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06 고전10강(9:1-27)/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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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고린도전서 제 10 강 378
말씀 / 고린도전서 9:1-27
요절 / 고린도전서 9:19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성공한 사람들은 목표가 분명했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얻는 일에 힘썼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이지만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손해를 보아도, 무시를 받아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배우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서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생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고자 투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가 죽는 투쟁을 감당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을 얻었고 하나님의 역사에 기리 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 양들에 대한 사랑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권리와 권리 포기(1-18)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증거합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자신이 사도요 자유자요 부활하신 주를 본 자요 주 안에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장본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라는 것과 바울이 사도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사도임을 단언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자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당시 베드로나 주의 형제 야고보는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수비를 받으며 양떼를 섬겼습니다. 바울이나 바나바도 그들과 같이 결혼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생계를 위해 일반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아니하고 복음 역사를 섬길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식으로 교회에 조금이라도 짐이 되는 것을 피했습니다. 바울은 개척 교회가 궤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매우 힘겨운 환경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습니다. 아열대 도시인 에베소에서는 통상 오전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바울은 천막 만드는 자로서 온종일 육체 노동을 한창 하다가 말고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했습니다(행19:9). 바울은 그같이 지치게 만드는 이삼년 간의 에베소 생활이 끝날 무렵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였다” 말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도 똑같이 했습니다. 당시 마게도냐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빈둥거리는 ‘종말론적 식객들’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이 고된 노동을 하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립적으로 사역을 섬김으로 복음 전도를 힘있게 만들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군인은 무기와 군복을 받고 먹는 것과 자는 것도 지원을 받습니다. 세상에 자기 돈 내고 군대 생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일을 재배하는 농부는 자기가 생산한 포도나 사과를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 않습니다. 양을 기르고 그 젖을 먹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공정하고 당연한 권리입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9)” 일하는 소에게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소들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법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하는 일군들도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합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모든 영적인 복들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영적 축복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확실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헌물’을 받을 수 있는 이런 권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2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며 참았습니다. 바울이 이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에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거치고 방해될 만한 행동은 모두 피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다시 구약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과 예물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 레위인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물과 예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실 때 전대나 주머니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시고 “일군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10, 눅10:7,8). 그러나 바울은 복음 역사를 위하여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반복하여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기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립하여 복음을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양떼를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을 큰 긍지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자비량 선교사, 전문인 사역자로서의 삶을 큰 자랑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해안가 선교를 하던 시대에 허드슨 테일러는 내지 선교가 필요함을 깨닫고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 본부에서는 내륙은 위험하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선교비를 끊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내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믿음 선교회를 만들었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하면서 선교사를 다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들이 철수한 상황에서 허드슨 테일러가 뿌려 놓은 씨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크리스챤이 1억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을 허드슨 테일러가 이어 받았고 또 우리 UBF가 이어받았습니다. IMF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많은 선교사들이 철수하든지 선교 사역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UBF 선교 사역이 줄기차게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평신도 자비량 선교 사역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비량 전문인 선교 사역은 어느 시대나 가장 강력한 선교 사역을 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전문인 사역자들을 세워서 복음 역사를 확장하는 것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바울은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특권으로 인해서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복음 전함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큰 상급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장차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바울(19-23)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은 물질에 관계된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유하였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종된 자세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은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는 뜨겁고 적극적인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종의 태도는 하나님의 본체되시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종의 형체를 가지사 스스로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 것입니다. 빌2:6-8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사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종의 도를 잘 배워서 많은 영혼들을 섬기고 살리는데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구원을 얻는데 할례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행16:3). 이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까다로운 율법을 지키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차원 더 높여서 자신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양심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는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할 만큼 양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자기 권리를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지옥에 떨어질 많은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니느라(딤전2: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고통하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죽고, 섬김 받고자 하는 본성, 쉬고자 하는 마음,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을 다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양들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옷을 입어도 양들을 생각하면서 입고, 운동도 양들을 위해서 했습니다. 