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06신년 4강(민13:1-14:10)/ 그들은 우리 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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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신년 말씀 제 4 강
말씀 / 민수기 13:1-14:10
요절 / 민수기 14:9
그들은 우리 밥이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셔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셔서 세계 만민을 섬기는 성경 선생의 나라, 목자의 나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그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계에 이루어지려면 온전히 헌신된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이런 민족들을 세우시고 세계 선교를 이끌어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지금 선교사 파송은 미국이 가장 많이 했지만 향후 한국이 미국을 대체할 선교 강국이 될 것으로 선교 학자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이 시대의 제사장 나라로 소망을 두고 축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5000년 동안 한반도에 가두어 놓고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축복을 받고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시간 우리 앞에 놓여진 도전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복음 역사에서 승리를 쟁취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에서 족장 한 사람씩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주인 없는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가나안 일곱 족속이 우상 숭배와 인본주의 문화를 꽃 피우며 살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 그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파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전쟁에서 적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3-16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각 지파별로 뽑은 열두 두령을 정탐꾼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지파에서 실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열두 두령 중에는 유다 지파의 갈렙과 에브라임 지파의 호세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호세아를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호세아라는 말은 ‘주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두려움 많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정탐꾼들에게 무슨 임무를 주었습니까? 17-20절을 보면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니면 약한지, 그 거민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땅이 사람 살기에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영이란 성벽이 없는 촌락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옥토인지 박토인지 알아보고 그 증거로 그 땅에서 나는 실과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정탐꾼들을 적지 깊숙이 보내어 적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오도록 한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대한 비전을 백성들에게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최북방 르홉에 이르렀다가 남방 헤브론을 정탐하고 돌아오면서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땄는데 두 사람이 막대기를 꿰어 둘러메어야 했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두령들의 보고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듣던 대로 정말 훌륭한 땅입니다.” 그러자 온 무리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아멘!” 정탐꾼들의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 포도송이와 석류를 좀 보세요. 우리가 본 과일 중에서 가장 크고 맛이 좋습니다. 그뿐입니까? 여기 꿀맛도 좀 보세요. 맛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모두 입을 모아 기뻐했습니다. “아멘!” 거대한 포도송이를 보니 광야 생활의 모든 피곤이 사라지고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소식이 영 떨떠름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땅은 기름지고 젖과 꿀이 흐르지만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은 강하고 성읍이 심히 크고 견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이 기름지고 먹을 것이 풍부한데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건장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도 이러한 것들을 먹고 살면 키도 크고 때깔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 거민들이 강하다는 것은 그 땅의 산물이 그만큼 좋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아낙 자손들 곧 거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남방에 사는 아말렉인, 산지에 사는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들이 모두 강하고,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단 계곡에 거하는 가나안인들이 모두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보고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정탐꾼들 사이에 의견이 어떠했습니까?
첫째, 스스로 메뚜기같이 여긴 열 두령(13:30-14:5)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막강한 민족들이 거대하고 견고한 성읍에서 진을 치고 살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정복할 수 있는가? 라며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때 갈렙이 모세 앞에 나서며 말했습니다. 분명히 정탐하고 온 땅은 똑같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치 다른 땅을 다녀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모세 목자님, 우리는 충분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무시무시한 거인들이 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크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어서 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입니까?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지극히 강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큰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 그것들을 극복하고 남을 스피릿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3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열 두령은 갈렙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애굽 군대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어서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자유를 얻은 것입니까? 그들의 힘으로 홍해를 건넜습니까? 그들이 능력이 있어서 광야 생활동안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들의 힘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앞장서서 인도하시며 싸우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심을 믿고 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땅을 코 앞에 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며 패배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 두령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들이 탐지한 땅을 악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2,33).” 열 두령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심히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앞에서 보고한 것과 정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들과 신장이 장대한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기가 꺾이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거기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네피림은 고대 유명한 용사들이었으나 노아 홍수 때 다 죽었습니다(창6:4). 그런데 아낙 자손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강포한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네피림’이라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열 두령은 아낙 자손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들은 대장부처럼 보이고 자기들은 연약한 메뚜기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너희는 내게 보배와 같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비전을 말씀하시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사 43:4절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존귀하게 여기시고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빳빳한 새 지폐를 주면 받겠습니까? 싫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지폐를 구겨서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이런 지폐라도 받을 생각이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지저분하게 만들었어도 여전히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폐는 여전히 그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낡아도 아무리 모양이 흉해졌어도 돈의 내재가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난관에 부딪히고 시련을 겪습니다. 