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9(5:19-47)/ 사망에서 생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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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9 강
말씀 요한복음 5:19-47
요절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오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력이 있는 삶, 기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게 무기력하고 슬프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으로 인해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쟁점은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정당성과 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함으로 신성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판단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왜 성경적이지 않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 사망의 세계에 속하여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미움과 불안과 시기와 증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명의 길을 가도록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19-29) : 1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또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한 마음으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아들은 나름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난 자발적인 복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뜻을 펼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것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아무 때나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게 일하시는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또 그보다 큰일을 보이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방금 38년 된 병자를 일으킨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일도 예수님께서 하게 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고 예수님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예수님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21).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동시에 심판자이십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교만한 죄인들을 무릎 꿇게 하시고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왕의 왕으로 오셔서 죄를 정복하십니다. 초림 때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재림 때는 심판장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빌2:10,11).” 이렇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집중해서 듣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섭입견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데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집중해서 마음으로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것 같은데 안 듣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장로들이 전해준 유전과 전통이 전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귀를 기울이고 의미까지 파악하면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듣는 것은 바른 관계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들어서 깨닫지 못하면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잘 들리지 않으면 반복해서 읽고 되새김질을 해서 먹으면 그 말씀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풍성하게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하나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가 또는 다른 음성을 듣는가에 따라서 영생을 맛보며 사는가, 지옥과 같은 하루 하루를 사는가가 결정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귀가 있는 것은 세상의 소리들을 잘 분별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영양가 없고 영혼에 독이 되는 말들은 흘려버려야 합니다. 유혹의 말, 교만하게 만드는 말, 상처 주는 말, 불신의 말, 판단하는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칭찬의 말을 듣고 자란 자녀들이 건강한 자아상을 세워가듯이 우리가 사람의 말을 잘 분별하여 영혼의 약이 되는 말은 잘 듣고 영혼의 독이 되는 말은 과감하게 버려야 성숙한 인격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듣게 함으로 사망 가운데 거하게 만듭니다. 들린다고 이것저것 다 듣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고통을 당할 것이며, 우리의 영혼은 빼빼 마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 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 자는 영생을 얻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자는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며, 무엇보다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그의 젊음과 열정을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영생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샘솟는 기쁨과 사랑과 능력과 산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내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생은 미래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여기서 영생은 믿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현재, 지금 누릴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24b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간에,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행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심판 아래 있는 것이며 장차 무서운 심판에 던져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사망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현재적인 심판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지에서 뽑힌 나무는 한동안은 수분과 양분이 그 나무에 있어서 살아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수명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수분과 양분은 곧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지에서 뽑힌 순간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 풍성한 삶,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고 스스로의 자원으로 살고자 발버둥쳐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낙원을 상실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 사랑, 능력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손발을 놀려 살아가는 것을 보면 생명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허무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살아갑니다. 마음에 평화를 얻고 싶은데 원치 않게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이 모든 증상이 사망의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25절을 봅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죄로 인해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그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듯이 지금도 말씀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들려질 때 그들은 살아납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길은 오직 하나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본질은 죽어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거나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 역사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심판에 이르러야 할 사람들을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생명으로 옮겨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않으면 있을 수 없습니다.
