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05삼상17/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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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 준비를 위한 특강
말씀 / 사무엘상 17장
요절 / 사무엘상 17:45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노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골리앗은 보기만 해도 겁에 질릴 만큼 강하고 거대해 보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싸움 상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다윗은 통쾌한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승리자 다윗은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선한 목자 다윗의 모습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다윗을 배우고, 승리의 비결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다윗과 같이 영적인 무장을 하고 캠퍼스에 나아가 믿음의 용사처럼 우리의 골리앗들을 물리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지 그 비밀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1-11).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을 습격하여 이미 그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상태였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면 블레셋 군대들은 감히 이스라엘 땅을 밟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사울에 의해서 블레셋은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기회를 엿보아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원수들은 공격할 만한 좋은 기회가 없을까 항상 살핍니다. 그리고 영적 리더들이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노하게 하면 원수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에베스담밈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전은 공중전으로서 정확도와 파괴력을 갖춘 최첨단 무기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삼국지에서 관우와 항우가 나와서 일대일로 싸웠던 것처럼 양진을 대표할 만한 장수가 나와서 승패를 결정지었습니다. 먼저 블레셋 진에서 골리앗 장군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왔습니다. 4-7절에 보면 그는 키가 여섯규빗 한뼘으로써 약 293Cm였습니다. 사람들은 저의 구두를 보면 항공모함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골리앗의 신발에 비하면 틀림없이 어린애 신발과 같이 작아보일 것입니다. 골리앗은 58kg이나 나가는 갑옷을 가볍게 걸치고, 창날의 무게만도 7kg인 창을 성냥개비 다루듯 하였습니다. 거기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쓰고 있었고 몸에는 물고기 비늘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방패를 든 자가 그의 빽만 믿고 목에 힘을 주고 뻐기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마치 로보캅이나 마징가Z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싸우기도 전에 기가 죽고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천둥같은 소리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야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이 쪼무래기들아! 나보다 싸움 잘 하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와하하하”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업신여기며 종으로 삼겠다고 모욕하였습니다. 여기서 골리앗이 싸움을 거는 목적이 이스라엘을 종 삼고자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종 삼고자 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만일 사울의 용기가 골리앗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을 보았다면 백성들은 그처럼 겁에 질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도자가 겁장이면서 그 추종자들만이 담대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전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는(11:6), 그가 암몬 사람 나하스의 도전에 대해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대항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자”, 사울 왕은 혈액 순환이 빨라지고 새파랗게 질려서 온 몸에 식은 땀이 흘러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못할 때 그는 앞장서서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40일 동안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온갖 모멸감과 치욕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 누구 한 사람 감히 나아가서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숨을 곳을 찾아 고개를 쳐박고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각이 마비되고 전신이 중풍병자처럼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믿음이 생길 때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영적인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12-30). 다윗은 이새의 막둥이였습니다. 그는 신검받을 나이도 되지 않아서 징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장성한 세 아들 엘리압과 아비나답과 삼마는 싸움에 나갔지만 다윗은 사울에게로 좇아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형들을 위하여 볶은 곡식 한 에바와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가서 형들에게 주고 치즈 열 덩이는 천부장에게 주고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전쟁터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이 형들과 말할 때에 마침 골리앗이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왕이 내건 포상에 대해서 탐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도망하였습니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25b)”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이 모욕하는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놀라서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데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가, 내가 그대를 상대해 주리라.” 이렇게 말하는 다윗의 두 눈동자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 말속에서 우리는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특심한 열정과 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방인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지금 이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존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예가 이방인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할례없는 이방인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철저히 매도당하고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도저히 지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를 누군가 모독하고 조롱할 때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 없는 그 아들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다윗의 분노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적인 분노를 잘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웬만해서는 화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정말 영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번에 미국 심방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상에 올린 R그룹의 글들로 인해서 양들이 많이 실족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센타는 10명의 양들이 그 글을 보고 우수수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리고 2세 목자들은 대학에 입학하여도 UBF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고 다른 선교 단체에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또 어떤 센타들은 신입생들을 얻기 위해서 UBF라는 이름대신에 다른 이름을 걸고 양들을 초청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사단의 역사를 볼 때 영적인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전요한선교사님께서 지난 번 유럽 수양회에서 우리의 원수는 인터넷 상에서 역사하는 사단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사단의 역사와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싸우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절대화시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또 모든 기존의 질서에 대해서 파괴적이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상처를 입고 자신감을 잃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년간 휘싱 역사를 섬겨보았지만 몇 번 일대일을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볼 때 패배감을 갖게 됩니다. 