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06년 성탄 5강(마2:1-12)/ 참된 경배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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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성탄 말씀 제 5 강
말씀/ 마태복음 2:1-12
요절/ 마태복음 2:11
참된 경배의 자세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오늘 말씀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내용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보다 이방인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사람들로 맨 처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세상 만민을 위한 구주이심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장에서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으로 마태 복음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드리는 모습을 묵상하는 가운데 참된 경배의 자세가 무엇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헤롯 왕 때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시대를 말합니다. 헤롯 왕은 잔인무도하고 교활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400년 동안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밤하늘을 밝히는 빛과 같이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아는 한 무리가 바로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연구함으로 우주의 근원되는 진리를 살피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점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을까요? 민수기 24:17절을 보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은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가 있던 유대인들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동방 지역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박사들은 유난히 환하게 반짝이는 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들은 그 별이 바로 유대인들이 말하던 그 메시야의 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별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확인하고 경배하고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갑자기 메시야의 별을 따라 가겠다고 짐을 꾸리는 박사들을 가족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보! 꼭 가야해요? 별을 따라 간다고 해서 별 볼일이 있나요? 아버지 그별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무모한 행동을 하십니까? 가족들의 이런 간절한 만류를 물리치고 그들은 별을 좇아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출세도 할 만큼 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이 험한 길을 선택했을까요? 정말 그들은 정신이 돈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학자로서 많은 공부를 했고,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영혼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욕구는 경배할 대상을 찾아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6: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최고의 의무요 가치임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드디어 박사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유대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 백성이 소동했습니다(3). 소동하였다는 것은 마음이 심히 놀라고 요동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고 기뻐해야 하는데 왜 소동하였을까요?
헤롯왕은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이 유대인의 왕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메시야가 오기를 대망했지만 실제로 그가 오시자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풍요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세상에서 풍요의 신을 함께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영원한 왕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 길을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우리의 본향을 소망하면서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실제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하루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헤롯 왕은 어떤 조치를 내렸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가?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즉석즉답을 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실 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도 그에게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방에서 동방 박사들이 왔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에 대해서 깜깜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그리스도에게 가 있지 아니하고 정치와 세상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풍부하고 정보가 많아도 실제적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권위를 세우고 헤롯 왕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헤롯 왕을 더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7,8절을 보면 헤롯왕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기에게도 고하여 그를 경배하도록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진정으로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동방 박사들과 같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별을 쓰셔서라도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십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사역하고 있던 빌립 집사를 광야로 불러내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은 왕의 말을 듣고 걸음을 베들레헴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그들을 인도하여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있는 곳 위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별을 찾은 동방박사들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확신을 큰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기쁨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라고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터져나왔습니다. 박사들의 마음 속에서는 마치 옹달샘에서 물이 계속 철철 흘러 넘치듯이 즐거움과 기쁨이 철철 흘러 넘쳤습니다. 그들의 기쁨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구원자를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참된 목자를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왕 중의 왕이신 유대인의 왕을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원히 다스려주실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을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여행을 했고, 많은 여행 경비를 써야 했습니다. 험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잇몸도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으로 인해서 이제까지 그들이 겪은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장차 그리스도를 만나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될 때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많이 받은 것이 영광이 되고 자랑이 될 줄 믿습니다. 박사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무언가를 얻고자 하기보다, 다만 그분께 경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왕이요 목자로 영접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죄사함과 큰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오기 전에 주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경배함으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11a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동방박사들은 별이 지시하는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신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최고의 경외심, 존경심으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경배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예배란 하나님에 대해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시105:4)”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이곳에 앉아있으면서 신경을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야 하고 기도할 때도 기도하는 사람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을 할 때도 가사의 의미를 새기면서 큰 소리로 심령을 다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헌금을 드릴 때도 적당히 드리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준비된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과 최고의 사랑과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창조주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최고의 사랑 표현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이 극치에 이를 때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늘 경배의 대상을 찾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 친구를 또는 여자 친구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물질이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명예가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무엇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인애는 사랑을 말합니다. 