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051cor5(4:1-21)/ 나를 본받는 자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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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고린도전서 제 5강
말씀/ 고린도전서 4:1-21
요절/ 고린도전서 4:16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5). 둘째, 만물의 찌끼 같이 된 바울의 목자 생활입니다(6-13). 셋째,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14-21).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목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이 이런 삶을 살게 된 근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1-5).
고린도 교회에는 하나님의 종들을 과대평가하여 당을 짓거나 함부로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진 불평과 판단하는 말들이 어린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새겨져서 사단이 쓸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는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해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불평하거나 판단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루고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사역자를 어떤 자로 여기라고 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이란 로마의 거대한 전함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노예들은 선장의 지휘에 따라서 철저하게 복종합니다. 이 처럼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는 선장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노를 젓는 종에 불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겸손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지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 안에 계시된 여러 가지 영적 비밀을 말합니다. 맡은 자란 청지기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관리하는 청지기들입니다. 이들은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다가 그 자녀들을 먹이는 자입니다(마13:52). 청지기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신비,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 없는 영적 진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점에서 귀한 직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을 과대평가하거나 또 종들을 무시하고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양식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리더들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능력이 많아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자는 쓸모없는 청지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2: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충성된 자는 환경이 좋으나 어려우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열심히 일했다가 힘들면 한없이 누어 버리는 사람은 충성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충성된 자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비판의 말을 하든지 칭찬을 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인이 맡겨 준 일에 열심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국과 세계 캠퍼스 양떼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충성된 청지기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리 충성스럽게 일해도 끊임없이 판단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런 판단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이 세 가지 면에서 판단을 받는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판단'이라는 단어는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는 죄인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편견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심판대의 공정함과 위엄에 비하면 사람들의 판단은 정말 작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변함없이 충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판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청지기 자신의 판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잘하면 자기 의에 빠지고 못하면 그것으로 자책하기 쉽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자신의 선한 양심조차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판단의 기준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는, 주님의 판단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주님의 판단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의 충성 여부는 사람에 의해서 판단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판단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만이 참된 판단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큰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로 갈 준비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큰일을 하셨다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에 가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의 종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판단하고 있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성장하기가 어렵습니다. 판단은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오시면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에는 아무 사람도 포함됩니다. 동역자들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판단은 판단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 밑바닥에는 사랑이 없고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함이 있습니다. 판단은 남을 섬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정말 동역자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한 가족이며, 각 지체들은 서로 돕는 가운데 장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솔직하고 사랑에 입각한 비판이 허용됩니다. 그 비판이 올바른 비판이라면 그 비판자는 교회와 성도들을 돕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옳지 못한 비판이라면 그 때에는 오히려 교회가 그 비판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종들이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각각 그 종들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을 부르시고 청지기로 삼으신 주님께서 친히 판단하십니다. 청기지들을 판단하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날은 간단히 숫자로 판단해버립니다. 숫자가 늘어나면 어떤 방법과 과정을 거쳤든지 문제 삼지 않지만 숫자가 줄어들면 판단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청지기에 대한 바른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데 충성했는가의 여부입니다. 유일하고도 참된 판단 기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시는 그 날을 기다리며 판단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둘째, 만물의 찌끼같이 된 목자 바울(6-13)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과 아볼로의 경우를 들어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고린도 성도들이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서 교만한 마음으로 한 편을 자랑하고 한 편을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 성도들이 합심 동역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어느 정도 교만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고린도 성도 중에는 스스로 특별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구석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목자님이 ”내가 계속해서 겸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자님이 “그럼 당신이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흔히 근거 없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본래부터 자기들이 훌륭했던 것처럼 뻐기고 자랑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8절을 보면 그들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교만과 자만심에 가득 차서 서로 왕노릇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하여 배부르다, 부요하다 하며 더 이상 바울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종들의 머리 위에 앉아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바울은 교만한 그들에게 만물의 찌끼같이 된 자신의 목자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만물의 미말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 끌려 나가기도 하면서 온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신자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면서 찢겨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처럼 온 세계와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철학과 인간적인 지식을 버리고 십자가의 도만 전함으로 미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또 바울은 교만하고 이기적인 양들을 온유와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어주면서 눈물로 섬기다 보니 한없이 나약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남을 판단하며 스스로 강한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왕이나 된 것처럼 존귀한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물의 찌끼같이 비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천막을 만들면서 전도비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했기 때문에 천막을 깁는 바울은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평신도 선교사의 삶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저주를 받으면서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더러운 것,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습니다.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기꺼이 만물의 찌끼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과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도 목자 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양은 목자가 겸손히 섬겨주면 계속해서 무시하고 대적합니다. 