바울은 키가 작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양들을 위해서 농구를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은 양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뿐아니라 자기의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다 드릴 준비가 늘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꿈과 욕심, 자기 육신의 쾌락과 안일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또 때로는 문제의식없이 다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고자 할 때는 갑자기 문제의식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을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다 드리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합니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에게 얼마나 본이 되는 삶입니까? 우리가 바울의 사랑과 섬김의 도를 잘 배워서 올해 학생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나고 예수님을 깊이 배우도록 잘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바울의 선택과 집중(24-27)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몇몇 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쟁을 해야 하는가를 증거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한 사람뿐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2년마다 이스무스(Isthmu)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는 당시 올림픽에 버금가는 큰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주로 경마, 육상, 마차 경주, 레스링, 권투 종목이 중심이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물론이고 이 경기에서도 챔피온 한 사람에게만 면류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이 경기의 선수로 선발되면 10개월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들은 먼저 규칙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고, 코치의 지도와 훈련, 식사, 잠, 휴식, 오락 기타 일체에 관하여 통제를 받았으며, 매도 수 없이 맞았습니다. 추위와 더위와 싸우며 훈련을 쌓아야 했습니다. 체중 조절을 위해서 먹고 싶은 음식도 삼가야 합니다. 이처럼 절제하고, 강훈련을 쌓아야 세계적인 챔피온이 될 수 있습니다.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절제하는데 우리는 썩지 않을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더욱 절제해야 합니다. 학생 목자들은 A 학점을 따고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서경 센터의 이다윗(용주) 목자님은 평신도 목자로서 직장 생활에 승리하면서 학생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직장에 출근해서 한 시간씩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꽉 짜여진 스케줄을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오줌 누는 것도 절제하면서 캠퍼스 심방을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절제된 삶을 살면서 한 가지 일에 집중하였을 때 그는 대기업의 재무담당이사(CFO)가 되었으며 동시에 많은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자고 싶은 대로 다 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면류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얼마나 투쟁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람이 헛된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목표가 없이 달리고,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사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의 온 삶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자신의 몸을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몸을 종으로 부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였습니다(롬8:13).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일생을 보냈는데 뼈아픈 자기 훈련을 통해서 믿음의 경주를 다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종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썩지 않는 상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주님에 대한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자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양떼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하고 믿음의 경주를 다 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전서 9:1-27
요절 / 고린도전서 9:19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성공한 사람들은 목표가 분명했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얻는 일에 힘썼습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이지만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손해를 보아도, 무시를 받아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배우고,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서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생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고자 투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가 죽는 투쟁을 감당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을 얻었고 하나님의 역사에 기리 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 양들에 대한 사랑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권리와 권리 포기(1-18)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증거합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자신이 사도요 자유자요 부활하신 주를 본 자요 주 안에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장본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라는 것과 바울이 사도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사도임을 단언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자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당시 베드로나 주의 형제 야고보는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수비를 받으며 양떼를 섬겼습니다. 바울이나 바나바도 그들과 같이 결혼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생계를 위해 일반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아니하고 복음 역사를 섬길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식으로 교회에 조금이라도 짐이 되는 것을 피했습니다. 바울은 개척 교회가 궤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매우 힘겨운 환경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습니다. 아열대 도시인 에베소에서는 통상 오전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바울은 천막 만드는 자로서 온종일 육체 노동을 한창 하다가 말고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했습니다(행19:9). 바울은 그같이 지치게 만드는 이삼년 간의 에베소 생활이 끝날 무렵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였다” 말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도 똑같이 했습니다. 당시 마게도냐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빈둥거리는 ‘종말론적 식객들’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이 고된 노동을 하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립적으로 사역을 섬김으로 복음 전도를 힘있게 만들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군인은 무기와 군복을 받고 먹는 것과 자는 것도 지원을 받습니다. 세상에 자기 돈 내고 군대 생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일을 재배하는 농부는 자기가 생산한 포도나 사과를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 않습니다. 양을 기르고 그 젖을 먹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공정하고 당연한 권리입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9)” 일하는 소에게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소들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종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법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하는 일군들도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합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모든 영적인 복들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영적 축복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확실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헌물’을 받을 수 있는 이런 권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2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며 참았습니다. 