이 패배감은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는 불신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 생활이 힘들고 버겁습니다. 기도를 해도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영상을 통한 사단의 공격을 받고 떨어져 나가는 양들을 보면서 무기력해진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뒤에서 활동하는 사단을 주시하고 사단에 대해서 영적 분노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 없음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다윗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살려서 싸웠습니다(28-40). 장형 엘리압은 정작 골리앗 앞에서는 벌벌 떨다가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는 노를 발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b).” 엘리압은 어린 것이 겁 없이 말한다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들에 있는 양은 돌보지 않고 농뗑이를 피운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은 죽느냐 사느냐 위기 가운데 있는데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큰 소리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형의 행동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맞붙어 싸우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형의 자존심 긁는 소리, 오해의 말, 무시하는 말, 부정적인 말 앞에서 감정적이 되거나 휘말려서 같이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원수 골리앗과 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한음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칼을 차고 수도에 갔습니다. 이때 깡패들이 버릇없이 칼을 차고 있다며 자기들의 가랑이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큰 적과 싸우기 위해서 작은 문제는 참았습니다. 다윗은 아군끼리 싸움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자기의 감정을 정복했다는 것은 골리앗을 정복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잠16: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블레셋이 몰려온 상황에서 다윗은 형과 다툴 시간이 없었습니다. 신자들끼리 싸우면 원수와 싸우기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영적인 패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원수들의 위협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오래 참는 동시에 가정에서, 요회에서, 센타에서 더욱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사람이 나서자 그 소식이 이스라엘 군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이 술렁거렸습니다. 이 소식은 사울 왕에게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같은 거인이 나타나는가 기대하고 있는 사울 앞에 나타난 것은 홍안의 미소년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32)”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어린 것이 맹랑했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아침까지도 양을 치던 어린 목동이 이스라엘의 어떤 용사보다도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고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고 김빠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윗은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믿음을 나누기 위해 신앙 간증을 했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목동으로서 항상 양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자세로 양들을 지켰습니까? 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다윗은 홀로 양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서 눈을 붙이려는데, 한 쪽에서 부스럭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윗은 벌떡 일어나 쫓아가 보았더니 이름도 알고 얼굴도 잘 아는 새끼 양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큰일 났구나 생각하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급히 쫓아갔습니다. 잠시 후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다윗을 본 사자가 겁을 주고자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앞뒤 안 가리고 사자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태권도로 사자의 아구통을 후려 치고 박치기로 사자의 눈탱이를 받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양손으로 사자의 입을 벌려서 새끼 양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러자 목구멍까지 들어간 먹이를 빼앗긴 사자는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 사자는 이제 다윗을 삼키고자 무섭게 달려들었습니다. 다윗은 밀림의 왕자 타잔처럼 사자와 함께 뒹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자의 수염을 잡고 작은 주먹으로 사자의 급소를 찍었습니다. 얍-팍! 그러자 사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도망쳤습니다. 소년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청소년 때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행13:22). 또한 예수님처럼 양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였습니다(요10:11). 이와 같은 다윗의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사랑하는 다윗의 목자의 심정과 믿음을 보시고 그와 함께 하사 삼손과 같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사나운 사자나 곰도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목자 생활을 볼 때 그가 선한 목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양무리로 보았습니다. 더구나 사울 왕을 중심으로 전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거인 골리앗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골리앗에게 도전하는 다윗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체험을 기초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120% 확신하였습니다. 믿음은 그를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덤벼들지 않았습니다. 실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골리앗도 곰과 같이 여기고 때려잡고자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는지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돕기 위해서 자기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덩치가 큰 사울의 갑옷과 투구를 입은 다윗은 얼굴이 투구에 파 묻히고, 갑옷은 땅에 질질 끌리고 코미디언 같이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성의를 생각해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익숙치 아니하므로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모름지기 배운 것도 없고 익숙치도 못하면서 왕의 옷과 갑옷을 탐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입고 있는 우리의 옷이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립니다. 남의 것이 아무리 좋아도 내게 익숙하지 않고 또 잘 다루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다윗은 한 가지 잘 하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물맷돌을 던지는데 익숙해져야겠습니다. 우리가 익혀야 할 물맷돌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대일 성경 공부와 소감과 제자 양성의 능력과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물맷돌 삼아 매일 던지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더욱 잘 갈고 다듬어서 영적인 전투를 해야 합니다.
