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6(4:1-30)/ 솟아나는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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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6 강
말씀 요한복음 4:1-30
요절 요한복음 4:13,14
솟아나는 샘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그 영혼의 목마름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은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남편의 사랑을 구했지만 만족할 수 없어서 다섯 남자나 갈아치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고 사회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정오의 밝은 태양 빛 속에서 한없이 목이 타고 외로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14) :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기심과 경쟁심에 맞붙어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갈등을 피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세 가지 길 중에서 그는 뜻을 가지고 사마리아로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보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셨는데 때는 정오쯤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여인들은 대개 이른 아침이나 저녁 에 삼삼오오 물을 길러 우물가에 와서 이야기꽃을 피우곤했습니다. “미제 칼로스 쌀이 수입되었다던데 그거 밥맛 괜찮을까?” “뭐, 별 거 아니래. 우린 계속 이천 쌀 먹을래.” “어머, 이번 세계선교보고대회에 온 이방 목자들의 소감이 참 은혜롭더라.” “김베키 목자의 소감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더라고….우리 2세 목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던데.” 등등. 한마디로 우물가는 여인네들의 사교장이었습니다. 거기서 수다떨면서 정보도 교환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친교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한낮 뙤약볕에 혼자 물 길러 왔습니다. 아무도 그녀와 함께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고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께 물을 떠 드렸을 것인데 점심때인지라 배고픈 제자들이 우르르 동네에 먹을 것을 사러 들어갔습니다. 혼자 남으신 예수님이 나그네로서 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 한바가지 떠 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바가지 물에 버들잎을 띄워주는 낭만은 없을지언정 이 여인의 태도는 매우 쌀쌀맞았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행에 지친 나그네가 물 한 모금 달라는데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을 볼 때 여인은 내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여인에게 예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예수님은 여인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의외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발견하셨고 그녀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야곱의 우물은 수면까지의 깊이가 32미터나 되기 때문에 긴 두레박이 있어야 물을 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아하니 두레박은커녕, 쪽박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생수를 주시겠다 하니 가소롭기만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그냥 또 다른 곳에 있는 우물물로만 생각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는 예수님이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참으로 맹랑한 여인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매우 열정이 있고 적극적인 여인입니다.
캠퍼스에 가면 학생들은 우리가 선배라고 할 때는 고분고분하다가도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눈빛이 싸늘해지고 표정은 경멸에 찹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무지와 조롱을 참으시고, 그가 주고자 하는 생수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3,14절을 봅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 물은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우물 물은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 권력, 사랑, 물질적인 풍요, 지식에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어 마셨다 해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킵니다(요7:38,39).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로서 그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척박한 마음 밭을 바꾸어 기름지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마음의 더러운 죄를 씻어냅니다. 깨끗한 그 물로 말미암아 죄로 죽어가던 영혼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마시는 각 개인뿐만 아니라 그 주위가 살아납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로부터 생수의 강을 흘러내리게 하여 신촌과 한국과 세계 캠퍼스를 살리시고, 시절을 좇아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네 남편을 불러 오라(15-30) :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까? 15절을 봅시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여인이 예수님께 이런 물을 달라고 합니다. 이 여자가 상당히 목이 말랐던 것 같습니다. 또 매일 물 길러 정오에 혼자 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요청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아주 냉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당황해 하면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17).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히 누구 앞에서 속이느냐!”고 야단치기보다 따뜻하게 감싸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
여인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녀가 이제까지 남편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남편을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사람답지 못하며 비참하게 살았는지, 그 모든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녀의 첫 남편은 그의 부모가 짝지어 준 남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애정 없는 결혼은 사막과도 같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전부터 사랑을 속삭여오던 ‘오빠’와 멀리 도망을 하여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잘 생기고 로맨틱하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남편이 점점 지겨워졌습니다. 그 남자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면서 기가 막혀 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윽고 여인은 그를 차버리고 한 부동산 부자를 남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돈은 많은데 골골하는 남편은 그녀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네 번째로 배에 왕(王)자가 새겨진 몸짱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순 조폭이었습니다. 