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소아시아일곱교회 3강(2:12-17) -버가모교회
페이지 정보

본문
소아시아 일곱 교회 제 3 강
말씀 / 요한계시록 2:12-17
요절 / 요한계시록 2:1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는 높은 곳이라는 뜻에 맞게 에게해에서 24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해발 300m 이상의 고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버가모는 과거에 페르가문으로 불리웠습니다. 이 도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원정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에 그의 대장 중 하나였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페르가문이 천연의 요새임을 알고 산의 정상에 성채를 세우고 아크로폴리스를 차례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 후 페르가문은 리시마쿠스의 사후에 독립국가가 됩니다.
페르가문은 에우메네스 2세의 제위기간이었던 BC 197~160년 사이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세워지는데 무려 20만권의 도서가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이집트에서는 페르가문에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피지를 발명하였습니다. 소아시아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된 페르가문은 높은 문화수준을 구가하며 그 시대 최고의 도시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리아에 비견되었습니다. 페르가문은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와 조각술, 건축양식 등을 받아들여 훌륭한 공공건물들과 유명한 학교 그리고 넓이 30㎡ 높이 12㎡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이 있는 제우스신전을 주축으로 디오니소스,아스클레피오스,아테네등 4대 신전 등을 만들었습니다.
BC 4세기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움은 당시 의과대학이었습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이곳에서 일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병원은 로마 제국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였습니다. 하드리안 시대에 유명한 아리스티데스도 이곳에서 13년 동안 머물렀고,카라칼라 황제도 이곳에서 치료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세계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할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있어 최고의 의학중심지였습니다.
이렇듯 학문의 도시오, 의학의 도시오, 행정도시로서 번성해 가던 페르가문은 아탈로스 3세에 이르러 그의 유언에 의해 왕국을 로마에 양여하여(BC 133) 그 후 페르가문은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로서 번영을 하게 됩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지고 황제숭배의 기치를 세워 기독교세력과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며 세워진 버가모 교회는 오히려 신앙의 순결을 지킬 수 있었으나,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세속화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아시아의 7대 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에게 세속화에 대한 경고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는 많은 유혹과 핍박에 일부 영향을 받으나 그 종교적 정절을 지켜 현대에 이르기까지 본받고 경고로 삼을 교회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영했던 페르가문은 716년 아랍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해서 현재는 인구 5만의 작은 소도시로 전락했습니다.
I. 예수님의 자기 소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았습니다. 이 검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히4:12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때로 우리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물론입니다.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혼과 영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말씀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동기를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가모 교회에 예수님이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입으로부터 나온 나의 말은 날선 검과 같아. 그것은 너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능력과 권위가 있다. 그러므로 내 말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것에 순종하며 버리지 마라.”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또한 감히 그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장이십니다. 그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고 선과 악을 구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II. 예수님의 칭찬
13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 살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버가모는 당시에 아시아의 수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도시는 거대한 제단이 있는 제우스신전을 주축으로 디오니소스,아스클레피오스,아테네등 4대 신전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고 행정도시였습니다. 큰 도시에는 범죄, 성적 부패, 동성애, 마약, 술취함, 조직 폭력배, 이혼, 정신병자, 빈부의 격차, 공해 등등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매일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 서울, 그것도 문화의 첨단을 걷는 홍대 앞에 있는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란과 쾌락, 물질주의와 인본주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는 곳에 살고 있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큰 도시에 있는 대학생들도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도 일상 속에서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습니다.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 그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진실되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들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안디바가 누구입니까? 그는 로마 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황제 숭배를 하는 종파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악한 무리들은 그를 놋으로 만든 가마솥에 넣고 서서히 구워서 죽였다고 합니다.
안디바가 놋 가마 속에서 서서히 구워질 때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 안디바와 같이 죽이겠다고 위협할 때 버가모 성도들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그들은 죽는 것도 감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신 이유입니다.
