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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7(4:31-54)/ 눈을 들어 밭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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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77회 작성일 06-06-1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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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7 강                                                       
말씀 요한복음 4:31-54
요절 요한복음 4:35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노라.”

 예수님은 한 사람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 지역이 복음화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로 인해서 예수님은 큰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의 양식(31-34) : 제자들이 동네에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김밥과 만두, 피자, 후라이드 치킨, 콜라 등 먹을 것을 싸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내밀며 잡수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드셔야 자기들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군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식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기쁨과 생기가 넘쳤습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이 마르고 지쳐서 우물가에 털썩 주저 않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뜬금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숨겨 놓고 혼자 잡수실 분은 아닌데 … 그러면 이 여인이 점식 식사를 차려드렸는가 의아해 했습니다. 그것도 아닌 것을 알아차리고 제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드렸는가? 이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양식은 활동하는 원동력입니다. 밥을 든든히 먹으면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리고 일할 의욕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이런 힘을 얻으십니까?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는 데서 삶의 의욕을 찾고자 합니다. 특히 유럽인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재미와 애국심이 있지만 그들의 내면에 있는 깊은 허무감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락 게임을 통해서, 또는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잠시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다시 허무해 집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삶의 목적과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29:18절에 보면 비전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현실 문제에 매여 살고 근시안적으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버는 것에서 삶의 원동력을 찾습니다. 이 욕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며, 더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옵니다. 소유물은 일시적인 행복만을 줍니다. 사물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새롭고 더 크고 나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가치와 안전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발견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도저히 만족하지 않는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항상 걱정합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점심을 드시지도 않았는데 기쁨과 의욕이 넘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식사도 하지 않고 사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서 삶의 만족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을 찾지 못하여 목마른 인생을 살아온 사마리아 여인을 목마름과 식사할 생각도 잊은 채 도우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동네에 들어가 이를 증거하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사셨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은 모든 피곤이 사라지고 활력이 충만하셨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직장에서 일이 끝나 센터에 오실 때 보면 세상살이에 받는 스트레스로 얼굴이 어둡고 지쳐 보입니다. 그러나 센터에서 말씀을 공부하고 나면 얼굴이 밝아지고 목소리가 힘이 넘칩니다. 그래서 늦은 밤에도 탁구를 한판 치고 갑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피곤하면 먹고 쉬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완수하는 가운데 참 쉼과 활력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도울 때도 몸으로만 쉬게 도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먹고 힘을 얻도록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눈을 들어 밭을 보라(35-38) :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의 한 동네가 자신에게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은 바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와 세계로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해서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당시 밀의 추수는 4월말 경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12월 말경으로 보입니다. 씨를 뿌린 때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밀 추수를 하려면 적어도 넉 달이 지나야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제자들이 밀 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듯이 사마리아에 대한 생각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에서는 보기 힘든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한 여자를 볼 때 그들이 구원받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고, 그리심 산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을 볼 때 판단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지금이 추수기라고 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볼 때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소원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이 여인의 증거를 듣자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지금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표적들만 구하고 말씀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아주 달랐습니다.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인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고 함께 거하기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 어떤 이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말씀만을 듣고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마음 밭입니까? 제자들은 사마리아 인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이 추수하게 된  밭인지를 몰랐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우리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문제를 벗어나서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보아야 합니다.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보아야합니다. 몇몇 학생들 가운데 일어나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보아야 합니다.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사이에 만들어진 동역의 그릇을 보아야 합니다. 홍대생뿐만 아니라 인하대학생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아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은 현지인 리더들을 우리 센터에 보내서 훈련을 시키고자 합니다. 이번에 방문하신 선교사님들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역사를 보고 큰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교 센터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에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센터가 부흥을 해야 계속해서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보고 비전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합니까? 첫째, 거두는 자와 뿌리는 자가 동역해야 합니다. 36절을 봅시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열매를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읍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과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며 거두게 됩니다. 또한 거두는 사람은 뿌리는 사람들이 이미 수고한 것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뿌리는 사람들은 이때를 바라보고 소망 중에 뿌렸습니다. 시대가 어렵다고 뿌리는 일을 게을리 하면 거두는 기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내가 뿌리고 내가 거두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꼭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선지자들과 선배들이 뿌렸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는 은사가 있어서 두려움이 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배척을 받아도 별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데려다만 주면 양육과 제자 훈련을 잘합니다. 그의 일대일 말씀 공부는 예리하고 은혜가 풍성합니다. 어떤 분은 함께 놀아주고 들어주고 사랑하는 일을 잘 합니다. 어떤 분은 중보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기까지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그리고 제 누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할머니나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분들의 수고가 합해져서 제자들이 이 공동체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열매로 인하여 함께 즐거워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아서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서서히 자라게 됩니다. 때로는 그 뿌려진 씨에서 싹이 나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바로 싹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쨌든 뿌려진 씨는 죽지 않고 성장합니다. 어떤 분은 어릴 때 교회 유년부에서 들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운데 한 목자님은 신입생 때 선배님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경 공부를 잠깐 하다가 중단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그가 많은 시련을 겪고 인생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해졌을 때 예전에 들었던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갈 길을 보여줄 것 같아서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뿌린 말씀의 씨앗들은 때가 되어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장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부지런히 뿌리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이 뛰면 많이 거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 9:16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동, 열심있는 행동으로 인함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고, 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말씀의 씨를 뿌리기를 기도합니다. 38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이를 볼 때 우리는 정말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잘 감당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많지 않지만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체로 인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3. 말씀을 인하여 믿는 사람들(39-54) : 사마리아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39절을 봅시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자기의 체험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 기쁨이 충만하여 소감을 발표하는 것을 듣는 사람들이 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박삼일의 수양회를 열었습니다. 주제 강사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의 찬양과 사마리아 여인의 소감발표는 축제 한마당을 연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41절을 봅시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마다 자기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막과 같이 메말라버린 그들의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과 열등감, 상처 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치료가 되고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박삼일의 수양회 후에 자기들의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42절을 봅시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말처럼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한 휘싱 목자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말씀을 공부하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면 훌륭한 성경 선생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그를 구주로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가나에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청하러 왔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이는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즉각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책망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 믿는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도 그런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시고 그의 신앙을 한 단계 끌어 올리고자 하셨습니다. 책망에 가까운 말씀을 듣고 왕의 신하는 자존심이 상해 가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간구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만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말씀을 믿는 신앙을 심기 위해서 예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5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예수님은 그의 방법대로 함께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이 얼마나 믿음과 확신에 넘치는 말씀입니까? 왕의 신하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안수해 주셔야만 해요.’라며 떼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순간 순간 들어오는 의심을 물리쳤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사람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습니다.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따져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로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데서 나타났을 뿐 아니라,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을 치료하는 데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표적 신앙에 머물지 않고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만이 결과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도록 힘을 줍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며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일찍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더욱 인격적이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 비전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전이 없는 개인이나 국가는 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전대로 캠퍼스와 세상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임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되 동역하기를 힘쓰고 말씀의 강인한 생명력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현재 양들의 마음 밭이 거칠다고 심지 않으면 나중에 거둘 것도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고 변화되는 생명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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