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5(3:16-36)/ 이처럼 사랑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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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5 강
말씀 요한복음 3:16-36
요절 요한복음 3:16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갇혀 있다가 독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독 가스실로 가서 처형당하기 위해 기다리며 굶주린 사람들, 인간 이하의 비참한 대접을 받은 자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방의 벽에 기록된 글을 읽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환란과 역경, 풍요와 축복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16-21) : 16a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적인 질서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선악과와 생명나무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시고 사명도 주셨습니다. 사명을 혼자 감당하면 힘들 것 같아서 동역자도 주셨습니다. 그 동역자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할 인생의 반려자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떠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면 자식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유혹자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했습니다. 그 자식은 죄 없는 자기 동생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실망시키는 역사요, 속을 썩이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쓰레기로 변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을 했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도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고 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끼면 상대방이 뭘 해도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그 콩깍지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년, 어떤 사람은 2년, 어떤 사람은 1년, 요즘 사람들은 불과 몇 개월이면 그 콩깍지가 벗겨져서 다투고 말을 하지 않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16a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을 양자로 보냈습니다. 저는 첫째 아버지 집의 양자로 보내졌습니다. 제 동생은 둘째 아버지 집에 양자로 갔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가문을 위해서 자식을 양자로 보낼 수는 있지만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죄인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또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는 인간의 죄를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내 대신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상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실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배반하는 자식을 사랑한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사랑입니다. 압살롬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아버지 다윗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시킨 자였습니다(삼하15:6). 그는 오랫동안 음모를 꾸미다가 마침내 아버지께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왕궁에서 맨발로 도망치게 하고 자신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욕보인 천하에 호로자식입니다(삼하16:22). 이런 자식은 이미 자식이 아닙니다.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압살롬, 이놈, 압살을 시켜 죽일 놈!” 이를 부득부득 갈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압살롬을 대하는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군대장관 요압에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자 어떻게 합니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다윗의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천하에 불효자식이요, 흉악한 죄인이지만 그 아들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죽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서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3:22). 사랑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품 안에서 착하게 자랄 때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못된 짓을 하고 역적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랑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사랑을 받은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를 반역하는 죄를 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자기의 사랑 주머니를 채우고자 하지만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성공과 명예, 사람들의 인정, 물질로 그 주머니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자매님들은 형제의 사랑으로, 형제들은 자매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청춘사업에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아 넣습니다. 그러다가 돈만 날리고 남는 건 상처뿐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해 주어도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그 사랑 주머니는 두둑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넘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새 엄마 밑에 자라서 사랑을 받지 못한 슬픔이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슬픔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결핍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좋은 가정을 이루고 나중에 교육을 더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결핍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알 때 더 이상 세상의 일시적이고 한계적인 사랑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나 좀 사랑해 줄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사랑에 목마른 양들의 목자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되어 늘 불안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알지만 이기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쌓아두고 이런 저런 계획을 잔뜩 세웁니다. 그래도 늘 불안하고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립니다.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불확실한 장래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삽니다. 나를 사랑하사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하여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6b절을 봅시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멸망은 영원한 형벌을 말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가 지옥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계21:9). 지옥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자체는 영원한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이 있습니다. 이런 형벌은 실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지옥에서는 죄의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이 영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주시고 그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멸망이냐 영생이냐가 있을 뿐 중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의인이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은 거듭난 결과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체험적인 것입니다. 영생이란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뿐만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 교제하며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에 힘씁니다(엡2:10). 우리는 일생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면 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주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7,18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인들을 그 더러움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롬1:24,26,28)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습니다(롬2:9).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더 사랑합니다. 19절은 이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태양보다 더 밝은 참빛 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죄에는 쾌락이 있습니다. 그 쾌락을 잊지 못해서 빛 가운데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합니다. 빛으로 나오면 그 행위가 드러나게 되고 다시 죄의 쾌락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에 빛을 미워합니다. 죄의 쾌락은 사과를 따 먹게 한 뱀의 혓바닥과 같은 것입니다. 죄의 쾌락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더욱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죽어야만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입니다(21). 우리는 죄의 쾌락이 아무리 짜릿해도 반드시 싫증을 느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한 형제님은 게임을 좋아했는데 일주일간 꼬박 게임을 하다가 지겨워서 게임을 그만두었습니다. 