때로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지폐와 같은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폐가 여전히 가치 있듯이 우리도 여전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나의 허락없이는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노예 백성으로 살아온 그들이 자기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변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살고자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는 행동이 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공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는 타인에게도 그대로 투사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백성들이 보기에도 자기들이 메뚜기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 자신을 생각하면 허무한 존재입니다.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없던 우리의 삶은 죽은 개와 같고 티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14장 8,9절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가나안 땅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대장부들로서 하루라도 빨리 쳐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젖과 꿀을 먹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령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바라보고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쥐새끼 두 마리가 우유 통에 빠졌습니다. 한 마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물속에서도 헤엄치기가 어려운데 우유 통 속에 빠졌으니 나는 죽었구나”생각하였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니 힘이 빠지고 살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한 마리는 내가 우유 통 속에 빠졌는데 우유는 얼마든지 있으니 죽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손발을 놀려서 헤엄을 쳤습니다. 그러자 우유가 버터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믿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 불신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 긍정적으로 볼 것인지, 부정적으로 볼 것인지, 적극적으로 생각하면서 볼 것인지, 소극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열 두령의 정탐 보고를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4:1절을 보십시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더라.” 백성들은 지금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광야 생활의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곡하며 울었습니다. 곡이란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노래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이제가면 언제 오나, 아이고 아이고” 몇몇 사람들의 곡하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은 집단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어둡게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학과 자해를 하고 폭력을 쓰고 자살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싸워 보지도 않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충성된 종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멸시했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3a)”라며 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멸시하는 죄입니다. 불신은 우리 속에서 두려움을 만듭니다. 두려움이 들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없는 것까지 나름대로 만들어서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별 부정적인 생각을 다 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생각하다가 원망하고, 남을 탓을 합니다. 목자 탓, 부모 탓, 친구 탓을 합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반역하게 됩니다.
3b,4절을 보십시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모세를 축출하고 그들의 생각을 대변해 줄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자식들이 사로잡혀 죽는 것보다는 애굽에 들어가 바로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모든 수치와 바로의 채찍과 고역을 잊어버리고, 애굽 생활을 동경하며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크신 권능으로 그들을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구속의 은혜를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백성들의 배은망덕한 행동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말할 수 없이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을 상대로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윗도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시109:4). 모세와 아론은 간절하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둘째, 원수를 밥으로 여긴 여호수아와 갈렙(6-10)
13:30절에 보면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습니다. 갈렙은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다고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고자 했습니다. 또한 열 두령의 말을 듣고 낙심하여 모세를 원망하며 밤새도록 통곡하며 우는 백성을 보고 여호수아와 함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7).”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탐지한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 아니라 심히 아름다운 땅임을 증거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한 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사명을 맡기실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출3:8).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백성들에게도 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리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긍정적이고 밝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는 여호와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갈렙은 백성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고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9)” 약속의 땅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여호와를 거역하면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길은 그 땅 거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갈렙이 볼 때 그들의 보호자는 이미 그들을 떠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원수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차려 놓은 밥상이요, 가서 먹기만 하면 되는 이스라엘의 밥이었습니다. 밥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밥은 없어서 못 먹지 차려 놓은 밥을 누가 싫어합니까? 차려 놓은 밥을 보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청년의 때는 돌을 씹어 삼켜도 소화를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9절을 영어로 보면 “We will swallow them up”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을 삼켜 버리자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꿩이 있는데 털도 뽑지 않고 먹어 버리고자 하는 호기가 서려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에게 땅에 있는 각색 짐승을 보여 주시면서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새 학기에 우리 앞에는 수많은 새 양들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새롭게 양들과 관계성을 맺고자 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성을 맺다가 실패한 경험으로 인해서 양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요일4:18). 우리가 싸워야 할 존재는 내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나와 양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데 따르는 두려움을 내어 쫓기를 기도합니다. 실제로 캠퍼스의 양들은 자신들을 양육해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생명의 말씀이 있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목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음을 바쳐 헌신할 인생의 목적을 가르쳐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희망찬 미래가 펼쳐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공부하여 실력을 기르고 정복해야 할 전공 분야들이 있습니다. 2007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계 8000개의 캠퍼스는 심히 아름답습니다. 현재는 세계 2000개 캠퍼스에만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한국 캠퍼스만 바라볼 것이 아닙니다. 세계 캠퍼스를 바라보고 그 땅을 개척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북한 땅도 복음으로 정복하여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민족이 온전히 드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말씀 / 민수기 13:1-14:10
