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4(3:1-15)/ 거듭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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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4 강
말씀 요한복음 3:1-15
요절 요한복음 3:3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어느 날 밤 중동의 야자수 밑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대화를 나눈 내용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그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한 분야도 아니고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귈만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모든 젊은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그리고 그는 무슨 문제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1절을 봅시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란 이름의 뜻은 “이긴 백성”입니다. 그는 이름값을 하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재판관이요 입법자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그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율법 학자로서 종교법과 의식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고 민사 소송 때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규적인 율법 연구 과정을 마치고 서품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는 정치 지도자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온 것을 보면 큰 부자였습니다(19:39). 그는 이명박 서울 시장과 같이 돈과 권력과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도 힘든데 그는 여러 분야에서 자기 성취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도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을 만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깜깜한 밤과 같았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바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오지 말지, 그래도 나와야만 할 정도로 그의 인생 문제는 절박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성공한 사람에게도 절망이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가령 그가 공회원이 아니었다면 공회원이 되지 못해 힘든가보다 하면서 공회원 되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거기 매달리면 됩니다. 또 부자가 되지 못했다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재테크, 이렇게 하면 된다’ 등의 책을 보며 거기에 매달리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정상에 올랐습니다. 더 얻을 것도 없었고, 더 올라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행복해야 했지만 그의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큰 평수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자동차도 두 대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사하는 사람이 어이가 없어서 왜 그랬느냐고 물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살맛이 나질 않아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있어도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으면 이 아주머니와 같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영국인 버나드 쇼가 말한 대로 인간의 절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패했을 때 오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했을 때 오는 절망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입니다. 실패할 때의 절망은 다시 노력하여 극복할 수 있지만, 성공 후의 절망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최선 이후에 나타난 절망의 심연으로 인해서 그는 밤에라도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성인들 가운데는 니고데모와 같은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롭게 살아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 시대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인구 감소, 취업난, 핵폭탄의 위협, 음란, 불법이 성해서 이 사회는 더욱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나아와 무슨 기적으로라도 자기 문제와 그 백성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관심을 어디로 돌리십니까?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영원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적인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8,11).”고 고백한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던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체험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 자유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듭나면 개인이 구원받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섬기고,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죄의 유혹을 이기고 의롭게 살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7).”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금 인생의 실패를 맛보았다거나 정몽구 회장같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라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훨씬 더 수긍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공회원이요, 큰 부자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 것으로서 죄를 씻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살면서 죄를 많이 지음으로 결국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치 않는 죄, 지독한 자기 사랑의 죄,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한 죄,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된 죄, 불효막심한 죄 등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들을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은 우리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본성이 달라집니다. 이기적이고 더러운 욕심이 사라지고 거룩한 소원이 생깁니다. 미움과 경쟁심이 사라지고 사랑이 생깁니다. 그 때 마음 속에 찾아드는 충만한 느낌과 그 밝은 빛과 넘치는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7절을 보면 이에 더하여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육’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몸’과는 뜻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육’이란 연약하고 사라져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핀 꽃도 십여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세상의 영광은 성공, 부, 권세,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공을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또 결혼도 잘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으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적인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니고데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사람의 성실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거듭난 사람이 되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기이하게 여기자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8절을 봅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올 봄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습니다. 황사바람이 불다가 화창했다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다 바람의 작용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바람은 내가 불어달라는 방향이나 때에 불어주지 않습니다. 바람은 임의대로 불고 규칙적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인간의 지시에 따라서 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자신의 뜻대로 일하십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흉악한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고 애통하게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무정한 사람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말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던 사람이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말씀을 공부해 달라고 합니다. 나와 관계없어 보이던 자연과 사람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던 사람이 희생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성령이 일하고 계시며, 성령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자녀들과 양들이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다시 반발합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니고데모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일, 사람의 의지하고는 상관없는 일,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학식 많고 능력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문제입니다. 그들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도리어 무지하고, 능력이 많기 때문에 도리어 어리석어집니다. 지식의 양이 이천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불어난 지금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 신비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니고데모는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것, 쌓아 놓은 것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교만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두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입니다.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권위’는 아주 중요합니다. 초등학생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초등학생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 대한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구원의 도리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길 등에 관한 지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예수님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진정한 지성인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영적인 지식을 말씀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에라야 비로소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가 필요합니다.
둘째, 믿음의 필요성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믿음이 필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민수기 21:4-9에 기록된 사건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자 길이 험하다느니, 음식이 박하다느니 하면서 모세를 원망했고, 심지어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불뱀은 날아다니면서 불평하는 입술을 물었습니다(사30:6). 그때서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고 그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불뱀에 물린 상처에 십자로 찢어 피를 뽑아냈거나 해독제를 발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뱀에 물렸는데 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살아났습니다.