바울이 이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에서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거치고 방해될 만한 행동은 모두 피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다시 구약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과 예물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 레위인들에게는 땅을 나누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물과 예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이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실 때 전대나 주머니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시고 “일군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10, 눅10:7,8). 그러나 바울은 복음 역사를 위하여 이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반복하여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기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립하여 복음을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양떼를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을 큰 긍지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자비량 선교사, 전문인 사역자로서의 삶을 큰 자랑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해안가 선교를 하던 시대에 허드슨 테일러는 내지 선교가 필요함을 깨닫고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 본부에서는 내륙은 위험하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선교비를 끊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내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믿음 선교회를 만들었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하면서 선교사를 다 내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들이 철수한 상황에서 허드슨 테일러가 뿌려 놓은 씨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크리스챤이 1억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바울의 선교 전략을 허드슨 테일러가 이어 받았고 또 우리 UBF가 이어받았습니다. IMF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많은 선교사들이 철수하든지 선교 사역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UBF 선교 사역이 줄기차게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평신도 자비량 선교 사역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비량 전문인 선교 사역은 어느 시대나 가장 강력한 선교 사역을 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전문인 사역자들을 세워서 복음 역사를 확장하는 것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바울은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특권으로 인해서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복음 전함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큰 상급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장차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바울(19-23)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은 물질에 관계된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유하였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종된 자세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은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는 뜨겁고 적극적인 사랑의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종의 태도는 하나님의 본체되시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종의 형체를 가지사 스스로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 것입니다. 빌2:6-8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사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종의 도를 잘 배워서 많은 영혼들을 섬기고 살리는데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구원을 얻는데 할례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행16:3). 이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까다로운 율법을 지키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 차원 더 높여서 자신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양심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는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할 만큼 양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자기 권리를 깨끗이 포기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지옥에 떨어질 많은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니느라(딤전2: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고통하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죽고, 섬김 받고자 하는 본성, 쉬고자 하는 마음,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을 다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양들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옷을 입어도 양들을 생각하면서 입고, 운동도 양들을 위해서 했습니다. 바울은 키가 작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양들을 위해서 농구를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은 양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뿐아니라 자기의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다 드릴 준비가 늘 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꿈과 욕심, 자기 육신의 쾌락과 안일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또 때로는 문제의식없이 다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고자 할 때는 갑자기 문제의식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을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다 드리고자 하는 바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합니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에게 얼마나 본이 되는 삶입니까? 우리가 바울의 사랑과 섬김의 도를 잘 배워서 올해 학생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나고 예수님을 깊이 배우도록 잘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바울의 선택과 집중(24-27)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몇몇 사람을 얻기 위해 얼마나 투쟁을 해야 하는가를 증거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한 사람뿐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2년마다 이스무스(Isthmu)경기가 열렸습니다. 이는 당시 올림픽에 버금가는 큰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주로 경마, 육상, 마차 경주, 레스링, 권투 종목이 중심이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물론이고 이 경기에서도 챔피온 한 사람에게만 면류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이 경기의 선수로 선발되면 10개월 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들은 먼저 규칙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고, 코치의 지도와 훈련, 식사, 잠, 휴식, 오락 기타 일체에 관하여 통제를 받았으며, 매도 수 없이 맞았습니다. 추위와 더위와 싸우며 훈련을 쌓아야 했습니다. 체중 조절을 위해서 먹고 싶은 음식도 삼가야 합니다. 이처럼 절제하고, 강훈련을 쌓아야 세계적인 챔피온이 될 수 있습니다.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절제하는데 우리는 썩지 않을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더욱 절제해야 합니다. 학생 목자들은 A 학점을 따고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서경 센터의 이다윗(용주) 목자님은 평신도 목자로서 직장 생활에 승리하면서 학생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직장에 출근해서 한 시간씩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꽉 짜여진 스케줄을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오줌 누는 것도 절제하면서 캠퍼스 심방을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절제된 삶을 살면서 한 가지 일에 집중하였을 때 그는 대기업의 재무담당이사(CFO)가 되었으며 동시에 많은 제자 양성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자고 싶은 대로 다 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면류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얼마나 투쟁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람이 헛된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목표가 없이 달리고,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사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집중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의 온 삶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자신의 몸을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몸을 종으로 부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였습니다(롬8:13).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일생을 보냈는데 뼈아픈 자기 훈련을 통해서 믿음의 경주를 다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종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썩지 않는 상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주님에 대한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자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양떼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하고 믿음의 경주를 다 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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