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10(6:1-21)/ 오병이어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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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0 강
말씀 요한복음 6:1-21
요절 요한복음 6:11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가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반면에 안드레는 자기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찾아다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앞에서 빌립과 안드레는 전혀 다른 대응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지도자로 키우고자 어떤 훈련을 시키셨습니까? 안드레는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까? 우리 앞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캠퍼스 양무리들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빌립을 시험하신 예수님(1-7):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가 표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치료 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거기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보다 예수님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참에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무리들을 영접하고 섬겨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많은 무리들을 감당해야할 지도자들을 키우기 원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평소에 빌립을 눈여겨보셨습니다. 그에게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큰 무리들을 먹이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고 먹이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죠지 뮬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왜 빌립에게 큰 무리를 어떻게 먹일 수 있는지 질문을 하셨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여기서 시험한다는 것은 그를 문제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라 연단하여 키우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볼 때 그 사람의 실력이 드러나고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부족한 것들을 보완할 때 지도자로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인재는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도전이 많을수록 유능한 인재가 탄생합니다. 유능한 리더들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부담을 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칭찬만 들은 사람은 반드시 자만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무거운 책임을 맡기심으로 그를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마음에 부담을 감당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부담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장할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말씀의 종으로 세움을 받는 것도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 기도하고 영적인 투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하면서 제자 양성에 대한 부담이 없이, 소감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이 생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조금 지나놓고 보면 이는 망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봅시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의 계산으로 천만원 정도가 있어야 5천명의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계산을 빨리했습니다. 현실 파악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에는 예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를 먹여도 조금 밖에 먹일 수 없었습니다. 이왕 없는 돈, 생각만이라도 풍족히 먹일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대처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기의 형편만을 주장했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예수님보다 더 크게 보였습니다. 우리도 대부분 실제 문제에 부딪치면 예수님보다 돈을 더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자기 코가 석자인데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돈이 없으면 일을 추진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위축이 됩니다. 사람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사람이 가진 아이디어를 통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이디어는 어찌하든지 그 일을 해 내야겠다고 생각할 때, 무리들을 사랑하여 먹이고자 할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방향을 잡는 대로 우리의 이성은 그것을 만들어 갑니다. 이성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빌립은 큰 무리를 먹이고자 하는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도 소망을 두시고 계속해서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14장 12절에서 빌립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2. 안드레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8-15) : 빌립이 계산만 하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안드레는 어찌하든지 큰 무리를 먹일 만한 것이 없는 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먹을 것을 어디서 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엉뚱한 데가 있어 보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한 아이의 점심 도시락 정도 밖에 안 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부족하지만 함께 일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일을 하면서 배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환경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다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각자 할 일을 맡아서 감당할 때 자신도 기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질서 정연하게 앉히니 수효가 오천쯤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떡을 가져 축사하셨습니다. 안드레가 드린 오병이어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눠주시자 제자들은 그것을 앉은 사람들에게 배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의 현장에 참여했습니다. 사람들은 잔디 위에 앉아서 오랜 만에 허리띠를 풀고 배를 두드리며 마음껏 먹었습니다. 산 위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드린 오병이어를 기초로 이렇게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통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심정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안드레가 정말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정신 병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것이 그 큰 무리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줄 알면서도 그는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너무 적고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드레가 빌립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먼저 안드레에게는 빌립과 달리 심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배고픈 무리를 먹이고자 하십니다. 안드레는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고 또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심정이 되어버렸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무리를 먹이고자 했습니다. 큰 무리를 먹이지 못하면 한 두 사람이라도 먹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애가 타서 찾아다녔습니다. 빌립이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안드레는 심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상황을 기초로 해서 생각했다면, 안드레는 상황보다도 먹이고자 하는 심정이 앞섰습니다. 그는 차고 메마른 이성의 소유자이기보다는, 뜨거운 심장과 안타까운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심정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뭐라도 해 보고자 시도합니다. 빌립이 머리만 돌리고 있을 때, 안드레는 손발을 움직여 뭔가를 찾아 다녔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머리만 돌리는 사람에게는 자꾸 없는 것만 생각나고,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심정을 가지고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오병이어도 눈에 띄고, 가능성도 보이는 법입니다.