넷째,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서 싸웠습니다(41-58). 전쟁을 시작한 지 40일이 지나서야 겨우 싸우러 나오는 것을 본 골리앗은 누가 나오는가 둘러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만 아이가 물매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웬 아이가 참새를 잡으려 하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참새는 잡지 않고 점점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싸우러 나온 사람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다윗이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워서 싸움꾼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들고 간 막대기는 목자의 막대기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막대기였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가 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3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자기에게 어린 소년을 보낸 것과 막대기만 들고 나온 것이 자신에게 큰 모욕이 되어서 화가 났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막대기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 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짐승들의 고기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윗의 응전이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과 골리앗은 각각 무엇을 의지하여 나아갔습니까? 전쟁에서 무엇을 의지하는가 하는 것은 승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과 같은 무기를 의지하고 무기를 다루는 자기의 힘과 기술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란 뜻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란 뜻입니다. 즉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다윗의 무기는 바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 권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골리앗과 대항해서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처음부터 이 싸움이 이스라엘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이방인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눈에는 그 상대가 아무리 골리앗 아니라 골리앗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어떤 세력들도 능히 파하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을 마칠 때에 골리앗이 다윗에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도 골리앗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다윗과 골리앗의 세계적인 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홍코너는 미니멈 핀급 도전자로 맨주먹이었고 청코너는 슈퍼 헤비급 챔피언으로 철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도전자답게 먼저 공격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다윗은 빨리 달리다가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물매에 먹이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물매를 돌리면서 하나님께 승리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향하여 힘껏 던졌습니다. ‘골리앗, 자 받아랏!“ 그러자 물매돌이 씽하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더니 골리앗의 넓은 이마에 정통으로 박혀 버렸습니다. 그 순간 ’퍽‘하고 돌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곧이어 ’쿵‘하며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골리앗이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쿠르즈 미사일처럼 빠르고 정확하고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빨리 달려가서 골리앗을 밟고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이 타이틀전은 1라운드 9초만에 다윗의 완전 KO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이는 믿음의 승리요,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다윗은 V자를 표시하며 기념 촬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번에 독일 본에서 온 요아힘 디첼 목자는 컴퓨터 전문가로서 일하다가 유실협에서 띄운 글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되었고 반항적이 되었으며 가정 중심의 소시민적인 삶을 살며 이중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키우시는 사랑을 영접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종들의 희생적인 삶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는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거의 포기해 버렸고, 삼년 동안 단지 사라 선교사님과의 일대일 성경공부와 주일 예배를 위해서만 센터에 왔습니다. 그러나 장베드로, 사라 선교사님과 신메리 선교사님과 그의 동역자인 엘케 목자님과 많은 동역자들은 그를 포기치 않았습니다. 메리신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독일로 몇 차례나 비행기를 타고 심방해서 그를 1:1 말씀공부로 섬겨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조건없이 영접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온전히 돌이키고 리더 미팅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 가지 영역에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이버 세계, 매스컴, 실제 생활입니다. 사이버 세계를 통해 들어오는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 이제까지 응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홍수와 같이 몰려오고 있는 이때 사이버 세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또한 취직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학생 목자들이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음란 문제, 교만과 열등감, 각종 죄의 세력이 골리앗입니다. 평신도 목자들은 물질 문제와 자녀 교육 문제가 골리앗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거나 병이 들고 힘을 못 쓰고 누워있기 쉽습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고 힘과 용기와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실체를 파악할 때 영적인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영적인 분노를 느낄 때 파이팅 스피릿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영적 분노가 있을 때 양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캠퍼스 골리앗에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47).”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전쟁입니다(엡6:12). 그리고 이 전쟁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시고 살아계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 / 사무엘상 17장