26,27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영생을 얻는 자요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온 자입니다.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감정과 육체를 따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그는 모든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완전한 구원,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부활하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던져지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듣는다(30-47) :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듣는 대로 심판하십니다. 그가 자기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그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판단하는데 그것이 타당한 것입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내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는가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나의 입장을 고쳐야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 이유는 첫째, 그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증거가 참되다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 요한은 켜서 비추는 등불입니다. 사람들이 일시나마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가 증거합니다. 36,37절을 봅시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넷째,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위하여 증거하십니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을 그 증거를 듣지 못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말씀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 속에 말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는 증거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들이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영생을 얻고자 했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42절을 봅시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사랑했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마음에 없을 때 그들은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세상의 구정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모세의 고소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믿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면 먼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사망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생명의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5:19-47
요절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오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력이 있는 삶, 기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게 무기력하고 슬프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으로 인해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쟁점은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정당성과 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함으로 신성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판단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왜 성경적이지 않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했을 때 사망의 세계에 속하여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미움과 불안과 시기와 증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명의 길을 가도록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19-29) : 1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또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한 마음으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아들은 나름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난 자발적인 복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뜻을 펼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것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아무 때나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게 일하시는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또 그보다 큰일을 보이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방금 38년 된 병자를 일으킨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일도 예수님께서 하게 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고 예수님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예수님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21).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동시에 심판자이십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교만한 죄인들을 무릎 꿇게 하시고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왕의 왕으로 오셔서 죄를 정복하십니다. 초림 때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재림 때는 심판장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빌2:10,11).” 이렇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집중해서 듣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섭입견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데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집중해서 마음으로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것 같은데 안 듣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장로들이 전해준 유전과 전통이 전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귀를 기울이고 의미까지 파악하면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의도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듣는 것은 바른 관계성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들어서 깨닫지 못하면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잘 들리지 않으면 반복해서 읽고 되새김질을 해서 먹으면 그 말씀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풍성하게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하나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가 또는 다른 음성을 듣는가에 따라서 영생을 맛보며 사는가, 지옥과 같은 하루 하루를 사는가가 결정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귀가 있는 것은 세상의 소리들을 잘 분별하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영양가 없고 영혼에 독이 되는 말들은 흘려버려야 합니다. 유혹의 말, 교만하게 만드는 말, 상처 주는 말, 불신의 말, 판단하는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칭찬의 말을 듣고 자란 자녀들이 건강한 자아상을 세워가듯이 우리가 사람의 말을 잘 분별하여 영혼의 약이 되는 말은 잘 듣고 영혼의 독이 되는 말은 과감하게 버려야 성숙한 인격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듣게 함으로 사망 가운데 거하게 만듭니다. 들린다고 이것저것 다 듣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고통을 당할 것이며, 우리의 영혼은 빼빼 마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 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 자는 영생을 얻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자는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며, 무엇보다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그의 젊음과 열정을 쏟아 붓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영생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샘솟는 기쁨과 사랑과 능력과 산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영생은 내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생은 미래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여기서 영생은 믿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현재, 지금 누릴 수 있음을 가리킵니다.
24b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간에,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행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심판 아래 있는 것이며 장차 무서운 심판에 던져질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사망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현재적인 심판입니다. 그들은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기에 사망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지에서 뽑힌 나무는 한동안은 수분과 양분이 그 나무에 있어서 살아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수명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수분과 양분은 곧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지에서 뽑힌 순간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 풍성한 삶,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고 스스로의 자원으로 살고자 발버둥쳐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낙원을 상실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 사랑, 능력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손발을 놀려 살아가는 것을 보면 생명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에 허무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살아갑니다. 마음에 평화를 얻고 싶은데 원치 않게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이 모든 증상이 사망의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25절을 봅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죄로 인해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그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듯이 지금도 말씀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들려질 때 그들은 살아납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길은 오직 하나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본질은 죽어 있는 자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단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거나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 역사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심판에 이르러야 할 사람들을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생명으로 옮겨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모양의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에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은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않으면 있을 수 없습니다.
26,27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영생을 얻는 자요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온 자입니다.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감정과 육체를 따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그는 모든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완전한 구원,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부활하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던져지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듣는다(30-47) :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듣는 대로 심판하십니다. 그가 자기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그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판단하는데 그것이 타당한 것입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내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는가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나의 입장을 고쳐야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 이유는 첫째, 그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증거가 참되다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 요한은 켜서 비추는 등불입니다. 사람들이 일시나마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가 증거합니다. 36,37절을 봅시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넷째,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위하여 증거하십니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을 그 증거를 듣지 못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말씀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 속에 말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는 증거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들이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영생을 얻고자 했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42절을 봅시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사랑했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마음에 없을 때 그들은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세상의 구정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모세의 고소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믿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면 먼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사망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생명의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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