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2(1:19-51)/하나님의 어린 양
페이지 정보

본문
2006년 요한복음 제 2 강
말씀 요한복음 1:19-51
요절 요한복음 1:29
하나님의 어린양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지난 주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죄로 인해서 죽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증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첫 번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증언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9-34) : 세례 요한은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질타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고,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메시지는 죄에 찌든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자유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회개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은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교의 최고위층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조사단을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요한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라.”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 요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아니라(No).” 그는 갈수록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애매한 대답을 하던지 헛기침을 몇 번만 해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위엣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원합니다. 그래야 승진이 되고 좀 더 많은 일을 하고 월급도 올라가고 일할 맛이 납니다. 신입생들은 대학에 와서 인맥을 쌓기 위해서 애쓰고 친구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튀는 행동을 합니다. 인기를 얻으면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야.”하는 짜릿한 쾌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튀는 행동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신과 실제 자신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초조함과 불편한 생활 때문에 몹시 피곤합니다. 때로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봅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는 자신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외쳐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움으로써 그리스도를 맞도록 준비시켜야 할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자신의 역사적 위치와 사명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인정에 끌려다니며 자아를 잃고 정체성을 잃고 진실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진정한 힘은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말과 인정에 매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과 존재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라며 권세를 문제 삼았습니다. 즉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때 그들과 같이 맞붙어서 혈기를 부리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6,27) 요한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발견을 잘못하고 근거없이 교만한 마음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줄 뿐이요 예수님은 근본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님 앞에 감히 자신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안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아갈수록 또 자신이 어떤 자인가 발견해 갈수록 더 이상 교만해 질 수 없고 세례 요한처럼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십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고 간다는 말은 지고 가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백성이 용서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린 양을 성전으로 끌고 와서 그 머리 위에 안수하고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가 양에게 옮겨진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 다음에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그 양을 잡습니다. 자기의 죄를 지고 갈 양을 자기 손으로 죽이면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처참한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며 어린 양에게 안수하고 그 양을 죽이면, 제사장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에 뿌리고, 양의 고기와 기름을 불살라 제사를 드립니다. 레위기 4: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어린 양’은 죄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되는 속죄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고 간다’는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에 속제 제물을 드리고 나서 흠 없는 염소 한 마리를 데려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무인광야로 가서는 죄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십니다. 우리가 마음 아프게 회개한 죄에 대해서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집안에 있는 쓰레기를 다 모아 분리하고 쓰레기 봉투에 담아 밖에 내 놓으면 쓰레기 차가 와서 멀리 가져다 버리든지 태워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낸 쓰레기들을 차에다 싣고 멀리 가서 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쓰레기를 담아 놓기만 해서는 쓰레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쓰레기를 갖다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나 혹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밖으로 끄집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규명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방치하면 오히려 악취가 더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죄는 마치 가마 솥 밑바닥에 달라붙은 찌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찌꺼기는 솔로 문질러도, 숟가락으로 긁어내도 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을 붓고 펄펄 끓여서 쇠 수세미로 박박 밀어내야 없어집니다. 사람이 죄를 없애려고 노력해 보면 죄가 얼마나 질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사람들이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보았습니다. 죄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정죄와 형벌이 따릅니다. 죄는 저주와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0년 전의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 지금의 내 죄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고 간다는 동사는 현재 분사로서 현재에도 계속해서 지고 간다는 역동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번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속죄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0). 또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처음에는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을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요한은 그 말씀대로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 세례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교만을 떠는 죄,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판단의 죄, 따스한 봄바람과 함께 부는 음란의 죄, 안일과 게으름, 사랑없는 죄,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죄를 지고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월절 제사를 지낼 때 어린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는 함께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예수님의 살을 기념하여 빵을 먹고, 죄사함을 얻게 하는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을 때 영혼의 양식이 되어 주시고, 피를 마실 때 우리의 죄를 씻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통한 죄 사함의 역사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35-42) : 35,36절을 봅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그들이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과 동기를 분명히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주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는 스승과 함께 살면서 그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알기를 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았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친밀히 배우기를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와서 체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소감 모임을 통해서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듣다 보면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학교나 수련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듣는 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진실되게 소감을 쓰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학생들은 믿는 형제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섬기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서로의 모난 부분들이 부딪치면서 깎이게 됩니다. 또한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안드레에게 어떤 일어났습니까? 41절을 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는 형 시몬을 찾아가서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그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는 이 일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받는 종으로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감당하십니다. 안드레는 그 동안 죄로 인한 괴로움과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절망감이 컸을 것입니다. 또 메시야가 오셔서 그의 민족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그가 진실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실 메시야요 구원자이신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달려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은 소중합니다. 만남은 때로 역사를 바꾸어 놓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만남으로써 서양 철학의 토대가 섰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아스리토텔레스가 만남으로 그리스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사라 배리 선교사님과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만남으로서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만남이 나와 메시야의 만남입니다. 