걸핏하면 의심하고 두들겨 팼습니다. 짜식이 도대체 인격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깊이 사랑하는 한 신사가 조폭 남편에게 많은 위자료를 준 다음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다섯 째 남편은 정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과 돈과 건강과 인격을 갖춘 완전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문제였습니다. 남편 앞에 서면 그녀는 작아지기만 했습니다. 남편이 훌륭할수록 그녀는 과거 자신의 행적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남편이 포근하게 대해줄수록 죄의식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여보, 죄송해요. 당신은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저 같은 건 잊으시고 부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하는 편지를 써놓고 눈물뿌리며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다가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와는 그냥 동거하고 있을 뿐 남편이라 할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꾸며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뭇 남자들을 후려낼 만한 미모와 매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또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남편과는 함께 살 수 없는 자신에게 솔직한 여인이었을 것이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지 뭐…” 하면서 한숨 쉬며 그냥 살아가는 여인네들과는 달리, 열정적이고 용기 있는 여성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것은 너무 수치스럽고 힘들어서 한 거짓말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것이 도리어 그녀의 삶에 대한 가장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실한 갈망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남편을 얻었지만, 그 중의 하나도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저 방황하기만 했고, 그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나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동안 어느덧 간음한 여인, 부정한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왕따’ 당한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데 결과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남편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갈구했던 남편들은 일시적인 만족을 주었을 뿐,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남편들이 그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영원한 존재, 영원한 사랑이 없는 한, 우리 마음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만족이 없기 때문에, 뭔가 갈증을 느끼기 때문에, 순간적인 것들로 그때그때 목을 축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혼하고 또 다른 남편과 결혼할 때마다 이 남편이 마지막 남편, 영원한 남편이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남편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한 바가지의 우물 물 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남편을 통해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서 출세하거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거나, 육신적인 쾌락을 통해서 목마름을 풀고자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연애를 통해서 목을 축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목을 늘이고 다니면서 미팅들을 합니다. 대학에 들어오면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온통 거기에 정신을 쏟습니다. 신입생들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 실컷 목을 축이리라는 일념으로 모든 갈증을 참아가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타는 목마름으로, 이 동아리 저 동아리를 기웃거리고 별의별 데를 다 가봅니다. 물론 그런 데에는 잠시 갈증을 풀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황은 계속되고, 신입생들은 바쁘기만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순간적인 쾌락만을 추구할 때,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구하게 되고 결국에는 타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디오방, 게임방, 노래방 같은 곳에서 점점 순간적인 쾌락에 젖어갑니다. 반면에 영원한 것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곳, 그런 노력을 하기는 점차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죄악 되게 살아가면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예레미야 2:13절은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19).”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일을 더 사랑하여 분주한 마음은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더러운 여인이 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것은 그녀가 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실하게, 그러나 순간적인 만족만을 위해 살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3. 내가 그로라(19-30) : 예수님께서 자신의 남편 문제를 잘 알고 계신 것을 확인하자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며 대화의 주제를 예배 문제로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그 때는 곧 이 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즉 진심을 드려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여인은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아는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이르셨습니다. 26절을 봅시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이제까지 예배한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을 마음을 다해 섬기고, 남편을 의지했습니다. 남편을 통해 갈증을 해소하고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것은 더욱 타는 듯한 갈증과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따돌림뿐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남편들은 영원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물동이가 필요 없었습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을 만난 그녀의 영혼에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동네 사람들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고, 그녀의 진정한 남편이 되셨고, 참된 예배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맺는 말 : 과거에 여러분의 남편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은 어떤 문제로 목이 마릅니까? 현재 목마름이 있다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다른 웅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 샘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물을 퍼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수의 강을 이루도록 합시다.