할 일이 없던 그가 목자님을 만나 성경을 공부하면서 참된 기쁨을 누리고, 그 컴퓨터 실력으로 양들과 공동체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붙어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영생은 계속해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22-36): 물 속에서 받는 세례는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승인하시고 거듭난 사람이 철저한 삶의 변화를 나타내도록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예수님이 세례를 주시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특정한 유대인 사이에 일어났던 문제가 요한과 예수님 간의 잠재적인 경쟁으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26절을 봅시다.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경쟁이 온당치 않다는 것과 그것이 끼칠 수 있는 해악을 민감하게 깨달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상황을 완화시키고자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그는 제자들에게 “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역으로 인해서 시기하고 경쟁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배치하신 대로 그 분의 목적을 위하여 충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캠퍼스 사명과 세계 선교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 모임에 필요한 사람들을 친히 보내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주실 줄 믿고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파송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29절을 봅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당시 유대인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와서 올렸습니다.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신랑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을 영접하여 신부에게 안내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신부된 그의 백성들에게 안내하는 들러리라고 소개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의 친구는 자신이 사람들 눈에 드러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날의 주인공은 신랑이지 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신랑이 스스로 택한 신부와 연합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제 사람들이 자신보다 예수님께 나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사역의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진술했습니다. 30절을 봅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메시야가 그 분의 나라에서 정당한 통치를 행하시고 무대의 중앙으로 나감에 따라 요한은 옆으로 비켜나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 것으로 인해 기뻤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한국과 세계 캠퍼스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 종들로 드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금 홍익대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해서 그들이 잘 되게 지원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세계뿐만 아니라 한국의 캠퍼스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센터를 볼 때 선교사와 이곳에 남아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의 수가 일대일이 된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본국 역사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힘을 잃는 다면 세계 선교를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한국 캠퍼스에 대한 사명감을 가진 분들이 많이 세워지고 헌신할 때만이 선교 사역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자신보다 예수님이 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계속해서 성장할 때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세계 선교뿐만 아니라 본국 역사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 캠퍼스 부흥과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36절에서 저자 요한은 세례 요한과 대비해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고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 사역자들과 증인 위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4절을 보면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6절을 봅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고,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맺는 말: 하나님은 사랑할만하지 않은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과 세계 캠퍼스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위해서 우리 자신의 기력이 쇠하기까지 드려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3:16-36
요절 요한복음 3:16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갇혀 있다가 독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독 가스실로 가서 처형당하기 위해 기다리며 굶주린 사람들, 인간 이하의 비참한 대접을 받은 자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방의 벽에 기록된 글을 읽고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환란과 역경, 풍요와 축복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16-21) : 16a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적인 질서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선악과와 생명나무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시고 사명도 주셨습니다. 사명을 혼자 감당하면 힘들 것 같아서 동역자도 주셨습니다. 그 동역자는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할 인생의 반려자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떠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면 자식도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유혹자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했습니다. 그 자식은 죄 없는 자기 동생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실망시키는 역사요, 속을 썩이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쓰레기로 변한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을 했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도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끊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고 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끼면 상대방이 뭘 해도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그 콩깍지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년, 어떤 사람은 2년, 어떤 사람은 1년, 요즘 사람들은 불과 몇 개월이면 그 콩깍지가 벗겨져서 다투고 말을 하지 않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16a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을 양자로 보냈습니다. 저는 첫째 아버지 집의 양자로 보내졌습니다. 제 동생은 둘째 아버지 집에 양자로 갔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가문을 위해서 자식을 양자로 보낼 수는 있지만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죄인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또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는 인간의 죄를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여주는 사랑입니다. 내 대신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상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실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배반하는 자식을 사랑한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사랑입니다. 압살롬은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아버지 다윗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시킨 자였습니다(삼하15:6). 그는 오랫동안 음모를 꾸미다가 마침내 아버지께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왕궁에서 맨발로 도망치게 하고 자신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욕보인 천하에 호로자식입니다(삼하16:22). 이런 자식은 이미 자식이 아닙니다.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압살롬, 이놈, 압살을 시켜 죽일 놈!” 이를 부득부득 갈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압살롬을 대하는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군대장관 요압에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자 어떻게 합니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다윗의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천하에 불효자식이요, 흉악한 죄인이지만 그 아들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죽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서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3:22). 사랑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품 안에서 착하게 자랄 때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못된 짓을 하고 역적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사랑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사랑을 받은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를 반역하는 죄를 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자기의 사랑 주머니를 채우고자 하지만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성공과 명예, 사람들의 인정, 물질로 그 주머니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자매님들은 형제의 사랑으로, 형제들은 자매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청춘사업에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아 넣습니다. 