또 영적인 눈을 뜨고 조금 안다고 해서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오만방자하게 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에 빠져서 끊임없이 목자를 판단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힘들면 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서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고 하면서 목자를 원망합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아이, 더러워서 목자 생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목자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깨닫고 다시 인내와 겸손으로 섬기게 됩니다. 세상이 더러운 것이 되고, 만물의 찌끼가 되는 삶이 바로 목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 만물의 찌끼가 될지라도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나 때문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고, 고소를 당하고 쌍스러운 욕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비하면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셨습니다. 그는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과 비방과 고통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았습니다. 청지기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일하며 고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충성한다는 것과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셋째, 나를 본 받는 자 되자(14-21)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목자 생활에 비추어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심하게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는 것이었습니다(14).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입니다. 스승이라 하는 자들의 수가 일만으로서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고 말씀으로 양육하였습니다. 그는 양떼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10-13절;갈 4:19) 돌아올 것을 강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아비라고 말함으로서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과 권면이 진실된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책망의 동기도 아비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는 것은 바울이 보인 사랑의 실천과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기적인 세리의 사랑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본받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바울은 아비의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를 돕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다고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영접했지만 이미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좋은 본이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서 해야 할 일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이 항상 가르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행하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에베소를 떠났습니다(16:10).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한 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18-20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고린도에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는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조롱했습니다(고후10:8-11).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에베소에 있지만 고린도에 가서 교만한 말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항상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자들은 말은 많으나 능력은 없는 자들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자기가 불평하기보다 자기가 해버리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정말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회개와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제자로 양육하는 열매가 있는가? 옛 사람을 벗어버린 새 사람으로서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이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의 잔치가 아니라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으로 부족할지라도 위로부터 오는 능력과 영적인 권세를 덧입은 자들의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훈계하듯이 말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그들이 계속하여 분쟁과 자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바울의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회개함으로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낮아져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더라도 교만하고 이기적인 양들을 끝까지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받고 목자 바울의 삶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 우리 각자 한 가지 점에서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고린도전서 4:1-21
요절/ 고린도전서 4:16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5). 둘째, 만물의 찌끼 같이 된 바울의 목자 생활입니다(6-13). 셋째,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14-21).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목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이 이런 삶을 살게 된 근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1-5).
고린도 교회에는 하나님의 종들을 과대평가하여 당을 짓거나 함부로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진 불평과 판단하는 말들이 어린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새겨져서 사단이 쓸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는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해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불평하거나 판단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책임을 지고 그것을 이루고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사역자를 어떤 자로 여기라고 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이란 로마의 거대한 전함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노예들은 선장의 지휘에 따라서 철저하게 복종합니다. 이 처럼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는 선장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노를 젓는 종에 불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겸손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지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 안에 계시된 여러 가지 영적 비밀을 말합니다. 맡은 자란 청지기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관리하는 청지기들입니다. 이들은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다가 그 자녀들을 먹이는 자입니다(마13:52). 청지기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신비,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 없는 영적 진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점에서 귀한 직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을 과대평가하거나 또 종들을 무시하고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양식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리더들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능력이 많아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자는 쓸모없는 청지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2: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충성된 자는 환경이 좋으나 어려우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열심히 일했다가 힘들면 한없이 누어 버리는 사람은 충성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충성된 자는 사람들이 불평을 하고 비판의 말을 하든지 칭찬을 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인이 맡겨 준 일에 열심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국과 세계 캠퍼스 양떼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충성된 청지기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리 충성스럽게 일해도 끊임없이 판단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런 판단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이 세 가지 면에서 판단을 받는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판단'이라는 단어는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는 죄인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편견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심판대의 공정함과 위엄에 비하면 사람들의 판단은 정말 작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변함없이 충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판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청지기 자신의 판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잘하면 자기 의에 빠지고 못하면 그것으로 자책하기 쉽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자신의 선한 양심조차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판단의 기준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는, 주님의 판단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주님의 판단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의 충성 여부는 사람에 의해서 판단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판단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만이 참된 판단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큰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 나라로 갈 준비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큰일을 하셨다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에 가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의 종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판단하고 있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성장하기가 어렵습니다. 