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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8(5:1-18)/ 일어나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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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99회 작성일 06-06-18 10:57

본문

2006년 요한복음 제 8 강                                                                           
말씀 요한복음 5:1-18
요절 요한복음 5:8

일어나 걸어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오늘 말씀은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에 항상 긴장이 되고 물이 동하는 순간에는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사회는 자비의 집이 아니라 잔인한 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이런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경쟁력이 되어 주셨고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베데스다 못가 : 1절을 보면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그 못가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의술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에릭 프롬이 이야기했듯이 이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병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육신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이 있습니다. 특히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없이 함부로 사는 사람들,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형성된 왜곡된 인격 등을 생각해 볼 때 인간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병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병든 사람들은 병든 생각을 하고, 병든 말을 하고, 병든 행동을 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하고 고상한 행동을 하고 싶어도 영혼과 마음이 병들어서 그게 뜻대로 안됩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병든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고, 신음과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못가에서 누가 시신이 되어 실려 나가는 날이면, 그동안 간간이 농담을 하면서 일부러 자지러지게 웃곤 하던 웃음소리도 그치고, 한숨 소리는 더욱 무겁게 깔리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베데스다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갔다가 나은 사람의 간증 집회는 그러한 바람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습니다. 연못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는 ‘한 사람만’ 나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베데스다 못 가는 치열한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못 물이 동할 때 가장 뛰어들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자리다툼을 해야 했고,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들어가지 않나 하여 잠도 자지 못하고 충혈 된 눈으로 서로 견제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돈 받고 자리 잡아 주는 깍두기 머리 아저씨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을 것이고, 언제 어느 쪽에서 물이 동한다는 걸 족집게 같이 알아맞힌다는 도사들이 여기 저기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살벌해야 되겠냐 싶어 ‘천사모(천사를 사모하는 모임)’나 ‘베데스다 환우회’ 같은 모임을 만들어 ‘짱’도 뽑고 회장도 뽑고, 병이 덜한 사람들은 더 심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자고 결의도 했을 것입니다. 특히 절뚝발이는 소경의 눈이 되고, 소경은 절뚝발이의 발이 되어 서로 돕자고 손가락 걸고 맹세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이 동할 때 소경은 절뚝발이를 업고, 절뚝발이는 소경의 양 귀를 잡고 방향을 조정하면서, 못 가에 당도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먼저 물에 뛰어드는 한 사람밖에 나을 수 없는데, 둘 중에 누가 양보하겠습니까? 물이 자주 동한다면야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양보 할 수도 있지만, 물이 동하는 게 기약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손가락 걸고 맹세한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휴머니즘은 사치나 구호일 뿐이고,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인한 팽팽한 긴장만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긴장이 너무 팽팽하여 못에 개구리 한 마리가 퐁당 뛰어들어도 물이 동하는 줄 알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이 어디 베데스다 못 가뿐입니까? 대학에 정원이 있고, 또 일류 대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경쟁을 해야 합니다. 성적 때문에 수능이 끝나면 자살하는 비극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면 거기에 또 경쟁이 있습니다. 강의 잘 하고 점수 잘 주는 교수의 과목은 몇 분만 지나면 벌써 수강 신청도 할 수 없습니다. 4년 내내 취직 걱정에 시달리느라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거기에는 더 치열한 경쟁이 기다립니다. 27개의 대기업은 경쟁률이 100대 1입니다. 취직해도 전에는 회사에서 일한 햇수가 많을수록 봉급이 많아졌는데, 이제 4,50대는 파리 목숨입니다. 
  무한 경쟁시대, 능력 위주의 사회, 일등과 일류만이 살아남는 시대로 변천해 가면서, 사람들은 모두가 살벌한 경쟁심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경쟁력’이 우리 시대의 키워드(Key Word)가 되었고, 세상은 ‘레드오션(Red Ocean)-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비나 희생은 어리석은 자들의 덕목이 되어버립니다. 살아남으려면 사람을 동정하고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짓밟아버려야 합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정글의 법칙’을 익혀야 하고, ‘전략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가 병든 자들의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치열한 경쟁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었습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십팔 년 된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버려진 베데스다 못가로 찾아오셨습니다. 대개 전철을 탔는데 옷이 더러운 사람이 앉아있으면 부담스럽기 때문에 피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다 더한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38년 동안 수없이 낫고자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흙탕물만 마시고 나온 것을 아셨습니다. 38년의 세월을 베데스다에서 보내면서 입었던 마음의 상처와 한, 그리고 그 패배감과 절망도 아셨습니다. 번번이 실패를 반복하자 아예 누워버린 폼이 딱 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다가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부담스럽지만, 설령 말을 건다고 해도 “낫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물을 수 없습니다. 만일 낫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감기 걸린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삼십 팔 년 된 병자라도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실 때 그것은 결코 값싼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네게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내가 너를 낫게 해 줄 수 있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실 수 있으며,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실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그가 소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묻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질문 같습니다. 그가 낫고자 하지 않는다면 뭐 하러 거기 있겠습니까? 그러나 병든 상태가 오래 되자 그는 익숙하게 적응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경쟁에서 밀린 소위 ‘은둔형 외톨이’가 더욱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방에서 나오려는 소원이 조금도 없습니다. 방에서 나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할 일이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뿐 아니라 사람이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래 계속되면,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큰 문제뿐만 아니라 작은 문제도 그러합니다.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나 가정의 문제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나쁜 습관이나 반복되는 죄를 운명으로 여깁니다. 회개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하기보다 차라리 적당히 즐기면서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이 병자도 삼십 팔 년이나 계속해서 누워 살았고, 낫고자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를 낫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에 앞서 그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문제는 그 문제로 인해 절망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소원조차 잃어버리고 그냥 포기하고 누워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우리를 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캠퍼스의 친구들에게 “낫고 싶으시지요?”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희망의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봅시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병이 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부모님이 좀 더 부자였더라면 내 삶이 펴질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고 부모님을 원망합니다. 목자님이 나를 좀 더 잘 훈련시켜 줬으면 좋은 목자가 됐을 텐데 생각하고 목자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분위기나 환경을 탓합니다.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일, 섬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대신에, 남을 판단하는 일에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속담에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 탓만 하다 보면 폐인이 됩니다. 사람 탓을 하고 있는 그의 말 속에 그의 의존심이 잘 드러났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사람을 자주 의지하는지요?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내려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갔기 때문에 자신은 병이 낫지 못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반 발짝이 쳐졌습니다. 그가 물에 뛰어들어가서 일등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이빙을 해서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번만큼은 일등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이 나아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볼 때 뛰는 놈 위에 항상 나는 놈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 패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3. 일어나 걸어가라 :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나고자 했을 엉덩이가 들렸습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일어나려고 하니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 일어나졌습니다. 걸어보려고 움직이니 로봇이 음직이는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자리를 들고 뛰어 집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아주거나 잡아끌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힘이 생기고 경쟁력이 생겼습니다. 그는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그는 베데스다 못가를 걸어나 올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이 그의 경쟁력이요 베데스다가 되셨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경쟁력이 있어야 살아남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고 어학을 공부하고 전공 공부에 전력합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던 이 병자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인해서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력이 있어야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한 목자님은 제대를 하고 취직을 위해서 이력서를 이곳저곳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는 토익 점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영어도 공부하고 취업지원서도 몇 개월을 넣고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 인터넷 쇼핑몰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 갈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신 곳이니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그 회사는 학벌과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만 있고 자신이 가장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직장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제자 양성에서 실패하면서 38년 된 병자와 같이 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제자 양성에 도전하기기 싫고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적당히 목자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대의 환경이나 양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입니다.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제자 양성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는 나이지리아 양들의 문제만 크게 보이고 어려운 현실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숨을 건 새벽 기도를 작정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파노라마같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양들에게 있는 가능성과 장점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 그리고 양들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져서 그 날 캠퍼스에 휘싱을 나갔다가 한 좋은 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많은 학생들을 그에게 붙여주셨습니다. 그는 제자 양성은 심령이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선교 역사를 위해서 잠시 쉬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디모데 선교사님과 함께 하사 나이지리아 개척 역사에 귀히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느13:19, 렘17:21-22), 그 말씀은 영업에 관계된 짐 운반과 관계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옮기지 말아야 할 무게에 집착하여 38년된 병에서 나은 사람을 범법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계속 누워있으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와 같았습니다.