요절 / 민수기 14:9
그들은 우리 밥이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셔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셔서 세계 만민을 섬기는 성경 선생의 나라, 목자의 나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그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계에 이루어지려면 온전히 헌신된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이런 민족들을 세우시고 세계 선교를 이끌어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지금 선교사 파송은 미국이 가장 많이 했지만 향후 한국이 미국을 대체할 선교 강국이 될 것으로 선교 학자들은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이 시대의 제사장 나라로 소망을 두고 축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5000년 동안 한반도에 가두어 놓고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축복을 받고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시간 우리 앞에 놓여진 도전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복음 역사에서 승리를 쟁취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에서 족장 한 사람씩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주인 없는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가나안 일곱 족속이 우상 숭배와 인본주의 문화를 꽃 피우며 살고 있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 그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파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전쟁에서 적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3-16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각 지파별로 뽑은 열두 두령을 정탐꾼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각 지파에서 실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열두 두령 중에는 유다 지파의 갈렙과 에브라임 지파의 호세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호세아를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호세아라는 말은 ‘주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두려움 많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정탐꾼들에게 무슨 임무를 주었습니까? 17-20절을 보면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니면 약한지, 그 거민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땅이 사람 살기에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영이란 성벽이 없는 촌락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옥토인지 박토인지 알아보고 그 증거로 그 땅에서 나는 실과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정탐꾼들을 적지 깊숙이 보내어 적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오도록 한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대한 비전을 백성들에게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최북방 르홉에 이르렀다가 남방 헤브론을 정탐하고 돌아오면서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땄는데 두 사람이 막대기를 꿰어 둘러메어야 했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두령들의 보고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듣던 대로 정말 훌륭한 땅입니다.” 그러자 온 무리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아멘!” 정탐꾼들의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 포도송이와 석류를 좀 보세요. 우리가 본 과일 중에서 가장 크고 맛이 좋습니다. 그뿐입니까? 여기 꿀맛도 좀 보세요. 맛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모두 입을 모아 기뻐했습니다. “아멘!” 거대한 포도송이를 보니 광야 생활의 모든 피곤이 사라지고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소식이 영 떨떠름했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땅은 기름지고 젖과 꿀이 흐르지만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은 강하고 성읍이 심히 크고 견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이 기름지고 먹을 것이 풍부한데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건장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도 이러한 것들을 먹고 살면 키도 크고 때깔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 거민들이 강하다는 것은 그 땅의 산물이 그만큼 좋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아낙 자손들 곧 거인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또 남방에 사는 아말렉인, 산지에 사는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들이 모두 강하고,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단 계곡에 거하는 가나안인들이 모두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보고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정탐꾼들 사이에 의견이 어떠했습니까?
첫째, 스스로 메뚜기같이 여긴 열 두령(13:30-14:5)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막강한 민족들이 거대하고 견고한 성읍에서 진을 치고 살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정복할 수 있는가? 라며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때 갈렙이 모세 앞에 나서며 말했습니다. 분명히 정탐하고 온 땅은 똑같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치 다른 땅을 다녀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모세 목자님, 우리는 충분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무시무시한 거인들이 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크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어서 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입니까?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지극히 강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큰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니 그것들을 극복하고 남을 스피릿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3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열 두령은 갈렙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애굽 군대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어서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자유를 얻은 것입니까? 그들의 힘으로 홍해를 건넜습니까? 그들이 능력이 있어서 광야 생활동안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들의 힘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앞장서서 인도하시며 싸우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심을 믿고 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땅을 코 앞에 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며 패배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 두령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들이 탐지한 땅을 악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2,33).” 열 두령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심히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앞에서 보고한 것과 정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들과 신장이 장대한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기가 꺾이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은 거기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네피림은 고대 유명한 용사들이었으나 노아 홍수 때 다 죽었습니다(창6:4). 그런데 아낙 자손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이 강포한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네피림’이라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열 두령은 아낙 자손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들은 대장부처럼 보이고 자기들은 연약한 메뚜기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그들에게 너희는 내게 보배와 같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비전을 말씀하시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사 43:4절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존귀하게 여기시고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빳빳한 새 지폐를 주면 받겠습니까? 싫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 지폐를 구겨서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이런 지폐라도 받을 생각이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지저분하게 만들었어도 여전히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폐는 여전히 그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낡아도 아무리 모양이 흉해졌어도 돈의 내재가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난관에 부딪히고 시련을 겪습니다. 