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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강 2006년 신년 2강(요한일서 4:7-21)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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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빌립
댓글 0건 조회 3,843회 작성일 06-01-0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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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신년 2강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말씀/요한일서 4:7-21
요절/요한일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 일서 4장은 고린도 전서 13장과 함께 사랑의 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증거하며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두 막연하나마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역사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는 사랑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이 시간 사도 요한이 전하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 이 세상 가운데 가장 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병술년 새해를 맞이한 우리 모두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은 기적을 이루어 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내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때에는 그가 섬기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 여러 이단들이 들어와 역사함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절부터 6절까지가 바로 교회에 들어온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경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적그리스도, 곧 사탄의 역사는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데서 그 역사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의심의 독소를 심거나 정죄와 미움 등 사소한 것을 통하여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파괴함으로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없애버립니다. 사탄은 소아시아 지역 여러 교회들에서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단세력과의 논쟁과 싸움 끝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분열되어 떠나갔습니다. 다툼과 분열은 공동체에 많은 상처를 남깁니다. 비록 이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공동체 안에 그들이 끼친 잘못된 주장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서로 간에 오해와 불신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서로 간에 아픔과 상처가 있을 때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에 금이 가 있는, 서로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공동체를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록 외적으로 보이는 적인 이단 세력들을 물리쳤지만, 보이지 않게 역사할 수 있는 미움과 판단의 내적인 적을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이 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자고 하였을까요? 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공동체 안에는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록 한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할지라도 많은 형제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중생하였지만 서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족 안에서는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서로를 사랑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들로 서로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또는 짝사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신뢰하며 아낄 때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는 부모와 자식, 목자와 양, 같은 팀의 동역자들, 선배 목자님이나 후배 목자들, 기타 등등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된 자들을 망라합니다. 세상에 만연한 적그리스도의 세력 가운데서도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힘은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은 공동체를 깨기 위해 항상 공동체 안에 사랑을 의심하는 불신을 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한없이 크신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서로 사랑할 때 변화가 있게 됩니다. 이는 사랑이 있으면 내면에서부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게 되자 그는 돈을 사랑하던 데서 돌이켜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으로 충만케 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이 피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탕자에서 성자로 변화되었고, 피눈물도 없던 노예상 죤 뉴톤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시하고 눈물로 찬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신자들만이 감당하고 순종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서로의 허물만 보이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선배 목자님들을 존경하기보다 ‘왜 이렇게 안 해주는가?’ 하고 요구하며 판단합니다. 후배 목자님들에 대해서도 ‘왜 이렇게 밖에 못하지?’ 하며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면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돕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또 성경을 가르치는 1:1 성경선생들입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성경 박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을 잘 아는 우리들이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이는 거짓 지식을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성경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만케 하고 외식하는 자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도 사랑이 없다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아무리 구제하고 자신을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배우며 그 사랑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성경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역사에 해가 됩니다. 교만하여져서 사랑을 해치게 되고 판단하며 정죄하게 만듭니다. 분쟁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입니다. 내가 사랑할 때 사랑을 알게 됩니다. 또한 사랑은 사랑을 낳고 기적을 낳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있었던 일입니다. 한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잠시 소강상태에 있을 때 소대장이 갈증 난 목을 축이기 위해 자신의 수통을 열고 물을 마시고자 했으나 물이 없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전령이 남아 있던 수통을 소대장에게 건네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이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를 치룬 중이라 모두 심한 갈증 가운데 있었고 그 수통은 소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물이었습니다. 소대장이 수통을 들고 물을 마시려 할 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갈증 난 많은 눈동자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대장은 물을 한 모금 콸콸 시원스럽게 마시더니 누워있던 부상병에게 그 수통을 건네었습니다. 부상병도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른 전우에게 건네었고 그 수통은 소대원 모두에게 건네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수통은 조금도 비지 않았습니다. 소대장은 수통의 겉 마개를 연 다음 속 마개를 열지 않고 물을 마시는 척 한 다음 그 수통을 부상병에게 건네었고 그것을 안 부상병을 비롯한 모든 소대원들이 자신보다 더 목마른 전우를 위해 물을 마시지 않고 수통을 건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물이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고, 또한 기적을 낳습니다. 현재의 우리도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때로 갈증 날 때 힘든 나 자신보다 다른 동역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임이 서로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제자 됨을 증거하며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드립니다. 또한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의 기적을 이루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도전할 때 새해 30명 새 양 제자 양성 역사와 100명대 주일예배 역사, 2007년까지 배가 역사, 2015년까지 학생이 학사의 네 배가 되는 역사, 2041년까지 우리 모임에서 1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기적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임이 사랑으로 사랑을 낳는 풍성한 사랑의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9-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 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로마서 5장 8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아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살리시려고 가장 귀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사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살리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들에게 살려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악 된 인간들은 전혀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며 곧 생명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전혀 자격 없는 자들에게 먼저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지, 또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며 또한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 또 조건적인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거나 거짓된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자." 