고자 하였다면, 골로새 교회는 육체를 벌하거나 엄하게 제약함으로써 육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까지에서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인본주의와 교만의 죄악을 지적하고 깊이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음란한 영향을 받고 교회 내에서 조차 괴악한 음행의 죄를 짓고도 교만해져 문제의식이 없는 고린도 성도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를 기억하고 악한 누룩을 제거하도록 말씀합니다. 저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 안에 있는 묵은 누룩, 악독한 누룩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며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묵상하고 붙드는 시간되길 기도합니다.
첫째, 죄를 통한히 여기라(1,2).
“이 죄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방관하지도 않으며 죄를 허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교회를 무력하게 하고 복음 사역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먼저 죄를 통한히 여겨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음행이란 부부 이외의 사람과 부도덕한 성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여 음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입니다. 아비의 아내란 후처이거나 첩을 말합니다. 그는 젊은 계모와 함께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재산이 계모에게 가니까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계모와 부부관계를 맺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계모에 대해서는 정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계모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죄는 이방 민족의 법에서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런 자를 저주하고, 둘 다 반드시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신27:20, 레20:11).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사형시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자를 마땅히 하나님 편에서 책망하고 철저히 회개시키고 관계를 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통한히 여긴다는 말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말로서 어떤 사람이 느끼는 가장 깊고도 애절한 슬픔을 뜻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교회 내에 만연된 죄들을 애통하기는커녕 지극히 ‘관용적’이 되어서 음행하는 자들까지도 버젓한 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했습니다. 작은 죄가 끼치게 될 영향력에 대해서 과소평가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도 모르고 가증스러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형제의 범죄를 인하여 슬퍼하고 뼈아프게 회개했어야합니다. 범죄한 형제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공동책임을 지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또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새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면 교제를 끊고 출교를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영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교만해지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죄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고, 자기의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결국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자를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당시 음란 문제가 너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교회가 물량주의로 흐르다 보니 교회의 도덕 수준이 낮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수용하려다 보니 회개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값싼 은혜를 전파하기 때문에 간음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죄짓기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간음죄를 폐지하고자 합니다. 이제 음란의 문제는 더욱 확산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한 사람이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면 다른 성도들도 악영향을 받게 되고 공동체 전체가 죄의식이 희박해집니다. 죄에 대해서 공동체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나로부터 회개를 시작하여 교회가 죄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심판하라(3-5).
바울은 이 일 행한 자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몸은 떠나 있었으나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으며 이미 그를 판단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출교시키고 교회에서 완전히 끊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자를 사단에게 내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는 범죄자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교회에서 쫓겨나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보내는 출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끊어지는 아픔과 사단의 권세 아래 당하는 많은 고통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를 징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그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가 범죄하거든 일대일로 만나서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마18:15-17).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절차를 다 밟았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그를 내어 쫓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이 씻으라(6-13).
이런 자를 징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속에 들어온 누룩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내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하고 인생을 병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죄는 처음에는 교회 안에 있는 이웃을 감염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갈 5:9).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인 누룩이 작아보였기에 자만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작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가 너무나 음란하고 퇴폐 향락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조그만 허점만 생겨도 음란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 들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온갖 음란한 문화에 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긴장을 풀고 방심하면 인터넷을 통한 음란 문화 속에 빠져 들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막8:15). 헤롯의 누룩이란 음란한 정욕의 누룩을 말합니다. 헤롯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런 정욕의 누룩에 물들게 되면 스피릿을 잃게 되고, 사람이 누렇게 떠 버립니다. 정욕의 누룩을 방치하면 삽시간에 온 교회가 망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영지주의의 누룩으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 진리의 일부를 취하고, 대중 문화에서 일부를 취하여 샤머니즘과 같은 혼합종교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직통 계시, 지역을 주관하는 귀신, 가계에 흐르는 저주, 쇼엔터테인먼트적인 집회, 부와 번영의 복음, 적극적 사고 방식의 복음 등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장에는 성장을 이루고 병들을 치료를 하고 부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서 인본주의 신앙 형태로 발전해 간다는 것입니다. 복음 진리를 변질시키고 미신적인 형태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가졌던 죄악된 습관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태산 같은 욕심, 형제들을 꼬셔서 즐기고 병들게 하던 악한 정욕, 교만과 이기심,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맛을 잃어버리는 자기 영광, 자기만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 게으름과 무책임, 윗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살던 묵은 누룩, 예배 시간에 늦는 누룩, 예배 시간에 조는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왜 버려야 합니까? 우리는 본래 누룩 있는 자인데 이제 예수님의 보혈로 누룩없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죄악된 습관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피 값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누룩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사실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덧입어야합니다(롬3:24,25). 말씀을 따라 삼가야 합니다(시119:9).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갈5:16).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대로 거룩한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 모양의 죄의 누룩 가운데 고통하며 파멸해 가는 양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유월절 잔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월절 잔치는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 계속됩니다. 