III. 예수님의 책망
그 교회의 대다수와 리더들이 충성을 했다 할지라도 어떤 성도들은 세상의 영향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건전하지 못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돕지 않은 리더들을 책망하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의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민수기22-25장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자기 땅을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보고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을 접수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발락이 많은 돈을 제시하자 발람은 타협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할 때 입으로 나오는 것은 “오 하나님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옵소서!”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다섯 번씩 일어나자 발람은 무기력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락의 제안을 받지 말도록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저주하는 입을 막으셨을 때 발람은 타협한 죄를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락에게 여우같은 여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하도록 했습니다(민25; 31:16).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성적인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들은 바알브올에게 제사까지 지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친 세속적인 크리스챤의 상징입니다.
버가모에 있는 어떤 세속적인 성도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에 타협하였습니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한 발은 교회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는 것입니다. 버가모에 있는 리더들이 그들의 타협하는 자세를 회개하도록 돕지 않았을 때 그들의 악한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 있는 세속적인 성도들로 인해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영향은 교회에 그 어떤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있는 리더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제가 동기나 과정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너무나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제가 성공주의에 물들어서 지냈습니다. 물량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한 영혼을 깊이 돌보는 일에 소홀하였습니다. 이 죄인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더 컸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적당히 사랑하는 모양만 냈습니다. 제가 저의 이 악한 죄에서 돌이켜서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IV. 예수님의 방향
예수님의 방향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러므로 회개하라. 유일한 해결책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약 세속적인 크리스챤들이 타협하는 마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임하여 그 입의 양날 선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으로 우리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도려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 대신에 재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적인 크리스챤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직접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기까지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 아래에서 노예로 살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학생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직접 우리를 훈련하실 것입니다. 첫 번째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도구는 성령이십니다. 세 번째 도구는 그의 종들입니다. 마지막 도구는 가장 무시무시한 환경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도구로 우리를 직접 훈련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됩니다. 시1:1-3절은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주의 깊게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 자녀들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합시다. 특히 이 가을에 성경 1회독을 하는 가운데 우리 속에 있는 세속적인 요소들을 깊이 도려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계시록 2:12-17
요절 / 요한계시록 2:1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는 높은 곳이라는 뜻에 맞게 에게해에서 24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해발 300m 이상의 고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버가모는 과거에 페르가문으로 불리웠습니다. 이 도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원정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에 그의 대장 중 하나였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페르가문이 천연의 요새임을 알고 산의 정상에 성채를 세우고 아크로폴리스를 차례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 후 페르가문은 리시마쿠스의 사후에 독립국가가 됩니다.
페르가문은 에우메네스 2세의 제위기간이었던 BC 197~160년 사이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세워지는데 무려 20만권의 도서가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이집트에서는 페르가문에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피지를 발명하였습니다. 소아시아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된 페르가문은 높은 문화수준을 구가하며 그 시대 최고의 도시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리아에 비견되었습니다. 페르가문은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와 조각술, 건축양식 등을 받아들여 훌륭한 공공건물들과 유명한 학교 그리고 넓이 30㎡ 높이 12㎡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이 있는 제우스신전을 주축으로 디오니소스,아스클레피오스,아테네등 4대 신전 등을 만들었습니다.
BC 4세기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움은 당시 의과대학이었습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이곳에서 일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병원은 로마 제국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였습니다. 하드리안 시대에 유명한 아리스티데스도 이곳에서 13년 동안 머물렀고,카라칼라 황제도 이곳에서 치료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세계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할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있어 최고의 의학중심지였습니다.
이렇듯 학문의 도시오, 의학의 도시오, 행정도시로서 번성해 가던 페르가문은 아탈로스 3세에 이르러 그의 유언에 의해 왕국을 로마에 양여하여(BC 133) 그 후 페르가문은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로서 번영을 하게 됩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지고 황제숭배의 기치를 세워 기독교세력과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며 세워진 버가모 교회는 오히려 신앙의 순결을 지킬 수 있었으나,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세속화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아시아의 7대 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에게 세속화에 대한 경고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버가모 교회는 많은 유혹과 핍박에 일부 영향을 받으나 그 종교적 정절을 지켜 현대에 이르기까지 본받고 경고로 삼을 교회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영했던 페르가문은 716년 아랍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해서 현재는 인구 5만의 작은 소도시로 전락했습니다.
