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06목적40일개회(행22:1-21)/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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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목적 40일 개회 메시지
말씀 / 사도행전 22:1-21
요절 / 사도행전 22:10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신입생 여러분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생의 길이에 비해서 대학 생활은 짧습니다. 사람이 백년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삶에 비하면 이 세상의 삶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 합니다.이 짧은 생애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목적이 없이 그저 열심히 달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40일 동안 이 주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우리 각자는 삶의 목적과 목표를 갖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일생 동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체포된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군사들에게 들려 영문 안으로 끌려 가다가 층대 위에 서서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손짓하여 소동하는 백성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에 자신의 간증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3).” 길리기아 성의 수도였던 다소는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뛰어났습니다. 그 도시는 아구스도의 스승이 된 스토익(Stoics)학파의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를 비롯하여 뛰어난 철학자를 배출하여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15세쯤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 선생 중에서 학식과 인격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스승 이상으로 율법에 대하여 열정을 나타냈습니다(갈 1:14). 바울은 그 가문, 교육, 학식,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유학을 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열심을 내는 이유가 물질적인 풍요, 성공, 자기 성취, 미래의 안정 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공, 성취를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이 생각할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옛날부터 내려온 유전과 율례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외국에 까지 쫓아다니면서 크리스챤들을 색출하여 박멸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크리스챤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길을 재촉하여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9절을 보십시오.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바울이 다메섹 근방에 이르렀을 때는 대낮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눈을 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문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는 핍박자 사울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하시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사랑이 가득한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의 영적 무지를 안타까워하시는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바울은 두려움 가운데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그는 찬란한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역사 이래로 모든 구도자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창조주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자신을 친히 계시해 주십니다. 특히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십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바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크리스챤들을 핍박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열심을 내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달려왔는데 그것이 사실은 잘못된 투쟁이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이 투쟁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캄캄한 동굴에서 나와 밝고 환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두움에서 나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분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로 그때까지 박해한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맞아들였습니다(갈 1:15,16). 바울은 회심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무지와 불신앙의 죄 중에 있을 때, 그는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를 보고 믿음과 신령한 지식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바울 한 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10a절을 보십시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무지 가운데서 무지막지한 열심을 내어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달려왔습니다. 그가 율법을 배웠지만 장로들의 유전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전통을 따라서, 전통을 유지하고자 살아왔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치 않게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인생 방향이 필요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고 나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이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삶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으로, 자기 영광을 구하던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것을 하라고 당장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0b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주님은 경건한 주의 종 아나니아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한 바 바울이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목적 40일 캠페인을 하는 동안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삶에 두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일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결단하시고 새벽기도에도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요회별로 하는 말씀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알고자 하는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핍박자 사울이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울에게 나아갔습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 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바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시면서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가장 큰 뜻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목적 40일’ 캠페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 새 피조물, 영적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에 새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이 될 것입니다.
둘째, ‘저 의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저주를 받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를 닮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훈련을 받습니다.
셋째, 바울은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비추어서 성경 말씀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습니다. 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이요 생명의 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도록 하심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사를 활용하여 사역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교회를 섬기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목적 40일 기간 동안 캠퍼스의 많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요회 모임에 동참시킬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기쁨과 환희, 비전, 그 놀라운 축복과 능력, 그리고 변화된 삶을 이웃과 전 세계에 나누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고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은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방향을 갖고 계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죄를 고난을 받으면서 갚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주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후에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지 않고 고향 다소에서 약 10년 동안 상당히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흩어졌던 개척자들에 의해서 안디옥에서 이방인에 대한 전도 붐이 일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가지고서는 도저히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둘이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 사상 획기적인 이방인 전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크리스챤 즉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확대되어 바울은 1차, 2차,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고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로마에까지 가서 일대일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서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회심하고 인생의 방향을 잡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과 종교적인 출세를 위해서 살다 보니 독사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해를 끼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핍박자요 살인자를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제자 양성가요 선교사로 바꾸셨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을 드림으로 일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한 가지 선택된 목적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셀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의 삶은 불사조와 같았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앞으로 40일 동안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라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매일 한 과씩 읽고, 요회에서 그룹으로 공부하고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섯 주간 동안 그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 40일 기간이 저와 어려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요회 모임이 활성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서 훈련을 받고, 받은 바 은사를 발견하여 사역을 감당하고, 사명인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2:1-21