신앙생활은 잔치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 잔치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모임이 누룩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덩어리가 됩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각자의 삶이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날마다 영적인 잔치를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통해서 참된 기쁨과 신령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영접하고 말씀을 통해서 바른 진리를 배워야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 보내기 전에 이미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세상에는 음행하는 자들이 천진데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에게 이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즉 세상과의 분리나 은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과의 타협과 동화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분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니이다”(요 17: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분리는 음행하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타락한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본을 보이는 자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의 포기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온갖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악을 미워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뒷절에 나열된 세상의 추악한 모습은 음행이나 탐심이나 토색이나 우상숭배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행악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한 자,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엡 2: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그 자신의 권세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하는 전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결과는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단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승리, 의로움, 진리, 복음, 구원을 입혀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극단적인 사람들은 사막에 들어가서 수도원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도 빛과 소금이 되어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세상이 타락할수록 사람들의 영적인 목마름은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일대일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영혼의 생수를 마시도록 복음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사귀지 말라는 것은 형제라 일컫는 자 곧 신자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가 음행하거나 물질에 대해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술 취하거나 욕을 퍼붓거나 하거든 일대일로 만나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개를 촉구하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두 세 사람이 다시 가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지만 교인들은 교회가 징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가 범죄자를 판단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인 개인이 성도의 행위를 판단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훈계하고 권징하는 일을 교회적 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판단의 권위와 진실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할 때 더욱 명백해 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적으로 아비의 아내와 동거하는 자를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합니다. 고린도후서 2:1-11절에 보면 범죄자가 이런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징계는 선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교회가 권징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기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징계만 정당하게 시행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잘못을 범한 신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건강한 교회를 만들 수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열매를 맺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개인적으로 아픔이 있지만 사랑으로 징계하여 이 교회를 순전하고 진실한 새 덩이로 만들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고린도전서 5:1 - 13
요절; 고린도전서 5:7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린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는 영지주의의 누룩이 퍼져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방탕한 분파’와 ‘금욕적인 분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스스로 방탕에 빠짐으로써 육체라는 ‘감옥’에서 도피하고자 하였다면, 골로새 교회는 육체를 벌하거나 엄하게 제약함으로써 육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까지에서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인본주의와 교만의 죄악을 지적하고 깊이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음란한 영향을 받고 교회 내에서 조차 괴악한 음행의 죄를 짓고도 교만해져 문제의식이 없는 고린도 성도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를 기억하고 악한 누룩을 제거하도록 말씀합니다. 저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 안에 있는 묵은 누룩, 악독한 누룩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며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묵상하고 붙드는 시간되길 기도합니다.
첫째, 죄를 통한히 여기라(1,2).
“이 죄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방관하지도 않으며 죄를 허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교회를 무력하게 하고 복음 사역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먼저 죄를 통한히 여겨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음행이란 부부 이외의 사람과 부도덕한 성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여 음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입니다. 아비의 아내란 후처이거나 첩을 말합니다. 그는 젊은 계모와 함께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재산이 계모에게 가니까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계모와 부부관계를 맺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계모에 대해서는 정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계모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죄는 이방 민족의 법에서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런 자를 저주하고, 둘 다 반드시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신27:20, 레20:11).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사형시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자를 마땅히 하나님 편에서 책망하고 철저히 회개시키고 관계를 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통한히 여긴다는 말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말로서 어떤 사람이 느끼는 가장 깊고도 애절한 슬픔을 뜻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교회 내에 만연된 죄들을 애통하기는커녕 지극히 ‘관용적’이 되어서 음행하는 자들까지도 버젓한 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했습니다. 작은 죄가 끼치게 될 영향력에 대해서 과소평가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도 모르고 가증스러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형제의 범죄를 인하여 슬퍼하고 뼈아프게 회개했어야합니다. 범죄한 형제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공동책임을 지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또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새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면 교제를 끊고 출교를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영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교만해지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죄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고, 자기의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결국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자를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당시 음란 문제가 너무 보편화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교회가 물량주의로 흐르다 보니 교회의 도덕 수준이 낮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서 수용하려다 보니 회개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값싼 은혜를 전파하기 때문에 간음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죄짓기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간음죄를 폐지하고자 합니다. 이제 음란의 문제는 더욱 확산될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한 사람이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면 다른 성도들도 악영향을 받게 되고 공동체 전체가 죄의식이 희박해집니다. 죄에 대해서 공동체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나로부터 회개를 시작하여 교회가 죄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 죄를 심판하라(3-5).