또 안다는 것은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사랑을 원하시되 친밀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외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를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다고 해서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떠들지만 예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드려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를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베푸신 사랑을 알 때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마음으로만 또는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지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롬1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또 롬6:13절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드려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려 헌신함으로 경배할 수 있습니다. 행동은 아는 것의 열매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6: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이성을 다하고, 진심을 드리고, 나의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3절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나의 최선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많은 지식과 사회적인 명예와 부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공허한 가슴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순간순간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지적 희열을 누릴 때에는 만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뿐 조금 있으면 또 다시 공허하고 허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를 알기 원했고 그 진리에 자신들의 삶을 던지기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야의 별을 통해 그 진리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을 경배함으로 참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예루살렘에 까지 그 머나먼 길을 걸어온 이유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빌립 목자님은 영천에서, 허느헤미야 목자님은 대구에서, 주제임스목자님은 창원에서, 김성수 목자님은 울산에서 매우 서울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림으로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캠퍼스 목자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과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고난에 우리도 동참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쓰고 힘을 쓰고 우리 몸을 드려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경배를 마친 후 박사들은 미리 준비해온 보배합을 열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세 가지 다 값진 예물들인데 특별히 황금은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였습니다. 유향은 제사드릴 때 쓰는 값비싼 향료로서 예수님의 신성과 제사장 직분을 상징하였습니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값비싼 액체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상징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무언가를 받고자 하기보다 순수하게 경배하였고 최고의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심령에 기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희도 이번 성탄에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왕되신 예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또한 동방박사와 같이 준비된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하여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번에 모슬렘 개척의 최일선인 수단 센타 건축과 국내 개척센타 지원과 2006년 세계 선교 대회를 위해서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고난 받는 우리의 형제들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동방박사들은 이전에는 허무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구원자요 만민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께 참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오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로서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됩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진정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2:1-12
요절/ 마태복음 2:11
참된 경배의 자세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오늘 말씀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내용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보다 이방인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사람들로 맨 처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세상 만민을 위한 구주이심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장에서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으로 마태 복음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드리는 모습을 묵상하는 가운데 참된 경배의 자세가 무엇인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헤롯 왕 때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던 시대를 말합니다. 헤롯 왕은 잔인무도하고 교활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400년 동안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밤하늘을 밝히는 빛과 같이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아는 한 무리가 바로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연구함으로 우주의 근원되는 진리를 살피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점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을까요? 민수기 24:17절을 보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은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가 있던 유대인들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동방 지역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박사들은 유난히 환하게 반짝이는 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들은 그 별이 바로 유대인들이 말하던 그 메시야의 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별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확인하고 경배하고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갑자기 메시야의 별을 따라 가겠다고 짐을 꾸리는 박사들을 가족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보! 꼭 가야해요? 별을 따라 간다고 해서 별 볼일이 있나요? 아버지 그별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무모한 행동을 하십니까? 가족들의 이런 간절한 만류를 물리치고 그들은 별을 좇아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출세도 할 만큼 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이 험한 길을 선택했을까요? 정말 그들은 정신이 돈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학자로서 많은 공부를 했고,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영혼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욕구는 경배할 대상을 찾아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6: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최고의 의무요 가치임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드디어 박사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유대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 백성이 소동했습니다(3). 소동하였다는 것은 마음이 심히 놀라고 요동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고 기뻐해야 하는데 왜 소동하였을까요?
