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06고전14(13:1-13)/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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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고린도전서 제 14 강 404
말씀 / 고린도전서 13:1-13
요절 / 고린도전서 13:13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을 사랑이라.”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써야 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발휘하여 공동체를 세우고 자신도 의미있는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은사를 가장 풍성하게 발휘한다고 해도 사랑의 결핍을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쟁, 제물 먹는 문제, 음행하는 자를 징계하지 않는 문제, 은사를 남용하거나 투기하는 문제, 모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문제 등 참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가 사랑이 없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회복하도록 깨우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사랑의 필요성을 말하고, 사랑의 본질과 영원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랑이 없으면(1-3)
첫째,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는 자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자기들은 신령한 말을 하며, 하나님과 직통한다고 하며 주의 종들과 기록된 성경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또 ‘천사의 말’은 웅변을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말 잘하는 사람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데모스테네스나 유리피데스와 같은 웅변가들은 우상시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말 잘하는 달변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방언이나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일 뿐이고 고통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재미있고 유우머있는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해도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은혜를 끼쳐야 하고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한 마디 말도 천금과 같이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바울은 예언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예언이란 점쟁이들이 하는 것 같이 자기 딸이 입시에 붙을 것인지, 결혼을 언제 어떤 사람과 할 것인지, 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택일을 언제 해야 하는지 등등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능력입니다. 곧 신령한 비밀과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능력이란 한 마디로 영적인 세계를 깊이 통찰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사람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지적인 교만에 빠져서 남을 무시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심지어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불타는 지식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몸으로 때울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희생과 섬김이 뒤따르지만 사랑이 없이도 자기 영광을 위해, 또 자기 의와 자기만족을 구하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음에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하고나서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이상을 볼 때 사랑은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고 동기가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에로스’나 형제 우애를 말하는 ‘필레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된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적인 개념이나 사랑의 표현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그것은 무가치한 자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그 사랑을 받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주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받는 쪽의 공로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요일4:19).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요일3:16). 또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롬5: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재능과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이 은사를 사랑으로 봉사하는데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목자 생활은 비참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캠퍼스에 올라가 전도를 하고 양을 심방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합니다. 젊음을 불사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양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명감, 의무감 때문에 자기 청춘을 불사른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또 사랑이 없는 요회 모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합니까? 목자가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를 전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기계에 기름이 떨어지면 삑삑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납니다. 서로 부딪히고 깨어져 마모가 심합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는 모임에는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동역자들이 인간 문제에 시달려 힘을 다 빼앗기고 열매 맺을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충만한 곳에 생명이 자라게 하시고, 아름다운 생명의 꽃을 피우게 하십니다.
Ⅱ. 사랑의 본질(4-7)
사랑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그렇게 중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묘사하는 사랑의 특성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 읽어보겠습니다. 다음에는 나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4a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말은 어려운 환경을 참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참는 것입니다. 남에게 배신을 당한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자존심이 상할 때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을 수 있습니까? 확 풀어버리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거역하는 자들을 참으셨습니다. 이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저나 여러분이나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서 적절히 징계해야 하지만 사실 훨씬 더 많이 참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참는다는 말은 분한 감정을 꾹꾹 눌러 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견디다 못해서 한꺼번에 폭발해 버립니다. 참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그 악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시카고의 문누가 선교사님은 은행 지점장으로 있으면서 한 중국계 여인이 자기를 모함하는 이메일을 상관들과 동료들에게 돌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었지만 보복하지 아니하고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보복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선하게 대접하는 문누가 선교사님의 태도로 인해서 감동을 받고 그의 좋은 조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함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 생명을 살리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사나운 말이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입니다.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람도 다 품고 섬길 수 있을 만큼 온유합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편하게 해 줍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습니다(민12:3). 그러나 모세가 원래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혈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야생마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대적하는 일 앞에서 혈기를 부리며 싸우지 않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주 율법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두가 판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율법적인 마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가가 전도 여행 중에 도망간 문제 때문에 바나바와 크게 싸우고 자기를 키워 준 바나바와 갈라졌습니다(행15:39).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훈련을 통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에베소를 개척할 때 양떼들을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행20:19). 예수님께서도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5:5). 사랑은 모든 사람을 품을 만한 온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말합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투기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마음이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입니다(요일3:12, 마27:18).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성공을 보면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며 실패를 같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투기하는 마음의 뒤에는 자랑하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또한 낮은 자존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면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떤 분이 전요한 목자님께 “목자님 발음이 안 좋아요” 했을 때 옆에 계셨던 마더 배리 선교사님이 “전요한 목자님은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잘해요”라며 격려해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분의 이런 사랑에 기초한 격려와 동역이 우리 UBF를 살리고 하나가 되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하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좋은 매너가 없는 사람입니다. 