때로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지폐와 같은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폐가 여전히 가치 있듯이 우리도 여전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나의 허락없이는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노예 백성으로 살아온 그들이 자기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변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살고자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는 행동이 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공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는 타인에게도 그대로 투사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백성들이 보기에도 자기들이 메뚜기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 자신을 생각하면 허무한 존재입니다.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없던 우리의 삶은 죽은 개와 같고 티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14장 8,9절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가나안 땅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대장부들로서 하루라도 빨리 쳐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젖과 꿀을 먹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령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바라보고 불신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쥐새끼 두 마리가 우유 통에 빠졌습니다. 한 마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물속에서도 헤엄치기가 어려운데 우유 통 속에 빠졌으니 나는 죽었구나”생각하였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니 힘이 빠지고 살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한 마리는 내가 우유 통 속에 빠졌는데 우유는 얼마든지 있으니 죽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손발을 놀려서 헤엄을 쳤습니다. 그러자 우유가 버터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믿음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지, 불신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 긍정적으로 볼 것인지, 부정적으로 볼 것인지, 적극적으로 생각하면서 볼 것인지, 소극적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열 두령의 정탐 보고를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4:1절을 보십시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더라.” 백성들은 지금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광야 생활의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곡하며 울었습니다. 곡이란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노래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이제가면 언제 오나, 아이고 아이고” 몇몇 사람들의 곡하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은 집단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어둡게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학과 자해를 하고 폭력을 쓰고 자살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싸워 보지도 않고 죽기를 원했습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충성된 종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멸시했습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3a)”라며 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멸시하는 죄입니다. 불신은 우리 속에서 두려움을 만듭니다. 두려움이 들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없는 것까지 나름대로 만들어서 생각해 냅니다. 그리고 별 부정적인 생각을 다 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생각하다가 원망하고, 남을 탓을 합니다. 목자 탓, 부모 탓, 친구 탓을 합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반역하게 됩니다.
3b,4절을 보십시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모세를 축출하고 그들의 생각을 대변해 줄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자식들이 사로잡혀 죽는 것보다는 애굽에 들어가 바로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모든 수치와 바로의 채찍과 고역을 잊어버리고, 애굽 생활을 동경하며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크신 권능으로 그들을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구속의 은혜를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백성들의 배은망덕한 행동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말할 수 없이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을 상대로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윗도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시109:4). 모세와 아론은 간절하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둘째, 원수를 밥으로 여긴 여호수아와 갈렙(6-10)
13:30절에 보면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습니다. 갈렙은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다고 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고자 했습니다. 또한 열 두령의 말을 듣고 낙심하여 모세를 원망하며 밤새도록 통곡하며 우는 백성을 보고 여호수아와 함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7).”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탐지한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 아니라 심히 아름다운 땅임을 증거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한 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사명을 맡기실 때에 말씀하신 것입니다(출3:8).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백성들에게도 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리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긍정적이고 밝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는 여호와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갈렙은 백성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고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9)” 약속의 땅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여호와를 거역하면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길은 그 땅 거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갈렙이 볼 때 그들의 보호자는 이미 그들을 떠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원수도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차려 놓은 밥상이요, 가서 먹기만 하면 되는 이스라엘의 밥이었습니다. 밥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밥은 없어서 못 먹지 차려 놓은 밥을 누가 싫어합니까? 차려 놓은 밥을 보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청년의 때는 돌을 씹어 삼켜도 소화를 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9절을 영어로 보면 “We will swallow them up”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을 삼켜 버리자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꿩이 있는데 털도 뽑지 않고 먹어 버리고자 하는 호기가 서려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에게 땅에 있는 각색 짐승을 보여 주시면서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새 학기에 우리 앞에는 수많은 새 양들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새롭게 양들과 관계성을 맺고자 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성을 맺다가 실패한 경험으로 인해서 양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요일4:18). 우리가 싸워야 할 존재는 내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나와 양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데 따르는 두려움을 내어 쫓기를 기도합니다. 실제로 캠퍼스의 양들은 자신들을 양육해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생명의 말씀이 있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목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젊음을 바쳐 헌신할 인생의 목적을 가르쳐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희망찬 미래가 펼쳐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공부하여 실력을 기르고 정복해야 할 전공 분야들이 있습니다. 2007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계 8000개의 캠퍼스는 심히 아름답습니다. 현재는 세계 2000개 캠퍼스에만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한국 캠퍼스만 바라볼 것이 아닙니다. 세계 캠퍼스를 바라보고 그 땅을 개척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북한 땅도 복음으로 정복하여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민족이 온전히 드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은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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