헤롯왕은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이 유대인의 왕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제까지 그렇게 메시야가 오기를 대망했지만 실제로 그가 오시자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풍요를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세상에서 풍요의 신을 함께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영원한 왕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나그네 인생 길을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우리의 본향을 소망하면서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실제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하루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헤롯 왕은 어떤 조치를 내렸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가?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즉석즉답을 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실 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도 그에게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방에서 동방 박사들이 왔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에 대해서 깜깜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그리스도에게 가 있지 아니하고 정치와 세상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풍부하고 정보가 많아도 실제적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권위를 세우고 헤롯 왕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헤롯 왕을 더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7,8절을 보면 헤롯왕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기에게도 고하여 그를 경배하도록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진정으로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십니다. 동방 박사들과 같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별을 쓰셔서라도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십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사역하고 있던 빌립 집사를 광야로 불러내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메시야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은 왕의 말을 듣고 걸음을 베들레헴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그들을 인도하여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있는 곳 위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별을 찾은 동방박사들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확신을 큰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기쁨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라고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터져나왔습니다. 박사들의 마음 속에서는 마치 옹달샘에서 물이 계속 철철 흘러 넘치듯이 즐거움과 기쁨이 철철 흘러 넘쳤습니다. 그들의 기쁨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구원자를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참된 목자를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왕 중의 왕이신 유대인의 왕을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원히 다스려주실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을 만났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경배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여행을 했고, 많은 여행 경비를 써야 했습니다. 험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잇몸도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으로 인해서 이제까지 그들이 겪은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장차 그리스도를 만나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될 때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많이 받은 것이 영광이 되고 자랑이 될 줄 믿습니다. 박사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무언가를 얻고자 하기보다, 다만 그분께 경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왕이요 목자로 영접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죄사함과 큰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오기 전에 주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경배함으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11a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동방박사들은 별이 지시하는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신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최고의 경외심, 존경심으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경배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예배란 하나님에 대해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시105:4)”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이곳에 앉아있으면서 신경을 분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시켜야 하고 기도할 때도 기도하는 사람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을 할 때도 가사의 의미를 새기면서 큰 소리로 심령을 다해서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헌금을 드릴 때도 적당히 드리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준비된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과 최고의 사랑과 온전한 헌신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창조주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최고의 사랑 표현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이 극치에 이를 때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늘 경배의 대상을 찾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 친구를 또는 여자 친구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물질이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명예가 경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무엇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인애는 사랑을 말합니다. 또 안다는 것은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사랑을 원하시되 친밀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려면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외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를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다고 해서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떠들지만 예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드려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를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베푸신 사랑을 알 때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마음으로만 또는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지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롬1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또 롬6:13절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드려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려 헌신함으로 경배할 수 있습니다. 행동은 아는 것의 열매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6: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이성을 다하고, 진심을 드리고, 나의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23절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나의 최선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많은 지식과 사회적인 명예와 부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공허한 가슴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순간순간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지적 희열을 누릴 때에는 만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뿐 조금 있으면 또 다시 공허하고 허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를 알기 원했고 그 진리에 자신들의 삶을 던지기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야의 별을 통해 그 진리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을 경배함으로 참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예루살렘에 까지 그 머나먼 길을 걸어온 이유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빌립 목자님은 영천에서, 허느헤미야 목자님은 대구에서, 주제임스목자님은 창원에서, 김성수 목자님은 울산에서 매우 서울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림으로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캠퍼스 목자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과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고난에 우리도 동참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쓰고 힘을 쓰고 우리 몸을 드려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경배를 마친 후 박사들은 미리 준비해온 보배합을 열어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세 가지 다 값진 예물들인데 특별히 황금은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였습니다. 유향은 제사드릴 때 쓰는 값비싼 향료로서 예수님의 신성과 제사장 직분을 상징하였습니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값비싼 액체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상징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무언가를 받고자 하기보다 순수하게 경배하였고 최고의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심령에 기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희도 이번 성탄에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왕되신 예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또한 동방박사와 같이 준비된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하여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번에 모슬렘 개척의 최일선인 수단 센타 건축과 국내 개척센타 지원과 2006년 세계 선교 대회를 위해서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고난 받는 우리의 형제들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동방박사들은 이전에는 허무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구원자요 만민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께 참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오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로서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됩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진정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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