I. 예수님의 자기 소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았습니다. 이 검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히4:12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때로 우리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물론입니다.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혼과 영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말씀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동기를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가모 교회에 예수님이 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입으로부터 나온 나의 말은 날선 검과 같아. 그것은 너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능력과 권위가 있다. 그러므로 내 말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것에 순종하며 버리지 마라.”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또한 감히 그를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장이십니다. 그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고 선과 악을 구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II. 예수님의 칭찬
13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 살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버가모는 당시에 아시아의 수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도시는 거대한 제단이 있는 제우스신전을 주축으로 디오니소스,아스클레피오스,아테네등 4대 신전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고 행정도시였습니다. 큰 도시에는 범죄, 성적 부패, 동성애, 마약, 술취함, 조직 폭력배, 이혼, 정신병자, 빈부의 격차, 공해 등등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매일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 서울, 그것도 문화의 첨단을 걷는 홍대 앞에 있는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음란과 쾌락, 물질주의와 인본주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는 곳에 살고 있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큰 도시에 있는 대학생들도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도 일상 속에서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습니다.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 그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진실되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들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안디바가 누구입니까? 그는 로마 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황제 숭배를 하는 종파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악한 무리들은 그를 놋으로 만든 가마솥에 넣고 서서히 구워서 죽였다고 합니다.
안디바가 놋 가마 속에서 서서히 구워질 때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 안디바와 같이 죽이겠다고 위협할 때 버가모 성도들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그들은 죽는 것도 감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신 이유입니다.
III. 예수님의 책망
그 교회의 대다수와 리더들이 충성을 했다 할지라도 어떤 성도들은 세상의 영향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건전하지 못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돕지 않은 리더들을 책망하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의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민수기22-25장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자기 땅을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보고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을 접수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발락이 많은 돈을 제시하자 발람은 타협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할 때 입으로 나오는 것은 “오 하나님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옵소서!”였습니다. 그러한 일이 다섯 번씩 일어나자 발람은 무기력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락의 제안을 받지 말도록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저주하는 입을 막으셨을 때 발람은 타협한 죄를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락에게 여우같은 여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하도록 했습니다(민25; 31:16).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성적인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들은 바알브올에게 제사까지 지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친 세속적인 크리스챤의 상징입니다.
버가모에 있는 어떤 세속적인 성도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에 타협하였습니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한 발은 교회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는 것입니다. 버가모에 있는 리더들이 그들의 타협하는 자세를 회개하도록 돕지 않았을 때 그들의 악한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세상과 타협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 있는 세속적인 성도들로 인해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영향은 교회에 그 어떤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있는 리더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제가 동기나 과정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너무나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제가 성공주의에 물들어서 지냈습니다. 물량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한 영혼을 깊이 돌보는 일에 소홀하였습니다. 이 죄인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더 컸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적당히 사랑하는 모양만 냈습니다. 제가 저의 이 악한 죄에서 돌이켜서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IV. 예수님의 방향
예수님의 방향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러므로 회개하라. 유일한 해결책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약 세속적인 크리스챤들이 타협하는 마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임하여 그 입의 양날 선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예리한 말씀의 검으로 우리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도려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 대신에 재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적인 크리스챤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직접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무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기까지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 아래에서 노예로 살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학생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직접 우리를 훈련하실 것입니다. 첫 번째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도구는 성령이십니다. 세 번째 도구는 그의 종들입니다. 마지막 도구는 가장 무시무시한 환경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도구로 우리를 직접 훈련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복을 받게 됩니다. 시1:1-3절은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주의 깊게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 자녀들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합시다. 특히 이 가을에 성경 1회독을 하는 가운데 우리 속에 있는 세속적인 요소들을 깊이 도려내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버가모교회.hwp (0byte)
107회 다운로드 | DATE : 2005-10-28 20:33: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