바울은 이 일 행한 자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몸은 떠나 있었으나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으며 이미 그를 판단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출교시키고 교회에서 완전히 끊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자를 사단에게 내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는 범죄자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교회에서 쫓겨나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보내는 출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끊어지는 아픔과 사단의 권세 아래 당하는 많은 고통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를 징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그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가 범죄하거든 일대일로 만나서 권고하고,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마18:15-17).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절차를 다 밟았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그를 내어 쫓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이 씻으라(6-13).
이런 자를 징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룩은 아주 작은 미량의 효소로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반죽 덩어리를 발효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력은 더욱 왕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속에 들어온 누룩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내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하고 인생을 병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죄는 처음에는 교회 안에 있는 이웃을 감염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갈 5:9).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은사에 비하여 악의 요소인 누룩이 작아보였기에 자만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닥친 위협은 결코 작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가 너무나 음란하고 퇴폐 향락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조그만 허점만 생겨도 음란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 들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온갖 음란한 문화에 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긴장을 풀고 방심하면 인터넷을 통한 음란 문화 속에 빠져 들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막8:15). 헤롯의 누룩이란 음란한 정욕의 누룩을 말합니다. 헤롯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런 정욕의 누룩에 물들게 되면 스피릿을 잃게 되고, 사람이 누렇게 떠 버립니다. 정욕의 누룩을 방치하면 삽시간에 온 교회가 망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영지주의의 누룩으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 진리의 일부를 취하고, 대중 문화에서 일부를 취하여 샤머니즘과 같은 혼합종교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직통 계시, 지역을 주관하는 귀신, 가계에 흐르는 저주, 쇼엔터테인먼트적인 집회, 부와 번영의 복음, 적극적 사고 방식의 복음 등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장에는 성장을 이루고 병들을 치료를 하고 부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서 인본주의 신앙 형태로 발전해 간다는 것입니다. 복음 진리를 변질시키고 미신적인 형태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가졌던 죄악된 습관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태산 같은 욕심, 형제들을 꼬셔서 즐기고 병들게 하던 악한 정욕, 교만과 이기심,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맛을 잃어버리는 자기 영광, 자기만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 게으름과 무책임, 윗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살던 묵은 누룩, 예배 시간에 늦는 누룩, 예배 시간에 조는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왜 버려야 합니까? 우리는 본래 누룩 있는 자인데 이제 예수님의 보혈로 누룩없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죄악된 습관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피 값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누룩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사실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덧입어야합니다(롬3:24,25). 말씀을 따라 삼가야 합니다(시119:9).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갈5:16).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대로 거룩한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 모양의 죄의 누룩 가운데 고통하며 파멸해 가는 양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유월절 잔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월절 잔치는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 계속됩니다. 신앙생활은 잔치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 잔치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모임이 누룩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덩어리가 됩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각자의 삶이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날마다 영적인 잔치를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교제를 통해서 참된 기쁨과 신령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영접하고 말씀을 통해서 바른 진리를 배워야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 보내기 전에 이미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세상에는 음행하는 자들이 천진데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에게 이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즉 세상과의 분리나 은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과의 타협과 동화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분별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니이다”(요 17: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분리는 음행하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타락한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본을 보이는 자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의 포기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온갖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악을 미워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뒷절에 나열된 세상의 추악한 모습은 음행이나 탐심이나 토색이나 우상숭배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행악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한 자, 곧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엡 2: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그 자신의 권세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하는 전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결과는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단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승리, 의로움, 진리, 복음, 구원을 입혀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에 극단적인 사람들은 사막에 들어가서 수도원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도 빛과 소금이 되어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세상이 타락할수록 사람들의 영적인 목마름은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일대일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고 영혼의 생수를 마시도록 복음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사귀지 말라는 것은 형제라 일컫는 자 곧 신자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가 음행하거나 물질에 대해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술 취하거나 욕을 퍼붓거나 하거든 일대일로 만나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개를 촉구하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두 세 사람이 다시 가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지만 교인들은 교회가 징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가 범죄자를 판단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인 개인이 성도의 행위를 판단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훈계하고 권징하는 일을 교회적 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판단의 권위와 진실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할 때 더욱 명백해 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적으로 아비의 아내와 동거하는 자를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합니다. 고린도후서 2:1-11절에 보면 범죄자가 이런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징계는 선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교회가 권징을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기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징계만 정당하게 시행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잘못을 범한 신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 건강한 교회를 만들 수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열매를 맺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개인적으로 아픔이 있지만 사랑으로 징계하여 이 교회를 순전하고 진실한 새 덩이로 만들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51cor6.hwp (0byte)
109회 다운로드 | DATE : 2005-10-30 11:37:5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