요절 / 사무엘상 17:45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노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골리앗은 보기만 해도 겁에 질릴 만큼 강하고 거대해 보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싸움 상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다윗은 통쾌한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승리자 다윗은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선한 목자 다윗의 모습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다윗을 배우고, 승리의 비결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다윗과 같이 영적인 무장을 하고 캠퍼스에 나아가 믿음의 용사처럼 우리의 골리앗들을 물리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지 그 비밀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1-11).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을 습격하여 이미 그 영토의 일부를 차지한 상태였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신실하였다면 블레셋 군대들은 감히 이스라엘 땅을 밟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사울에 의해서 블레셋은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기회를 엿보아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원수들은 공격할 만한 좋은 기회가 없을까 항상 살핍니다. 그리고 영적 리더들이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노하게 하면 원수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에베스담밈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전은 공중전으로서 정확도와 파괴력을 갖춘 최첨단 무기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삼국지에서 관우와 항우가 나와서 일대일로 싸웠던 것처럼 양진을 대표할 만한 장수가 나와서 승패를 결정지었습니다. 먼저 블레셋 진에서 골리앗 장군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왔습니다. 4-7절에 보면 그는 키가 여섯규빗 한뼘으로써 약 293Cm였습니다. 사람들은 저의 구두를 보면 항공모함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골리앗의 신발에 비하면 틀림없이 어린애 신발과 같이 작아보일 것입니다. 골리앗은 58kg이나 나가는 갑옷을 가볍게 걸치고, 창날의 무게만도 7kg인 창을 성냥개비 다루듯 하였습니다. 거기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쓰고 있었고 몸에는 물고기 비늘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방패를 든 자가 그의 빽만 믿고 목에 힘을 주고 뻐기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마치 로보캅이나 마징가Z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싸우기도 전에 기가 죽고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천둥같은 소리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야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이 쪼무래기들아! 나보다 싸움 잘 하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와하하하”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업신여기며 종으로 삼겠다고 모욕하였습니다. 여기서 골리앗이 싸움을 거는 목적이 이스라엘을 종 삼고자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종 삼고자 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만일 사울의 용기가 골리앗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을 보았다면 백성들은 그처럼 겁에 질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도자가 겁장이면서 그 추종자들만이 담대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전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했을 때는(11:6), 그가 암몬 사람 나하스의 도전에 대해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대항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자”, 사울 왕은 혈액 순환이 빨라지고 새파랗게 질려서 온 몸에 식은 땀이 흘러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못할 때 그는 앞장서서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40일 동안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온갖 모멸감과 치욕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 누구 한 사람 감히 나아가서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숨을 곳을 찾아 고개를 쳐박고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각이 마비되고 전신이 중풍병자처럼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믿음이 생길 때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영적인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12-30). 다윗은 이새의 막둥이였습니다. 그는 신검받을 나이도 되지 않아서 징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장성한 세 아들 엘리압과 아비나답과 삼마는 싸움에 나갔지만 다윗은 사울에게로 좇아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형들을 위하여 볶은 곡식 한 에바와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가서 형들에게 주고 치즈 열 덩이는 천부장에게 주고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전쟁터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이 형들과 말할 때에 마침 골리앗이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왕이 내건 포상에 대해서 탐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도망하였습니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25b)”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이 모욕하는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놀라서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서 외쳤습니다. “이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데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가, 내가 그대를 상대해 주리라.” 이렇게 말하는 다윗의 두 눈동자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타 오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 말속에서 우리는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특심한 열정과 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방인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지금 이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존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예가 이방인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을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할례없는 이방인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철저히 매도당하고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을 도저히 지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를 누군가 모독하고 조롱할 때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을 수만 없는 그 아들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다윗의 분노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적인 분노를 잘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웬만해서는 화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정말 영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번에 미국 심방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상에 올린 R그룹의 글들로 인해서 양들이 많이 실족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센타는 10명의 양들이 그 글을 보고 우수수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리고 2세 목자들은 대학에 입학하여도 UBF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고 다른 선교 단체에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또 어떤 센타들은 신입생들을 얻기 위해서 UBF라는 이름대신에 다른 이름을 걸고 양들을 초청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 상에서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사단의 역사를 볼 때 영적인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전요한선교사님께서 지난 번 유럽 수양회에서 우리의 원수는 인터넷 상에서 역사하는 사단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사단의 역사와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싸우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절대화시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또 모든 기존의 질서에 대해서 파괴적이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상처를 입고 자신감을 잃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년간 휘싱 역사를 섬겨보았지만 몇 번 일대일을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볼 때 패배감을 갖게 됩니다. 