말로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실제 이를 위해 희생하자고 하면 다들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을 우리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귀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그리스도로 보내셔서 십자가를 감당케 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자격도 없을 때에 먼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자"하면 "그래 너부터 사랑하면 나도 사랑할께"라든가, "그 문제만큼은 먼저 사과를 받아야 돼"라든가 하는 조건을 내걸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은 이기적이고 희생하기 싫어하며,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서로 사랑하자"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서도 실제 자기가 희생하여야 할 때가 되면 부담스러워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에 누구나 동의하면서도 그럼 희생하자 하면 부담스러워 합니다. 또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상처 주었던 그 문제만큼은 해결이 되어야 돼"라든가 하는 조건을 달기도 합니다. 당신이 먼저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섬기고 내가 먼저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며 내가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나로부터 먼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재의 성숙도를 보면 참으로 절망적이고 낙망하기 쉽습니다. 전혀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죄악 된 본성으로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죤 뉴톤처럼 하나님의 사랑, 곧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덧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덧입은 자들이 삭개오, 사마리아 여인, 어거스틴, 사도 바울, 성 프란시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죄로 영 죽을, 심판 받아 마땅한 나를 살리시려 가장 귀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덧입고 그 사랑에 감동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까? 12, 13절을 보십시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뵙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 범한 인생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며 그 거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또 사모하는 모임의 모습인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공동체는 이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모든 물건을 통용하며 날마다 모여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송하던 사랑이 넘치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며 온 백성들이 칭송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열매는 받기만 하여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고받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해가 죽음의 바다가 된 것은 받을 줄만 알고 줄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랍고 크신 사랑에 감사하여 이를 기초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어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알 때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인들이 변하여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 받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선배들, 목자님들의 삶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우리 안에 이루어질 때 어떠한 변화가 있게 됩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들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 곧 구원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약속 받은 자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사형선고 받은 자가 사면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주시는 대사면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약속 받고 아버지 집을 약속으로 받은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장래문제에 대해서도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취직은 잘 될 수 있는지, 정년은 보장 받을 수 있는지, 건강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 취직에 대한 두려움, 직장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대한 두려움 등등 많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이런 것들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생 목자로서 또는 평신도 자비량 사역자들로서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에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 후배들에게 무시 받고 배척받지나 않을까, 너무 복음적으로 하면 지나치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학업이나 직장에서 실패하지는 않을까, 등등 갖가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복음 역사를 제대로 섬기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척 초기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두려움 없이 확신 있게 양들을 섬겼습니다. 지금도 어떤 분들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데도 불구하고 확신 있게 복음 역사를 섬깁니다. 이런 차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IMF 이후에 목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거나 경제가 발전되면서 양들의 의식이 차이가 나게 변하였기 때문에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거나 세대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양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복음 역사를 섬긴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은 사랑으로 무장된 용사들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 것도 온전히 이루지 못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은 예는 다윗의 예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윗이 양을 치던 시절에 사자나 곰에게서 맨 주먹으로 양의 새끼를 구해내었던 것이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전의를 상실하였던 골리앗을 물맷돌과 막대기로 싸워 이긴 것은 양들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기적을 이루어 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항상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들 필요한 것이나 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또한 양들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계산하는 마음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복음 역사를 섬기는 동역자들을 격려하고 섬기며, 양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이기적이고 죄악 된 세상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는 먼저 사랑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랑을 덧입은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계명이란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 하지만 내게 상처를 준 저 사람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임을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이 사랑에 대해 가장 귀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희생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따르는 의인들을 위해서 내어 주신 것이 아니라 패역하고 죄악 되고 목이 곧은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인들을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는 것이고 희생하는 것이고 먼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은 악인들도 하는 것이며,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하는 것도 이기적인 죄악 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눈에 보이는 형제를 먼저 사랑하여야겠습니다.

  저는 저의 자녀들이나 양들이나 문제가 있을 때 아무리 좋은 말, 감동적인 말로 훈계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정확하게 문제를 판단하고 있다할지라도 또 정석처럼 그 길을 제시해 준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상처만 받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성에서도 상처를 받는 문제가 생기는데 목자와 양과의 사이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아무리 양을 잘 이해하고 문제를 정확히 안다 할지라도 그 훈계와 책망은 사랑이 없으므로 소리 나는 꽹과리처럼 되고 맙니다. 저의 문제는 저 혼자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돕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쌍방향입니다.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돕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긴다 하여도 그 상대방이 자신이 사랑받기보다 정죄 받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 책망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게끔 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길이 참아야 합니다. 또한 먼저 사랑하고 희생하여야 합니다. 제가 이제 혼자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 사랑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제가 2006년부터는 훈련관의 인상을 가진 목자보다 사랑이 넘치는 목자의 상을 가지고 복음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드립니다. 제가 먼저 사랑하고 희생하는 사랑을 함으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기적을 이루는 역사에 한 부분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을 향하여 서로 “사랑 합니다. 제가 먼저 사랑하겠습니다.” 하고 결단을 선언하고 이 순간부터 말뿐만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몇 년 간 제자 양성 역사를 나름대로 힘을 다해 섬겼지만 성장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좁고 이기적인 마음, 동역자들을 잘 인정하지 못하던 마음, 영접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 먼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 목자님들을 하나님 복음 역사에 사랑의 사도들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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