그러다가 돈만 날리고 남는 건 상처뿐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해 주어도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그 사랑 주머니는 두둑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넘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새 엄마 밑에 자라서 사랑을 받지 못한 슬픔이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슬픔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결핍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좋은 가정을 이루고 나중에 교육을 더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결핍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알 때 더 이상 세상의 일시적이고 한계적인 사랑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나 좀 사랑해 줄 사람 없나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사랑에 목마른 양들의 목자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사랑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되어 늘 불안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알지만 이기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쌓아두고 이런 저런 계획을 잔뜩 세웁니다. 그래도 늘 불안하고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누립니다.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불확실한 장래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삽니다. 나를 사랑하사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하여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6b절을 봅시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멸망은 영원한 형벌을 말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가 지옥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계21:9). 지옥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자체는 영원한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이 있습니다. 이런 형벌은 실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지옥에서는 죄의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이 영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주시고 그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멸망이냐 영생이냐가 있을 뿐 중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의인이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은 거듭난 결과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체험적인 것입니다. 영생이란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뿐만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 교제하며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에 힘씁니다(엡2:10). 우리는 일생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면 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주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7,18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인들을 그 더러움에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롬1:24,26,28)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습니다(롬2:9).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더 사랑합니다. 19절은 이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태양보다 더 밝은 참빛 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죄에는 쾌락이 있습니다. 그 쾌락을 잊지 못해서 빛 가운데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합니다. 빛으로 나오면 그 행위가 드러나게 되고 다시 죄의 쾌락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에 빛을 미워합니다. 죄의 쾌락은 사과를 따 먹게 한 뱀의 혓바닥과 같은 것입니다. 죄의 쾌락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더욱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죽어야만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입니다(21). 우리는 죄의 쾌락이 아무리 짜릿해도 반드시 싫증을 느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한 형제님은 게임을 좋아했는데 일주일간 꼬박 게임을 하다가 지겨워서 게임을 그만두었습니다. 할 일이 없던 그가 목자님을 만나 성경을 공부하면서 참된 기쁨을 누리고, 그 컴퓨터 실력으로 양들과 공동체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붙어서 자라가고 있습니다. 영생은 계속해서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22-36): 물 속에서 받는 세례는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승인하시고 거듭난 사람이 철저한 삶의 변화를 나타내도록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예수님이 세례를 주시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특정한 유대인 사이에 일어났던 문제가 요한과 예수님 간의 잠재적인 경쟁으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26절을 봅시다.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경쟁이 온당치 않다는 것과 그것이 끼칠 수 있는 해악을 민감하게 깨달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상황을 완화시키고자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그는 제자들에게 “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역으로 인해서 시기하고 경쟁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배치하신 대로 그 분의 목적을 위하여 충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캠퍼스 사명과 세계 선교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 모임에 필요한 사람들을 친히 보내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주실 줄 믿고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파송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29절을 봅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당시 유대인의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와서 올렸습니다. 신랑이 신부 집에 도착하면 신랑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을 영접하여 신부에게 안내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신부된 그의 백성들에게 안내하는 들러리라고 소개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의 친구는 자신이 사람들 눈에 드러나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날의 주인공은 신랑이지 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신랑이 스스로 택한 신부와 연합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제 사람들이 자신보다 예수님께 나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사역의 한 가지 위대한 진리를 진술했습니다. 30절을 봅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메시야가 그 분의 나라에서 정당한 통치를 행하시고 무대의 중앙으로 나감에 따라 요한은 옆으로 비켜나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 것으로 인해 기뻤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한국과 세계 캠퍼스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 종들로 드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지금 홍익대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해서 그들이 잘 되게 지원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세계뿐만 아니라 한국의 캠퍼스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센터를 볼 때 선교사와 이곳에 남아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의 수가 일대일이 된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본국 역사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힘을 잃는 다면 세계 선교를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한국 캠퍼스에 대한 사명감을 가진 분들이 많이 세워지고 헌신할 때만이 선교 사역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자신보다 예수님이 흥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계속해서 성장할 때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세계 선교뿐만 아니라 본국 역사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 캠퍼스 부흥과 세계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1-36절에서 저자 요한은 세례 요한과 대비해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고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 사역자들과 증인 위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4절을 보면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6절을 봅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고,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맺는 말: 하나님은 사랑할만하지 않은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과 세계 캠퍼스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위해서 우리 자신의 기력이 쇠하기까지 드려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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