안드레에게는 또 빌립과는 달리 믿음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힘든 상황만 생각했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 크신 예수님의 능력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왔지만 오병이어를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드레도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이라면 이 적은 것으로도 무언가 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부정적인 결론에 이르렀을 때, 안드레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같이 안드레는 심정의 사람이었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이 힘들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힘들더라도 어찌하든지 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불가능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도전했습니다. 그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먹이고자 하는 안타까운 심정 때문에 그것이라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심정과 믿음을 받으시고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정과 믿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둘째, 오병이어를 드리면 됩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 온 오병이어를 축사하셨습니다. 안드레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가져왔는데, 그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많은 사람 수에 비해 오병이어는 감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오천 명을 먹여야 하는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란 말이냐?“ 하는 타박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적은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는 적은 양이지만 예수님이 큰일을 이루시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큰일을 하려면 먼저 나에게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주위 여건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능력 탓, 조건 탓을 하다가 한 번도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적은 능력,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이번 세계 선교 보고 대회와 선교사 수양회를 생각할 때 우리가 드린 작은 오병이어를 주님께서 놀랍게 축사하셔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감당하고 필요한 물질을 어떻게 마련해야하는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무엘 목자님은 선교사님들을 극진히 섬기고자 했고 선교사 수양회비도 무료로 했습니다. 이로 인해 7천만원 이상의 물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감사헌금을 풍족하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룰 뿐만 아니라 남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린 작은 오병이어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계 선교 역사를 놀랍게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는 마치 오병이어와도 같습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가 쉬운 일도 아니지만, 이를 이룬다고 해도 홍익대가 어떻게 달라지며, 또 세계가 어떻게 변한단 말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홍익대 학생들을 다 먹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꾸준하게 한 사람을 먹일 때, 주님께서는 이를 오병이어로 받으시고, 이를 통해 홍대뿐만 아니라 세계를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한강에 돌 던지는 정도라 할지라도, 어찌하든지 캠퍼스 양무리를 먹이고자 하는 심정으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학생 복음 운동을 크게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 일이 너무 힘들고 또 자존심 상하는 일을 많이 당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 둬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캠퍼스 선교에 대한 심정이 사라지고, 그저 내 믿음이나 지키고, 내 공부나 열심히 하고, 나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살도록 기르는 데만 힘쓰고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심정을 잃어버리면 개인주의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만 어려운 양들을 만나도 힘들어 하고, 작은 어려움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고, 조금만 손해 볼 일이 생겨도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찌하든지 일을 이루고자 하는 심정과,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캠퍼스 복음화에 대한 심정만은 잃지 않고 계속해서 캠퍼스에 오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드릴 수 있는 작은 일대일, 심방, 기도, 은사를 드려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캠퍼스 개척과 선교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 섬기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나의 오병이어를 드릴 때 주님께서 이를 축사하셔서 은혜가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말씀 요한복음 6:1-21
요절 요한복음 6:11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가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반면에 안드레는 자기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찾아다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앞에서 빌립과 안드레는 전혀 다른 대응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지도자로 키우고자 어떤 훈련을 시키셨습니까? 안드레는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았습니까? 우리 앞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캠퍼스 양무리들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빌립을 시험하신 예수님(1-7):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가 표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치료 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거기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보다 예수님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참에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무리들을 영접하고 섬겨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많은 무리들을 감당해야할 지도자들을 키우기 원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평소에 빌립을 눈여겨보셨습니다. 그에게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큰 무리들을 먹이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고 먹이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죠지 뮬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 중에서 왜 빌립에게 큰 무리를 어떻게 먹일 수 있는지 질문을 하셨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여기서 시험한다는 것은 그를 문제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라 연단하여 키우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볼 때 그 사람의 실력이 드러나고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부족한 것들을 보완할 때 지도자로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인재는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도전이 많을수록 유능한 인재가 탄생합니다. 유능한 리더들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부담을 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칭찬만 들은 사람은 반드시 자만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무거운 책임을 맡기심으로 그를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마음에 부담을 감당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런 부담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장할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말씀의 종으로 세움을 받는 것도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 기도하고 영적인 투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하면서 제자 양성에 대한 부담이 없이, 소감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이 생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조금 지나놓고 보면 이는 망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봅시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의 계산으로 천만원 정도가 있어야 5천명의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계산을 빨리했습니다. 현실 파악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에는 예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를 먹여도 조금 밖에 먹일 수 없었습니다. 이왕 없는 돈, 생각만이라도 풍족히 먹일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대처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기의 형편만을 주장했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예수님보다 더 크게 보였습니다. 우리도 대부분 실제 문제에 부딪치면 예수님보다 돈을 더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자기 코가 석자인데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돈이 없으면 일을 추진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위축이 됩니다. 