이 패배감은 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는 불신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루 하루 생활이 힘들고 버겁습니다. 기도를 해도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영상을 통한 사단의 공격을 받고 떨어져 나가는 양들을 보면서 무기력해진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뒤에서 활동하는 사단을 주시하고 사단에 대해서 영적 분노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 없음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다윗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살려서 싸웠습니다(28-40). 장형 엘리압은 정작 골리앗 앞에서는 벌벌 떨다가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는 노를 발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b).” 엘리압은 어린 것이 겁 없이 말한다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들에 있는 양은 돌보지 않고 농뗑이를 피운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자신들은 죽느냐 사느냐 위기 가운데 있는데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큰 소리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형의 행동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맞붙어 싸우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은 형의 자존심 긁는 소리, 오해의 말, 무시하는 말, 부정적인 말 앞에서 감정적이 되거나 휘말려서 같이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원수 골리앗과 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한음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칼을 차고 수도에 갔습니다. 이때 깡패들이 버릇없이 칼을 차고 있다며 자기들의 가랑이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큰 적과 싸우기 위해서 작은 문제는 참았습니다. 다윗은 아군끼리 싸움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자기의 감정을 정복했다는 것은 골리앗을 정복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잠16: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블레셋이 몰려온 상황에서 다윗은 형과 다툴 시간이 없었습니다. 신자들끼리 싸우면 원수와 싸우기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영적인 패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원수들의 위협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오래 참는 동시에 가정에서, 요회에서, 센타에서 더욱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사람이 나서자 그 소식이 이스라엘 군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이 술렁거렸습니다. 이 소식은 사울 왕에게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같은 거인이 나타나는가 기대하고 있는 사울 앞에 나타난 것은 홍안의 미소년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32)”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어린 것이 맹랑했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아침까지도 양을 치던 어린 목동이 이스라엘의 어떤 용사보다도 용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것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고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고 김빠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윗은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믿음을 나누기 위해 신앙 간증을 했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목동으로서 항상 양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자세로 양들을 지켰습니까? 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다윗은 홀로 양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서 눈을 붙이려는데, 한 쪽에서 부스럭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윗은 벌떡 일어나 쫓아가 보았더니 이름도 알고 얼굴도 잘 아는 새끼 양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큰일 났구나 생각하고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급히 쫓아갔습니다. 잠시 후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다윗을 본 사자가 겁을 주고자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앞뒤 안 가리고 사자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태권도로 사자의 아구통을 후려 치고 박치기로 사자의 눈탱이를 받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양손으로 사자의 입을 벌려서 새끼 양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러자 목구멍까지 들어간 먹이를 빼앗긴 사자는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 사자는 이제 다윗을 삼키고자 무섭게 달려들었습니다. 다윗은 밀림의 왕자 타잔처럼 사자와 함께 뒹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자의 수염을 잡고 작은 주먹으로 사자의 급소를 찍었습니다. 얍-팍! 그러자 사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도망쳤습니다. 소년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청소년 때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행13:22). 또한 예수님처럼 양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였습니다(요10:11). 이와 같은 다윗의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사랑하는 다윗의 목자의 심정과 믿음을 보시고 그와 함께 하사 삼손과 같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사나운 사자나 곰도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목자 생활을 볼 때 그가 선한 목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양무리로 보았습니다. 더구나 사울 왕을 중심으로 전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거인 골리앗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골리앗에게 도전하는 다윗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3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체험을 기초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120% 확신하였습니다. 믿음은 그를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순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덤벼들지 않았습니다. 실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골리앗도 곰과 같이 여기고 때려잡고자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는지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돕기 위해서 자기의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덩치가 큰 사울의 갑옷과 투구를 입은 다윗은 얼굴이 투구에 파 묻히고, 갑옷은 땅에 질질 끌리고 코미디언 같이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성의를 생각해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익숙치 아니하므로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모름지기 배운 것도 없고 익숙치도 못하면서 왕의 옷과 갑옷을 탐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입고 있는 우리의 옷이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립니다. 남의 것이 아무리 좋아도 내게 익숙하지 않고 또 잘 다루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다윗은 한 가지 잘 하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물맷돌을 던지는데 익숙해져야겠습니다. 우리가 익혀야 할 물맷돌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대일 성경 공부와 소감과 제자 양성의 능력과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물맷돌 삼아 매일 던지는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더욱 잘 갈고 다듬어서 영적인 전투를 해야 합니다.