판단은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주님께서 오시면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에는 아무 사람도 포함됩니다. 동역자들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판단은 판단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 밑바닥에는 사랑이 없고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함이 있습니다. 판단은 남을 섬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정말 동역자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한 가족이며, 각 지체들은 서로 돕는 가운데 장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솔직하고 사랑에 입각한 비판이 허용됩니다. 그 비판이 올바른 비판이라면 그 비판자는 교회와 성도들을 돕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옳지 못한 비판이라면 그 때에는 오히려 교회가 그 비판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종들이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각각 그 종들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을 부르시고 청지기로 삼으신 주님께서 친히 판단하십니다. 청기지들을 판단하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날은 간단히 숫자로 판단해버립니다. 숫자가 늘어나면 어떤 방법과 과정을 거쳤든지 문제 삼지 않지만 숫자가 줄어들면 판단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청지기에 대한 바른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데 충성했는가의 여부입니다. 유일하고도 참된 판단 기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시는 그 날을 기다리며 판단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둘째, 만물의 찌끼같이 된 목자 바울(6-13)
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과 아볼로의 경우를 들어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고린도 성도들이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서 교만한 마음으로 한 편을 자랑하고 한 편을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 성도들이 합심 동역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어느 정도 교만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고린도 성도 중에는 스스로 특별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구석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목자님이 ”내가 계속해서 겸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자님이 “그럼 당신이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흔히 근거 없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본래부터 자기들이 훌륭했던 것처럼 뻐기고 자랑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8절을 보면 그들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교만과 자만심에 가득 차서 서로 왕노릇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하여 배부르다, 부요하다 하며 더 이상 바울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종들의 머리 위에 앉아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바울은 교만한 그들에게 만물의 찌끼같이 된 자신의 목자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만물의 미말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 끌려 나가기도 하면서 온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신자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면서 찢겨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처럼 온 세계와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10-1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철학과 인간적인 지식을 버리고 십자가의 도만 전함으로 미련한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또 바울은 교만하고 이기적인 양들을 온유와 겸손으로 섬겼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어주면서 눈물로 섬기다 보니 한없이 나약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남을 판단하며 스스로 강한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왕이나 된 것처럼 존귀한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물의 찌끼같이 비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천막을 만들면서 전도비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육체노동을 천시했기 때문에 천막을 깁는 바울은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평신도 선교사의 삶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저주를 받으면서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더러운 것,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습니다.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기꺼이 만물의 찌끼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과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도 목자 생활을 하면서 고난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양은 목자가 겸손히 섬겨주면 계속해서 무시하고 대적합니다. 또 영적인 눈을 뜨고 조금 안다고 해서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오만방자하게 행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에 빠져서 끊임없이 목자를 판단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힘들면 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서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고 하면서 목자를 원망합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아이, 더러워서 목자 생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목자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깨닫고 다시 인내와 겸손으로 섬기게 됩니다. 세상이 더러운 것이 되고, 만물의 찌끼가 되는 삶이 바로 목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 만물의 찌끼가 될지라도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나 때문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고, 고소를 당하고 쌍스러운 욕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비하면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셨습니다. 그는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과 비방과 고통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았습니다. 청지기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일하며 고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충성한다는 것과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셋째, 나를 본 받는 자 되자(14-21)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목자 생활에 비추어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심하게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는 것이었습니다(14).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입니다. 스승이라 하는 자들의 수가 일만으로서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고 말씀으로 양육하였습니다. 그는 양떼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10-13절;갈 4:19) 돌아올 것을 강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아비라고 말함으로서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과 권면이 진실된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책망의 동기도 아비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는 것은 바울이 보인 사랑의 실천과 겸손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기적인 세리의 사랑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본받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바울은 아비의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를 돕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다고 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영접했지만 이미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좋은 본이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서 해야 할 일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이 항상 가르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행하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에베소를 떠났습니다(16:10).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한 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18-20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고린도에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는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조롱했습니다(고후10:8-11).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에베소에 있지만 고린도에 가서 교만한 말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항상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자들은 말은 많으나 능력은 없는 자들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자기가 불평하기보다 자기가 해버리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 공동체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정말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회개와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제자로 양육하는 열매가 있는가? 옛 사람을 벗어버린 새 사람으로서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이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의 잔치가 아니라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으로 부족할지라도 위로부터 오는 능력과 영적인 권세를 덧입은 자들의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훈계하듯이 말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그들이 계속하여 분쟁과 자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바울의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회개함으로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낮아져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더라도 교만하고 이기적인 양들을 끝까지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받고 목자 바울의 삶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 우리 각자 한 가지 점에서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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