말씀 요한복음 4:1-30
요절 요한복음 4:13,14
솟아나는 샘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그 영혼의 목마름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은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남편의 사랑을 구했지만 만족할 수 없어서 다섯 남자나 갈아치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고 사회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정오의 밝은 태양 빛 속에서 한없이 목이 타고 외로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14) :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기심과 경쟁심에 맞붙어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갈등을 피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세 가지 길 중에서 그는 뜻을 가지고 사마리아로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보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셨는데 때는 정오쯤 되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여인들은 대개 이른 아침이나 저녁 에 삼삼오오 물을 길러 우물가에 와서 이야기꽃을 피우곤했습니다. “미제 칼로스 쌀이 수입되었다던데 그거 밥맛 괜찮을까?” “뭐, 별 거 아니래. 우린 계속 이천 쌀 먹을래.” “어머, 이번 세계선교보고대회에 온 이방 목자들의 소감이 참 은혜롭더라.” “김베키 목자의 소감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더라고….우리 2세 목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던데.” 등등. 한마디로 우물가는 여인네들의 사교장이었습니다. 거기서 수다떨면서 정보도 교환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친교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한낮 뙤약볕에 혼자 물 길러 왔습니다. 아무도 그녀와 함께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고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께 물을 떠 드렸을 것인데 점심때인지라 배고픈 제자들이 우르르 동네에 먹을 것을 사러 들어갔습니다. 혼자 남으신 예수님이 나그네로서 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 한바가지 떠 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바가지 물에 버들잎을 띄워주는 낭만은 없을지언정 이 여인의 태도는 매우 쌀쌀맞았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행에 지친 나그네가 물 한 모금 달라는데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을 볼 때 여인은 내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여인에게 예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예수님은 여인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의외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발견하셨고 그녀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야곱의 우물은 수면까지의 깊이가 32미터나 되기 때문에 긴 두레박이 있어야 물을 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아하니 두레박은커녕, 쪽박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생수를 주시겠다 하니 가소롭기만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그냥 또 다른 곳에 있는 우물물로만 생각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는 예수님이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참으로 맹랑한 여인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매우 열정이 있고 적극적인 여인입니다.
캠퍼스에 가면 학생들은 우리가 선배라고 할 때는 고분고분하다가도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눈빛이 싸늘해지고 표정은 경멸에 찹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무지와 조롱을 참으시고, 그가 주고자 하는 생수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3,14절을 봅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 물은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 이유는 야곱의 우물 물은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 권력, 사랑, 물질적인 풍요, 지식에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어 마셨다 해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킵니다(요7:38,39).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로서 그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척박한 마음 밭을 바꾸어 기름지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마음의 더러운 죄를 씻어냅니다. 깨끗한 그 물로 말미암아 죄로 죽어가던 영혼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샘물은 마시는 각 개인뿐만 아니라 그 주위가 살아납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로부터 생수의 강을 흘러내리게 하여 신촌과 한국과 세계 캠퍼스를 살리시고, 시절을 좇아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네 남편을 불러 오라(15-30) :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싶지 않습니까? 15절을 봅시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조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여인이 예수님께 이런 물을 달라고 합니다. 이 여자가 상당히 목이 말랐던 것 같습니다. 또 매일 물 길러 정오에 혼자 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요청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아주 냉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당황해 하면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17).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히 누구 앞에서 속이느냐!”고 야단치기보다 따뜻하게 감싸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
여인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녀가 이제까지 남편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남편을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사람답지 못하며 비참하게 살았는지, 그 모든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녀의 첫 남편은 그의 부모가 짝지어 준 남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애정 없는 결혼은 사막과도 같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전부터 사랑을 속삭여오던 ‘오빠’와 멀리 도망을 하여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잘 생기고 로맨틱하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남편이 점점 지겨워졌습니다. 그 남자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면서 기가 막혀 했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윽고 여인은 그를 차버리고 한 부동산 부자를 남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돈은 많은데 골골하는 남편은 그녀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네 번째로 배에 왕(王)자가 새겨진 몸짱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순 조폭이었습니다. 걸핏하면 의심하고 두들겨 팼습니다. 