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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05lk3(눅1:57-80)/ 돋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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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765회 작성일 05-12-1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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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성탄 제 3 강                                                                117
말씀 / 누가복음 1:57-80
요절 / 누가복음 1:78

돋는 해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저는 희망, 코리아라는 빼지를 차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하도 어두운 이야기,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다니니까 이제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는 생각에서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힘든 이야기, 슬픈 이야기, 절망스러운 이야기들을 날려 버리고 정말 희망찬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에는 황우석교수의 논문이 가짜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담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배신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언론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고 또 이제 언론이 그를 이렇게 몰아가고 있는 점도 있습니다. 사실 황우석 교수가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참된 소망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된 소망을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돋는 해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하여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새 생명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살아도 일이 풀리지 않아서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그들의 부끄러움을 제하실 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잠 13:12에는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소원하는 것들을 온전히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학생 양을 얻고자 하는 목자님들의 소원이 성취되어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일대일 하는 양들 안에 변화와 성장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결혼을 위해서 기도해 왔던 김글로리아 선교사님이 이번 주 결혼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희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사가랴의 친족들은 팔 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친이 나서며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 아버지의 뒤를 잇기를 원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문제로 갈등이 생기자 그 부친께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데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자 다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기 아들이 가문의 영광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며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졌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사람들은 주의 손이 이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찬양을 하면서 아이에게 거는 기대보다 이 아이가 증거 할 메시야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했습니다. 68,69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셨습니다. 속량하셨다는 말은 값주고 노예를사서 해방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그 백성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죄 문제의 해결없이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이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이는 구원자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사면초가의 상태에 있는 자,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자를 외부로부터 와서 구원해 준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단의 뿔에 찔려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1절에서 보면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었습니다.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이 짐승의 뿔에 찔린 자마다 상처를 입고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욕의 뿔, 교만의 뿔, 미움의 뿔, 탐욕의 뿔, 분노의 뿔, 혈기의 뿔로 찌릅니다. 이 뿔에 찔린 자마다 힘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단에게 끌려 다닙니다. 그래서 사단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대중 문화 뒤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사람을 단절시키고자 사이버 세계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영화 등과 같은 대중 문화 사업에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의 물질에 대한 탐욕을 부추겨서 대중 문화를 조작합니다. 우리는 대중 문화의 이면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실체를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세력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 70,71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망가뜨리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사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부터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면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은 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원수의 손아래 사는 삶은 불의와 두려움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좌파냐 우파냐,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 대립이 끊임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력에 대해서 바른 말을 해야합니다. 세례 요한의 삶은 의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헤롯의 죄를 책망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 왕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비록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하나님을 생명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과 화해할 때부터 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때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도 잘 못하면 잘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서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할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라는 생각에 빠지면 두렵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죄하고 판단하여 두려움을 심습니다. 특히 성과주의, 업적 지상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계속해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시달립니다. 우리 목자들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이런 업적 문제에 빠지면 두렵습니다. 내가 한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자괴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신토록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 했는가를 보십니다. 우리가 잘 나서, 무슨 일을 잘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일보다는 우리 자체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과정을 소홀히 하고 결과에 집착할 때 좋은 열매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롬14:7).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요즈음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자기 일에 더 몰두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여러 가지 문제도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가랴는 아들 요한이 장차 어떤 사역을 할 것인가를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76,77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한은 예수님의 길잡이로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경제적인 구원, 정치적인 구원보다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증거할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근본 목적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것은 그의 긍휼 때문입니다. 78,79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통 해는 아래로부터 오지만 예수님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로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돋는 해는 밤을 몰아냅니다. 떠드는 것도 애쓰는 것도 없이 그것은 칠흑같은 밤을 제거하고 이 땅에 온통 빛으로 충만하게 채웁니다. 그러면 밤은 가만히 사라집니다. 성큼성큼 다가서는 햇살을 피하여 말없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신다면 슬픔과 절망, 무지와 두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의 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돋는 해로 임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단번에 영원히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어두운 밤에 있을지라도 돋는 해 되신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다면 아침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빛이 달리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확신의 등불도 필요없고, 감정과 느낌의 불꽃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위해 모든 밤을 몰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형광등 정도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날이 새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번쩍 타오르고 사라지는 불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계속하여, 영영토록 비취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비참하게 하던 그 긴긴 춥고 어두운 밤이 지나고 주님께서 가장 적합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오십니다. 번갯불로도 아니고 등불로도 아니고 형광등으로도 아닌 오로지 낮을 여는 태양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돋는 해처럼 찾아와 주신 것은 우리 눈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질서를 따라, 어덯게 그 눈이 그 빛에, 어떻게 그 빛이 그 눈에 적합한지 생각해보십시오. 낮이란 것은 처음 동이 틀 때엔 타는 듯한 정오의 광휘가 없다가 어슴프레한 빛을 거쳐서 차츰 차츰 완전한 낮이 되어가는 것인데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처음 베들레헴에서는 희미하게 나타나셧으니 점차로 아버지의 모든 영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도 우리에게 오실 때 그렇게 점진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밝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으실 만큼만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께서 강한 빛으로 나타나시면 우리가 견디지 못할 줄을 아시고 스스로 참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면서 오십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2).” 예수님은 모든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가져옵니다. 또한 돋는 해는 희망을 줍니다. 돋는 해는 따뜻함을 가져오고 생명을 주고 일할 수 있도록 세상을 밝혀줍니다. 무질서와 혼돈을 몰아내고 질서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또 돋는 해는 습기 차고 어두운 그늘에서 번식하는 세균을 죽이는 역할도 합니다. 말4:2절에서 돋는 해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돋는 해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네온 사인 빛, 게임방의 어두침침한 빛, 형광등 빛 아래서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힘있게 비추는 빛이 되셔서 우리 삶에 들어 오십니다. 이 빛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슬피웁니다. 사람들이 붙들고자 하는 세상의 모든 희망은 겨우 자기 발 앞을 비추는 작은 성냥불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죄 문제, 내면 문제, 경제 문제, 인간 갈등 문제를 이기며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근본적으로 죽음의 그늘이 덮어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모든 평강을 빼앗겨 버립니다. 사망권세 앞에서 고통하며 허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돋는 해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영광스럽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돋는 해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요소가 순식간에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를 생명과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돋는 해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되십니다. 우리 모두가 어두운 소식이 가득하고 희망이 없는 이 시대에 적극적으로 이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0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까지 빈들에서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는 고독한 생활을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단독자로 살아갈 때 그의 마음은 강하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고독이란 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마음이 강해야 합니다. 그는 빈들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정말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털 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절제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 학교에서 하나님께 배우는 학생이었습니다.

  우리도 빈들로 나가야 합니다. 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빈들에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곳이 빈들입니다. 기도하는 시간, 소감쓰는 것이 빈들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빈들은 외로운 곳이요, 고독한 곳입니다. 외로울 때 사람의 심령이 강해집니다. 혼자서 하나님을 만나야 자립 신앙이 생깁니다. 우리는 고독한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외로움은 자기 개발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공동체 생활과 함께 고독한 삶이 있어야 건강하고 균형 잡힌 내면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캠퍼스에서 혼자 있는 양들이 거의 없고 있어도 다 핸드폰을 하고 문자를 주고 받습니다. 우리는 때로 핸드폰도 끊고, 인터넷도 끊고 외로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감과 능력과 지혜의 비밀이 홀로 있는 시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고독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돋는 해로 임하셨습니다. 돋는 해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우리는 빈들로 나아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한 해가 저무는 이때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과 단독자로 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돋는 해 되신 예수님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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