사람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사람이 가진 아이디어를 통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이디어는 어찌하든지 그 일을 해 내야겠다고 생각할 때, 무리들을 사랑하여 먹이고자 할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가 방향을 잡는 대로 우리의 이성은 그것을 만들어 갑니다. 이성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빌립은 큰 무리를 먹이고자 하는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도 소망을 두시고 계속해서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14장 12절에서 빌립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2. 안드레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8-15) : 빌립이 계산만 하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안드레는 어찌하든지 큰 무리를 먹일 만한 것이 없는 지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먹을 것을 어디서 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한 아이를 만났는데 그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엉뚱한 데가 있어 보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한 아이의 점심 도시락 정도 밖에 안 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부족하지만 함께 일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일을 하면서 배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환경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다 은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고 세상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각자 할 일을 맡아서 감당할 때 자신도 기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질서 정연하게 앉히니 수효가 오천쯤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떡을 가져 축사하셨습니다. 안드레가 드린 오병이어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눠주시자 제자들은 그것을 앉은 사람들에게 배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의 현장에 참여했습니다. 사람들은 잔디 위에 앉아서 오랜 만에 허리띠를 풀고 배를 두드리며 마음껏 먹었습니다. 산 위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드린 오병이어를 기초로 이렇게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통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심정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안드레가 정말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정신 병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것이 그 큰 무리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줄 알면서도 그는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너무 적고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드레가 빌립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먼저 안드레에게는 빌립과 달리 심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배고픈 무리를 먹이고자 하십니다. 안드레는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고 또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심정이 되어버렸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무리를 먹이고자 했습니다. 큰 무리를 먹이지 못하면 한 두 사람이라도 먹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애가 타서 찾아다녔습니다. 빌립이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안드레는 심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이 상황을 기초로 해서 생각했다면, 안드레는 상황보다도 먹이고자 하는 심정이 앞섰습니다. 그는 차고 메마른 이성의 소유자이기보다는, 뜨거운 심장과 안타까운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심정을 가진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뭐라도 해 보고자 시도합니다. 빌립이 머리만 돌리고 있을 때, 안드레는 손발을 움직여 뭔가를 찾아 다녔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머리만 돌리는 사람에게는 자꾸 없는 것만 생각나고,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심정을 가지고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오병이어도 눈에 띄고, 가능성도 보이는 법입니다.
안드레에게는 또 빌립과는 달리 믿음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힘든 상황만 생각했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 크신 예수님의 능력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가 오병이어를 가지고 나왔지만 오병이어를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드레도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양식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이라면 이 적은 것으로도 무언가 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부정적인 결론에 이르렀을 때, 안드레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같이 안드레는 심정의 사람이었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이 힘들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힘들더라도 어찌하든지 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불가능하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도전했습니다. 그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먹이고자 하는 안타까운 심정 때문에 그것이라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심정과 믿음을 받으시고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정과 믿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둘째, 오병이어를 드리면 됩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 온 오병이어를 축사하셨습니다. 안드레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를 가져왔는데, 그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많은 사람 수에 비해 오병이어는 감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오천 명을 먹여야 하는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란 말이냐?“ 하는 타박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적은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는 적은 양이지만 예수님이 큰일을 이루시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큰일을 하려면 먼저 나에게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주위 여건도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능력 탓, 조건 탓을 하다가 한 번도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적은 능력,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이번 세계 선교 보고 대회와 선교사 수양회를 생각할 때 우리가 드린 작은 오병이어를 주님께서 놀랍게 축사하셔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감당하고 필요한 물질을 어떻게 마련해야하는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무엘 목자님은 선교사님들을 극진히 섬기고자 했고 선교사 수양회비도 무료로 했습니다. 이로 인해 7천만원 이상의 물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참석자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감사헌금을 풍족하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룰 뿐만 아니라 남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린 작은 오병이어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계 선교 역사를 놀랍게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는 마치 오병이어와도 같습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가 쉬운 일도 아니지만, 이를 이룬다고 해도 홍익대가 어떻게 달라지며, 또 세계가 어떻게 변한단 말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홍익대 학생들을 다 먹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꾸준하게 한 사람을 먹일 때, 주님께서는 이를 오병이어로 받으시고, 이를 통해 홍대뿐만 아니라 세계를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한강에 돌 던지는 정도라 할지라도, 어찌하든지 캠퍼스 양무리를 먹이고자 하는 심정으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학생 복음 운동을 크게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 일이 너무 힘들고 또 자존심 상하는 일을 많이 당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 둬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캠퍼스 선교에 대한 심정이 사라지고, 그저 내 믿음이나 지키고, 내 공부나 열심히 하고, 나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살도록 기르는 데만 힘쓰고 싶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심정을 잃어버리면 개인주의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금만 어려운 양들을 만나도 힘들어 하고, 작은 어려움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고, 조금만 손해 볼 일이 생겨도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찌하든지 일을 이루고자 하는 심정과,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캠퍼스 복음화에 대한 심정만은 잃지 않고 계속해서 캠퍼스에 오를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드릴 수 있는 작은 일대일, 심방, 기도, 은사를 드려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캠퍼스 개척과 선교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 섬기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나의 오병이어를 드릴 때 주님께서 이를 축사하셔서 은혜가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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