이제 14,15절을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 같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는 성령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멸망당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이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21세기에 살고 있는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믿기만 하면 그 어려운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사 믿음을 주시고 성장해 가면 구원의 도리를 이해하게 해 주십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세계’,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육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육적인 세계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이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세계에서 모든 것을 얻으면 행복도 자연히 따라오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곧 참된 행복은 영적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람이 못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요, 아무리 육적인 것들을 많이 얻어도 행복할 수 없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해서 깨닫고 위기감을 느끼며, 울부짖으며,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적인 세계에 있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거듭난 분들은 하나님 나라를 더 풍성히 체험하며, 성장하고, 한 사람의 니고데모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3:1-15
요절 요한복음 3:3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어느 날 밤 중동의 야자수 밑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대화를 나눈 내용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그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한 분야도 아니고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귈만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모든 젊은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그리고 그는 무슨 문제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1절을 봅시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란 이름의 뜻은 “이긴 백성”입니다. 그는 이름값을 하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재판관이요 입법자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그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율법 학자로서 종교법과 의식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고 민사 소송 때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규적인 율법 연구 과정을 마치고 서품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는 정치 지도자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온 것을 보면 큰 부자였습니다(19:39). 그는 이명박 서울 시장과 같이 돈과 권력과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도 힘든데 그는 여러 분야에서 자기 성취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도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을 만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깜깜한 밤과 같았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바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오지 말지, 그래도 나와야만 할 정도로 그의 인생 문제는 절박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성공한 사람에게도 절망이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가령 그가 공회원이 아니었다면 공회원이 되지 못해 힘든가보다 하면서 공회원 되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거기 매달리면 됩니다. 또 부자가 되지 못했다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재테크, 이렇게 하면 된다’ 등의 책을 보며 거기에 매달리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정상에 올랐습니다. 더 얻을 것도 없었고, 더 올라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행복해야 했지만 그의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혔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큰 평수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자동차도 두 대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사하는 사람이 어이가 없어서 왜 그랬느냐고 물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살맛이 나질 않아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있어도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으면 이 아주머니와 같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영국인 버나드 쇼가 말한 대로 인간의 절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패했을 때 오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했을 때 오는 절망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입니다. 실패할 때의 절망은 다시 노력하여 극복할 수 있지만, 성공 후의 절망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최선 이후에 나타난 절망의 심연으로 인해서 그는 밤에라도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성인들 가운데는 니고데모와 같은 어두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롭게 살아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 시대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습니다. 인구 감소, 취업난, 핵폭탄의 위협, 음란, 불법이 성해서 이 사회는 더욱 흉악해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나아와 무슨 기적으로라도 자기 문제와 그 백성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관심을 어디로 돌리십니까?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영원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적인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8,11).”고 고백한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던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체험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 자유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듭나면 개인이 구원받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섬기고,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죄의 유혹을 이기고 의롭게 살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7).”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금 인생의 실패를 맛보았다거나 정몽구 회장같이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라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훨씬 더 수긍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공회원이요, 큰 부자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 것으로서 죄를 씻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살면서 죄를 많이 지음으로 결국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치 않는 죄, 지독한 자기 사랑의 죄,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한 죄,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된 죄, 불효막심한 죄 등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들을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은 우리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창조하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본성이 달라집니다. 이기적이고 더러운 욕심이 사라지고 거룩한 소원이 생깁니다. 미움과 경쟁심이 사라지고 사랑이 생깁니다. 그 때 마음 속에 찾아드는 충만한 느낌과 그 밝은 빛과 넘치는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7절을 보면 이에 더하여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육’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몸’과는 뜻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육’이란 연약하고 사라져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핀 꽃도 십여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세상의 영광은 성공, 부, 권세,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성공을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외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또 결혼도 잘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얻으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적인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니고데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사람의 성실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성인들의 목자가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거듭난 사람이 되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기이하게 여기자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8절을 봅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올 봄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습니다. 황사바람이 불다가 화창했다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다 바람의 작용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바람은 내가 불어달라는 방향이나 때에 불어주지 않습니다. 바람은 임의대로 불고 규칙적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인간의 지시에 따라서 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자신의 뜻대로 일하십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흉악한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고 애통하게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무정한 사람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말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던 사람이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말씀을 공부해 달라고 합니다. 나와 관계없어 보이던 자연과 사람들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던 사람이 희생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성령이 일하고 계시며, 성령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자녀들과 양들이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다시 반발합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니고데모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일, 사람의 의지하고는 상관없는 일,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학식 많고 능력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문제입니다. 그들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도리어 무지하고, 능력이 많기 때문에 도리어 어리석어집니다. 지식의 양이 이천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불어난 지금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 신비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니고데모는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것, 쌓아 놓은 것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교만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두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입니다.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권위’는 아주 중요합니다. 초등학생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초등학생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 대한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구원의 도리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길 등에 관한 지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예수님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해야 합니다. 진정한 지성인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영적인 지식을 말씀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에라야 비로소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가 필요합니다.
둘째, 믿음의 필요성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믿음이 필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민수기 21:4-9에 기록된 사건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자 길이 험하다느니, 음식이 박하다느니 하면서 모세를 원망했고, 심지어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불뱀은 날아다니면서 불평하는 입술을 물었습니다(사30:6). 그때서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고 그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불뱀에 물린 상처에 십자로 찢어 피를 뽑아냈거나 해독제를 발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뱀에 물렸는데 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살아났습니다.
이제 14,15절을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놋뱀이 장대에 매달린 것 같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는 성령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멸망당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이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21세기에 살고 있는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믿기만 하면 그 어려운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사 믿음을 주시고 성장해 가면 구원의 도리를 이해하게 해 주십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세계’,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육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육적인 세계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니고데모와 같이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세계에서 모든 것을 얻으면 행복도 자연히 따라오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곧 참된 행복은 영적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람이 못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요, 아무리 육적인 것들을 많이 얻어도 행복할 수 없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해서 깨닫고 위기감을 느끼며, 울부짖으며, 마음으로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적인 세계에 있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거듭난 분들은 하나님 나라를 더 풍성히 체험하며, 성장하고, 한 사람의 니고데모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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