곧 예절이 바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무례한 사람들은 대개 자기중심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지 않습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원수를 만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이번에 우리 송프란시스 목자님이 사촌을 위해서 간의 65%를 떼어주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자기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분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사 속히 온 몸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생명의 열매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내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요한은 성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를 환영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마을을 태워 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고 우리가 다른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운 요한은 나중에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성내는 것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어릴 때는 골을 부리면 부모들이 귀찮으니까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이런 것이 습관이 되어 조금만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생기면 성을 내며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적이 달성되면 성을 내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성을 냄으로써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 것인지 조금만 생각하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넷째, 사랑은 남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5절 마지막에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곧 상대방의 잘못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 해 주었던 일이나 고마웠던 일은 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잘못했던 일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음에서 항상 분노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괴롭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록된 모든 나쁜 인상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란 마음에 기록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다시는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사랑이란 상대방의 좋은 점만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또 그를 만나면 즐겁고 늘 가까이 있고 싶어집니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링컨은 그의 자서전에서 ‘남의 친절은 잊지 않고, 남의 잘못은 기억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 성자였습니다. 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에 기초한 사랑은 사람을 병들이지만 진리와 지식에 기초한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울은 이제 종합적으로 말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이란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요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마음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대체로 성격이 급합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는 잘하는데 반대로 참는 것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내게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마18:22).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의심치 않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믿게 됩니다. 그가 속이려고 할 때도 일부러 속아줌으로 믿어줍니다. 그럴 때 사람을 얻습니다. 사랑은 그런 점에서 바보와 같습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바란다는 것은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끝까지 소망을 두고 키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견딘다는 말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원수들을 정복하는 인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도 변치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양떼들의 생명을 살리고 동역자들과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참으로 사랑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랑에서 아주 미숙한 자인 것을 깨닫고 부지런히 배우고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Ⅲ. 끝없는 사랑(8-13)
8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은 그 예언이 성취되면 그칩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폐해집니다. 현재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폐해지기 마련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 아이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유치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사물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를 생각지 못합니다. 또 어린 아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만 관심을 갖지 그 깊은 내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방언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신비한 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교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제 장성한 지혜를 가지고 분별력있는 성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때의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으로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현재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은 희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얼굴과 얼굴을 온전히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이나 지식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삶의 이유와 의미를 줍니다. 그런데 사랑은 신앙 생활의 목표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기독교 진리의 세 기둥입니다. 어느 한쪽이 상실될 경우 온전한 신앙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히 매는 띠니라(골3:14).” 결론적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진리를 실천하여 예수님을 알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말씀 / 고린도전서 13:1-13
요절 / 고린도전서 13:13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을 사랑이라.”
지난 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써야 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발휘하여 공동체를 세우고 자신도 의미있는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은사를 가장 풍성하게 발휘한다고 해도 사랑의 결핍을 보상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분쟁, 제물 먹는 문제, 음행하는 자를 징계하지 않는 문제, 은사를 남용하거나 투기하는 문제, 모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문제 등 참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가 사랑이 없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회복하도록 깨우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사랑의 필요성을 말하고, 사랑의 본질과 영원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랑이 없으면(1-3)
첫째, 사랑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는 자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자기들은 신령한 말을 하며, 하나님과 직통한다고 하며 주의 종들과 기록된 성경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또 ‘천사의 말’은 웅변을 말합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말 잘하는 사람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데모스테네스나 유리피데스와 같은 웅변가들은 우상시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말 잘하는 달변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방언이나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소음일 뿐이고 고통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재미있고 유우머있는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해도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은혜를 끼쳐야 하고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한 마디 말도 천금과 같이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바울은 예언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예언이란 점쟁이들이 하는 것 같이 자기 딸이 입시에 붙을 것인지, 결혼을 언제 어떤 사람과 할 것인지, 행사를 하려고 하는데 택일을 언제 해야 하는지 등등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능력입니다. 곧 신령한 비밀과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능력이란 한 마디로 영적인 세계를 깊이 통찰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사람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지적인 교만에 빠져서 남을 무시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공허하고 심지어 악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불타는 지식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몸으로 때울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희생과 섬김이 뒤따르지만 사랑이 없이도 자기 영광을 위해, 또 자기 의와 자기만족을 구하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음에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하고나서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이상을 볼 때 사랑은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고 동기가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에로스’나 형제 우애를 말하는 ‘필레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된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적인 개념이나 사랑의 표현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그것은 무가치한 자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그 사랑을 받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주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받는 쪽의 공로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습니다(요일4:19).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요일3:16). 또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롬5: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재능과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이 은사를 사랑으로 봉사하는데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목자 생활은 비참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캠퍼스에 올라가 전도를 하고 양을 심방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합니다. 젊음을 불사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양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명감, 의무감 때문에 자기 청춘을 불사른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또 사랑이 없는 요회 모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합니까? 목자가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를 전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기계에 기름이 떨어지면 삑삑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납니다. 서로 부딪히고 깨어져 마모가 심합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는 모임에는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동역자들이 인간 문제에 시달려 힘을 다 빼앗기고 열매 맺을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충만한 곳에 생명이 자라게 하시고, 아름다운 생명의 꽃을 피우게 하십니다.