짜식이 도대체 인격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깊이 사랑하는 한 신사가 조폭 남편에게 많은 위자료를 준 다음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다섯 째 남편은 정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과 돈과 건강과 인격을 갖춘 완전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문제였습니다. 남편 앞에 서면 그녀는 작아지기만 했습니다. 남편이 훌륭할수록 그녀는 과거 자신의 행적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남편이 포근하게 대해줄수록 죄의식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여보, 죄송해요. 당신은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저 같은 건 잊으시고 부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하는 편지를 써놓고 눈물뿌리며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다가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와는 그냥 동거하고 있을 뿐 남편이라 할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꾸며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뭇 남자들을 후려낼 만한 미모와 매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또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남편과는 함께 살 수 없는 자신에게 솔직한 여인이었을 것이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지 뭐…” 하면서 한숨 쉬며 그냥 살아가는 여인네들과는 달리, 열정적이고 용기 있는 여성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것은 너무 수치스럽고 힘들어서 한 거짓말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것이 도리어 그녀의 삶에 대한 가장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실한 갈망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남편을 얻었지만, 그 중의 하나도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저 방황하기만 했고, 그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나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동안 어느덧 간음한 여인, 부정한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왕따’ 당한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데 결과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남편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갈구했던 남편들은 일시적인 만족을 주었을 뿐, 영원한 만족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남편들이 그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영원한 존재, 영원한 사랑이 없는 한, 우리 마음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만족이 없기 때문에, 뭔가 갈증을 느끼기 때문에, 순간적인 것들로 그때그때 목을 축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혼하고 또 다른 남편과 결혼할 때마다 이 남편이 마지막 남편, 영원한 남편이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남편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한 바가지의 우물 물 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남편을 통해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서 출세하거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거나, 육신적인 쾌락을 통해서 목마름을 풀고자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연애를 통해서 목을 축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목을 늘이고 다니면서 미팅들을 합니다. 대학에 들어오면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온통 거기에 정신을 쏟습니다. 신입생들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 실컷 목을 축이리라는 일념으로 모든 갈증을 참아가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타는 목마름으로, 이 동아리 저 동아리를 기웃거리고 별의별 데를 다 가봅니다. 물론 그런 데에는 잠시 갈증을 풀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황은 계속되고, 신입생들은 바쁘기만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순간적인 쾌락만을 추구할 때,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구하게 되고 결국에는 타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디오방, 게임방, 노래방 같은 곳에서 점점 순간적인 쾌락에 젖어갑니다. 반면에 영원한 것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곳, 그런 노력을 하기는 점차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죄악 되게 살아가면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예레미야 2:13절은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19).”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일을 더 사랑하여 분주한 마음은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더러운 여인이 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것은 그녀가 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실하게, 그러나 순간적인 만족만을 위해 살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3. 내가 그로라(19-30) : 예수님께서 자신의 남편 문제를 잘 알고 계신 것을 확인하자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며 대화의 주제를 예배 문제로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그 때는 곧 이 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즉 진심을 드려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해서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여인은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아는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이르셨습니다. 26절을 봅시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이제까지 예배한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을 마음을 다해 섬기고, 남편을 의지했습니다. 남편을 통해 갈증을 해소하고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것은 더욱 타는 듯한 갈증과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따돌림뿐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남편들은 영원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물동이가 필요 없었습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을 만난 그녀의 영혼에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동네 사람들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고, 그녀의 진정한 남편이 되셨고, 참된 예배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맺는 말 : 과거에 여러분의 남편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은 어떤 문제로 목이 마릅니까? 현재 목마름이 있다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다른 웅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 샘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물을 퍼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수의 강을 이루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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