요절 / 사도행전 22:10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신입생 여러분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생의 길이에 비해서 대학 생활은 짧습니다. 사람이 백년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삶에 비하면 이 세상의 삶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 합니다.이 짧은 생애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목적이 없이 그저 열심히 달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40일 동안 이 주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우리 각자는 삶의 목적과 목표를 갖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일생 동안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후에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체포된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군사들에게 들려 영문 안으로 끌려 가다가 층대 위에 서서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손짓하여 소동하는 백성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에 자신의 간증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3).” 길리기아 성의 수도였던 다소는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뛰어났습니다. 그 도시는 아구스도의 스승이 된 스토익(Stoics)학파의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를 비롯하여 뛰어난 철학자를 배출하여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15세쯤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 선생 중에서 학식과 인격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스승 이상으로 율법에 대하여 열정을 나타냈습니다(갈 1:14). 바울은 그 가문, 교육, 학식,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유학을 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열심을 내는 이유가 물질적인 풍요, 성공, 자기 성취, 미래의 안정 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공, 성취를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이 생각할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옛날부터 내려온 유전과 율례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외국에 까지 쫓아다니면서 크리스챤들을 색출하여 박멸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크리스챤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길을 재촉하여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9절을 보십시오.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바울이 다메섹 근방에 이르렀을 때는 대낮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눈을 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문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는 핍박자 사울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하시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사랑이 가득한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의 영적 무지를 안타까워하시는 목자의 음성이었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바울은 두려움 가운데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그는 찬란한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역사 이래로 모든 구도자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창조주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자신을 친히 계시해 주십니다. 특히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십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바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크리스챤들을 핍박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열심을 내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달려왔는데 그것이 사실은 잘못된 투쟁이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이 투쟁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캄캄한 동굴에서 나와 밝고 환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두움에서 나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분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로 그때까지 박해한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맞아들였습니다(갈 1:15,16). 바울은 회심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무지와 불신앙의 죄 중에 있을 때, 그는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를 보고 믿음과 신령한 지식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은 바울 한 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 가장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10a절을 보십시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바울은 이제까지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무지 가운데서 무지막지한 열심을 내어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달려왔습니다. 그가 율법을 배웠지만 장로들의 유전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전통을 따라서, 전통을 유지하고자 살아왔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치 않게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인생 방향이 필요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고 나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이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삶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으로, 자기 영광을 구하던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것을 하라고 당장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0b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주님은 경건한 주의 종 아나니아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한 바 바울이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목적 40일 캠페인을 하는 동안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삶에 두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일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결단하시고 새벽기도에도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요회별로 하는 말씀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알고자 하는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핍박자 사울이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울에게 나아갔습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 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바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시면서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가장 큰 뜻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목적 40일’ 캠페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 새 피조물, 영적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 진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에 새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이 될 것입니다.
둘째, ‘저 의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저주를 받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를 닮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훈련을 받습니다.
셋째, 바울은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비추어서 성경 말씀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습니다. 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이요 생명의 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도록 하심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사를 활용하여 사역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교회를 섬기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목적 40일 기간 동안 캠퍼스의 많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요회 모임에 동참시킬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기쁨과 환희, 비전, 그 놀라운 축복과 능력, 그리고 변화된 삶을 이웃과 전 세계에 나누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고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은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방향을 갖고 계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죄를 고난을 받으면서 갚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주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후에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지 않고 고향 다소에서 약 10년 동안 상당히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의 핍박으로 흩어졌던 개척자들에 의해서 안디옥에서 이방인에 대한 전도 붐이 일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가지고서는 도저히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둘이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 사상 획기적인 이방인 전도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크리스챤 즉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확대되어 바울은 1차, 2차,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고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로마에까지 가서 일대일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서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회심하고 인생의 방향을 잡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과 종교적인 출세를 위해서 살다 보니 독사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해를 끼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핍박자요 살인자를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제자 양성가요 선교사로 바꾸셨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을 드림으로 일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한 가지 선택된 목적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셀 수없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의 삶은 불사조와 같았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앞으로 40일 동안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라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매일 한 과씩 읽고, 요회에서 그룹으로 공부하고 나누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섯 주간 동안 그에 기초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 40일 기간이 저와 어려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요회 모임이 활성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서 훈련을 받고, 받은 바 은사를 발견하여 사역을 감당하고, 사명인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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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회 다운로드 | DATE : 2006-03-05 0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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