넷째,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서 싸웠습니다(41-58). 전쟁을 시작한 지 40일이 지나서야 겨우 싸우러 나오는 것을 본 골리앗은 누가 나오는가 둘러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그만 아이가 물매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웬 아이가 참새를 잡으려 하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참새는 잡지 않고 점점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싸우러 나온 사람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다윗이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워서 싸움꾼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들고 간 막대기는 목자의 막대기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막대기였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가 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3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자기에게 어린 소년을 보낸 것과 막대기만 들고 나온 것이 자신에게 큰 모욕이 되어서 화가 났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막대기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 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짐승들의 고기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윗의 응전이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과 골리앗은 각각 무엇을 의지하여 나아갔습니까? 전쟁에서 무엇을 의지하는가 하는 것은 승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과 같은 무기를 의지하고 무기를 다루는 자기의 힘과 기술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란 뜻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란 뜻입니다. 즉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다윗의 무기는 바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 권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골리앗과 대항해서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처음부터 이 싸움이 이스라엘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이방인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눈에는 그 상대가 아무리 골리앗 아니라 골리앗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어떤 세력들도 능히 파하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말을 마칠 때에 골리앗이 다윗에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도 골리앗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다윗과 골리앗의 세계적인 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홍코너는 미니멈 핀급 도전자로 맨주먹이었고 청코너는 슈퍼 헤비급 챔피언으로 철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도전자답게 먼저 공격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다윗은 빨리 달리다가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물매에 먹이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물매를 돌리면서 하나님께 승리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향하여 힘껏 던졌습니다. ‘골리앗, 자 받아랏!“ 그러자 물매돌이 씽하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더니 골리앗의 넓은 이마에 정통으로 박혀 버렸습니다. 그 순간 ’퍽‘하고 돌깨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곧이어 ’쿵‘하며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골리앗이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쿠르즈 미사일처럼 빠르고 정확하고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빨리 달려가서 골리앗을 밟고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이 타이틀전은 1라운드 9초만에 다윗의 완전 KO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통쾌한 승리였습니다. 이는 믿음의 승리요,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다윗은 V자를 표시하며 기념 촬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번에 독일 본에서 온 요아힘 디첼 목자는 컴퓨터 전문가로서 일하다가 유실협에서 띄운 글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되었고 반항적이 되었으며 가정 중심의 소시민적인 삶을 살며 이중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키우시는 사랑을 영접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종들의 희생적인 삶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는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거의 포기해 버렸고, 삼년 동안 단지 사라 선교사님과의 일대일 성경공부와 주일 예배를 위해서만 센터에 왔습니다. 그러나 장베드로, 사라 선교사님과 신메리 선교사님과 그의 동역자인 엘케 목자님과 많은 동역자들은 그를 포기치 않았습니다. 메리신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독일로 몇 차례나 비행기를 타고 심방해서 그를 1:1 말씀공부로 섬겨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조건없이 영접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온전히 돌이키고 리더 미팅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 가지 영역에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이버 세계, 매스컴, 실제 생활입니다. 사이버 세계를 통해 들어오는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 이제까지 응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홍수와 같이 몰려오고 있는 이때 사이버 세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또한 취직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학생 목자들이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음란 문제, 교만과 열등감, 각종 죄의 세력이 골리앗입니다. 평신도 목자들은 물질 문제와 자녀 교육 문제가 골리앗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거나 병이 들고 힘을 못 쓰고 누워있기 쉽습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고 힘과 용기와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실체를 파악할 때 영적인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영적인 분노를 느낄 때 파이팅 스피릿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영적 분노가 있을 때 양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캠퍼스 골리앗에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47).”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전쟁입니다(엡6:12). 그리고 이 전쟁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시고 살아계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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