  병에서 나음 받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리를 피해서 그가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기 병이 낫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감사할 겨를도 없이 그냥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아서 어떻게 처신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 도우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그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건강해지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고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사명인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38년된 병이 낫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병자들의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살만해지자 은혜를 까먹고 제 갈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아니하면 더 많은 죄를 짓고, 은혜를 배반하는 병, 감사하지 못하는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두려웠는지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인데 왜 쉬지 않고 일하십니까? 1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신다면 이 우주는 멈추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만물을 보전하고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것을 섭리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 된 예수님도 일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부모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뒤에서 놀고 있는 자식들은 불효자식입니다. 사장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사원이 근무를 태만히 한다면 그는 좋은 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자신도 열심히 생명을 구원하고 치료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병에서 나음을 받았으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영혼의 병인 죄에서 나음을 받았으면 죄인들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해야 더 중한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명인의 삶은 우리가 진정으로 건강한 삶, 복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명인으로 지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명인 감당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심히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실수록 유대인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판단에 예수님이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을 내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경쟁력을 갖게 되고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베데스다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레드 오션(Red Ocean)을 벗어나 블루오션(Blue Ocean)에서 헤엄칩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명인의 삶을 살 힘을 얻으며, 남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을 경쟁적으로 살기보다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삶으로써 세상에서 병들어 짓눌리지 않고 일어나 힘차게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받은 바 은혜를 감당하는 사명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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