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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06 고전13강(12:1-31)/ 한 몸과 많은 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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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771회 작성일 06-02-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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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고린도전서 제 13 강                                                178
말씀 / 고린도전서12:1-31
요절 / 고린도전서12:12

 한 몸과 많은 지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인간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소유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진정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의 은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통일성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영적 질서가 파괴되고, 교회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의 중심 사역이 무엇이며,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과 다양성(1-11)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신령한 것이란 성령의 은사를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말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고린도는 헬라 문화의 본거지로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 못하는 우상에게 절하며 도움을 구하였으나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셔서 친히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분간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먼저 성령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줍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당시 그리스도인이 재판에 붙여졌을 때 “예수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하면 즉시 석방되었습니다.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신령한 은사를 받았고, 굉장한 표적을 행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악령도 방언을 하게 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며,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성령의 중심 사역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과 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라는 뜻이 80%정도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인생의 주관자를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충성하고자 하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들을 도울 때 성경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은사는 아주 여러 가지입니다. 은사는 누가 나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아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사를 주신 분은 한 성령이십니다. 또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직임이 있습니다. 직임이란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는 직분을 말합니다. 그러나 직분을 맡기신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의 역사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성령은 주의 영이시오, 주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온갖 신령한 은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각양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자기 영광을 구하기 쉽습니다. 이는 알고 보면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열등감 또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로서의 건강한 자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사용하는 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엡4:12절에 보면 성령의 은사는 첫째, 성도들을 온전케 하려는 것입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성숙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을 좀 더 성숙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연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나 직임을 받은 사람은 그 만큼 더욱 더 힘써 다른 사람을 돕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만해져서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판단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은사를 받은 자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교회에 덕을 끼치고 유익을 끼쳐야 함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8-11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여기에는 아홉 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이 은사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은사입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그리고 예언하는 은사입니다. 지혜란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약1:5). 우리가 양을 키우고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지식이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이해, 거룩한 것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잘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 예언이란 점쟁이처럼 미래의 일을 알아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잘 알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고전14:3절에도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들을 권면하며, 안위하는 일이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설교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성도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며,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복음 진리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능력의 은사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영 분별하는 은사 등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는 봉사를 목적으로 주신 믿음의 은사입니다. 곧 산을 옮기는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데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일의 김예레미야 선교사님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미국 MSU 수양회를 가고 직장을 얻고 양을 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그 당시는 아주 중요한 은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출15:26). 또 능력 행하는 은사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셋째는 언어의 은사입니다. 각종 방언함과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입니다. 방언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방언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였습니다(행2:4-11).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임한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통역의 은사가 필요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방언의 은사가 최고의 은사라고 생각하며 교만히 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장에서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자세히 권면합니다.

  또 성령의 은사는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잘 다스리는 은사 등 참으로 은사는 다양합니다. 요즈음은 컴퓨터나 기계를 잘 다루는 은사, 음악의 은사, 예술에 관계된 은사 등도 많이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세우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필요 없는 은사는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은사는 한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것입니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한 성령께서 한 목적으로 주셨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일을 하게하고,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은사를 불 일 듯 하게 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운명적이거나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복음 역사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자기가 즐겁기 위해서 탁구를 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목자님들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 탁구를 열심히 칩니다. 어떤 목자님은 한 가지를 끝까지 분석하고 해석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양들을 잘 데려오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양들을 사랑과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물질 관리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서 섬기는 은사가 있고, 또 어떤 분은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잘 감당해 주고 문제를 수습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발견하고 사용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고 선교 사명을 이루는데 써야 하겠습니다.

Ⅱ.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12-31)

  12절을 보십시오. 우리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지체가 있으나 몸은 하나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몸이 되시고,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붙은 여러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몸이 되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출신은 다르지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 세례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닮고 배우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 붙은 지체로서 어떤 마음 자세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까?

첫째,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몸에는 머리가 붙어 있고 얼굴에는 눈, 코, 귀, 입이 있습니다. 또 몸에는 팔다리가 붙어 있고 거기에는 각각 손과 발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각 지체는 그 역할이 다릅니다. 손의 역할과 발의 역할이 다르고, 눈의 역할이 다르고 귀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런데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합니다. 발과 귀는 손과 눈에 비해서 자신이 열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열등하게 살 바에야 떨어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발이 손이 하는 섬세한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역사에 있어서 발이 얼마나 귀합니까? 발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하고 노래했습니다(롬10:15). 또 귀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발과 귀도 소중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17-20절을 보십시오. 온 몸이 눈이면 어떻게 들을 수 있으며, 냄새는 어떻게 맡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는 이런 직분을 주셨느냐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대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우상을 숭배하던 비참한 자들이었음을기억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둘째, 자기의 역할을 분명히 발견해야 합니다. 발은 발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그 일이 자기 몸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발로서의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몸에 봉사하는 길이요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그리할 때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기쁨으로 봉사하며,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둘째,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21절은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눈이 교만하여 손더러 너는 쓸데 없다고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내게 쓸데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은사만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사실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름답지 못한 지체가 더욱 아름다운 옷을 입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고르게 하십니다. 부족한 자체에게 존귀를 더하시고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게 하십니다.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자기 지체가 귀하다면 다른 지체도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각 지체는 서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26,27절을 보십시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지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형제 자매들은 몸 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 몸에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다 아픕니다. 눈이 발에게 쓸데없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발에 가시가 박혀 보십시오. 눈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픕니다. 또 손이 그림을 잘 그려서 미전에 입상해 보십시오. 손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영광을 받습니다. 이처럼 지체의식이란 다른 지체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며, 다른 지체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한 지체가 범죄하고 고통을 당하는데도 냉소를 보내며, 판단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죄악입니다. 또 한 지체가 칭찬을 듣고 영광을 얻는데도 투기하는 마음으로 언짢아하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가 지체의식을 가지고 자기 역할을 다 할뿐더러 서로 돌아보고, 함께 동고동락하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31절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교회를 세운 직임들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사도, 선지자, 교사는 말씀을 맡은 직분들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 예언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돕고,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그 다음은 능력 행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은사와 신유의 은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직임입니다.  서로 돕고 다스리는 은사입니다. 그 다음은 방언의 은사입니다. 바울이 구태여 첫째, 둘째, 셋째, 그 다음, 그 다음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에 입각해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봉사하며, 덕을 세우는 순서대도 서열을 매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29,30)” 다 눈이 되고 다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다 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란 더욱 많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봉사할 수 있는 은사를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더욱 충성하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사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는 역사입니다. 이를 통해서 민족과 신분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교회에 봉사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합니다. 그리고 통일성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가 받은 직임을 다하며 덕을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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