Ⅱ. 사랑의 본질(4-7)
사랑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그렇게 중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묘사하는 사랑의 특성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말을 넣어 읽어보겠습니다. 다음에는 나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4a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말은 어려운 환경을 참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참는 것입니다. 남에게 배신을 당한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오해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자존심이 상할 때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을 수 있습니까? 확 풀어버리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져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거역하는 자들을 참으셨습니다. 이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저나 여러분이나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서 적절히 징계해야 하지만 사실 훨씬 더 많이 참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참는다는 말은 분한 감정을 꾹꾹 눌러 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견디다 못해서 한꺼번에 폭발해 버립니다. 참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그 악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시카고의 문누가 선교사님은 은행 지점장으로 있으면서 한 중국계 여인이 자기를 모함하는 이메일을 상관들과 동료들에게 돌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었지만 보복하지 아니하고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보복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선하게 대접하는 문누가 선교사님의 태도로 인해서 감동을 받고 그의 좋은 조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함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아 생명을 살리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사나운 말이 길들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입니다.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람도 다 품고 섬길 수 있을 만큼 온유합니다.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편하게 해 줍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습니다(민12:3). 그러나 모세가 원래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혈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야생마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통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대적하는 일 앞에서 혈기를 부리며 싸우지 않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주 율법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두가 판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율법적인 마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가가 전도 여행 중에 도망간 문제 때문에 바나바와 크게 싸우고 자기를 키워 준 바나바와 갈라졌습니다(행15:39).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훈련을 통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에베소를 개척할 때 양떼들을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행20:19). 예수님께서도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5:5). 사랑은 모든 사람을 품을 만한 온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말합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투기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마음이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입니다(요일3:12, 마27:18).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성공을 보면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며 실패를 같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투기하는 마음의 뒤에는 자랑하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또한 낮은 자존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면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떤 분이 전요한 목자님께 “목자님 발음이 안 좋아요” 했을 때 옆에 계셨던 마더 배리 선교사님이 “전요한 목자님은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잘해요”라며 격려해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분의 이런 사랑에 기초한 격려와 동역이 우리 UBF를 살리고 하나가 되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하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좋은 매너가 없는 사람입니다. 곧 예절이 바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무례한 사람들은 대개 자기중심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지 않습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원수를 만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이번에 우리 송프란시스 목자님이 사촌을 위해서 간의 65%를 떼어주었습니다. 이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자기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분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사 속히 온 몸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생명의 열매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내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요한은 성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를 환영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마을을 태워 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고 우리가 다른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운 요한은 나중에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성내는 것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어릴 때는 골을 부리면 부모들이 귀찮으니까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이런 것이 습관이 되어 조금만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생기면 성을 내며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목적이 달성되면 성을 내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성을 냄으로써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 것인지 조금만 생각하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넷째, 사랑은 남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5절 마지막에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곧 상대방의 잘못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 해 주었던 일이나 고마웠던 일은 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잘못했던 일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음에서 항상 분노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괴롭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록된 모든 나쁜 인상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란 마음에 기록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다시는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사랑이란 상대방의 좋은 점만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또 그를 만나면 즐겁고 늘 가까이 있고 싶어집니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링컨은 그의 자서전에서 ‘남의 친절은 잊지 않고, 남의 잘못은 기억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 성자였습니다. 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에 기초한 사랑은 사람을 병들이지만 진리와 지식에 기초한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울은 이제 종합적으로 말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이란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요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마음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대체로 성격이 급합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는 잘하는데 반대로 참는 것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내게 범죄한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마18:22).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의심치 않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믿게 됩니다. 그가 속이려고 할 때도 일부러 속아줌으로 믿어줍니다. 그럴 때 사람을 얻습니다. 사랑은 그런 점에서 바보와 같습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바란다는 것은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끝까지 소망을 두고 키우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견딘다는 말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원수들을 정복하는 인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조건 속에서도 변치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양떼들의 생명을 살리고 동역자들과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참으로 사랑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랑에서 아주 미숙한 자인 것을 깨닫고 부지런히 배우고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Ⅲ. 끝없는 사랑(8-13)
8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은 그 예언이 성취되면 그칩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폐해집니다. 현재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폐해지기 마련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 아이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유치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사물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 지를 생각지 못합니다. 또 어린 아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만 관심을 갖지 그 깊은 내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방언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신비한 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교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제 장성한 지혜를 가지고 분별력있는 성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때의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으로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현재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은 희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얼굴과 얼굴을 온전히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이나 지식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삶의 이유와 의미를 줍니다. 그런데 사랑은 신앙 생활의 목표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기독교 진리의 세 기둥입니다. 어느 한쪽이 상실될 경우 온전한 신앙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히 매는 띠니라(골3:14).” 결론적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진리를 실천하여 예수님을 알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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