메시야와 만날 때 우리는 죄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습니다. 메시야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새롭고 참된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역사에 빛을 남기는 사람들이 됩니다. 마틴 루터가 메시야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서양사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지만 그가 메시야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인도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으며 세계 선교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이 될지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 감격 때문에 예수님을 좇았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형 시몬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는데. 시몬이 나중에 예수님의 수제자요,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베드로라는 인물을 예수님에게 인도한 역사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지금의 러시아 지방의 선교사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고 거기서 순교했습니다. 러시아에 가면 사도 중에서 안드레를 가장 높이 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가 그들의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내가 만만 메시야를 형제들에게, 친구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3-51) : 43,44절을 봅시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친히 빌립에게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나를 좇으라.” 빌립은 즉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그는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사실 이 말은 나사렛 사람을 비웃는 당시의 속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출신으로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십니다. 그는 지역 차별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각종 차별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무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47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바로 빌립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와 보라고 할 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합니까? 말구유 같은 센타 건물은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여 줄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모습, 서로 격려하고 부족함을 도와주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즉시로 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와 보라!”고 하는데 다음에, 나중에 하다가 대부분 때를 놓칩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있는 ‘바이블 까페’에 양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함께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자 칭찬을 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나다나엘은 고백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0,51) 제자들의 공통된 고백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곧 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는 사랑과 평화와 진리로 다스려 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구원자이십니다.
맺는 말 :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오 메시야이십니다. 이 시대 우리의 죄가 넘쳐나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슬픔에 빠집니다. 우리 모두 죄가 세상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아프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예수님을 배우는 데 시간을 드림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죄로부터의 구원과 자유를 맛보며 장차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기초를 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간 우리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시고 이 백성을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19-51
요절 요한복음 1:29
하나님의 어린양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지난 주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죄로 인해서 죽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증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첫 번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증언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9-34) : 세례 요한은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질타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고,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메시지는 죄에 찌든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자유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회개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은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교의 최고위층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조사단을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요한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라.”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 요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아니라(No).” 그는 갈수록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이 애매한 대답을 하던지 헛기침을 몇 번만 해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위엣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원합니다. 그래야 승진이 되고 좀 더 많은 일을 하고 월급도 올라가고 일할 맛이 납니다. 신입생들은 대학에 와서 인맥을 쌓기 위해서 애쓰고 친구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튀는 행동을 합니다. 인기를 얻으면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야.”하는 짜릿한 쾌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튀는 행동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신과 실제 자신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초조함과 불편한 생활 때문에 몹시 피곤합니다. 때로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봅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는 자신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외쳐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움으로써 그리스도를 맞도록 준비시켜야 할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자신의 역사적 위치와 사명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인정에 끌려다니며 자아를 잃고 정체성을 잃고 진실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고 그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진정한 힘은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말과 인정에 매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체성과 존재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라며 권세를 문제 삼았습니다. 즉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때 그들과 같이 맞붙어서 혈기를 부리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6,27) 요한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발견을 잘못하고 근거없이 교만한 마음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줄 뿐이요 예수님은 근본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님 앞에 감히 자신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안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아갈수록 또 자신이 어떤 자인가 발견해 갈수록 더 이상 교만해 질 수 없고 세례 요한처럼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십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고 간다는 말은 지고 가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백성이 용서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린 양을 성전으로 끌고 와서 그 머리 위에 안수하고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가 양에게 옮겨진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 다음에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그 양을 잡습니다. 자기의 죄를 지고 갈 양을 자기 손으로 죽이면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처참한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며 어린 양에게 안수하고 그 양을 죽이면, 제사장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에 뿌리고, 양의 고기와 기름을 불살라 제사를 드립니다. 레위기 4: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어린 양’은 죄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되는 속죄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고 간다’는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에 속제 제물을 드리고 나서 흠 없는 염소 한 마리를 데려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무인광야로 가서는 죄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십니다. 우리가 마음 아프게 회개한 죄에 대해서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집안에 있는 쓰레기를 다 모아 분리하고 쓰레기 봉투에 담아 밖에 내 놓으면 쓰레기 차가 와서 멀리 가져다 버리든지 태워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낸 쓰레기들을 차에다 싣고 멀리 가서 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쓰레기를 담아 놓기만 해서는 쓰레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쓰레기를 갖다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나 혹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밖으로 끄집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규명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방치하면 오히려 악취가 더 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죄는 마치 가마 솥 밑바닥에 달라붙은 찌꺼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찌꺼기는 솔로 문질러도, 숟가락으로 긁어내도 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을 붓고 펄펄 끓여서 쇠 수세미로 박박 밀어내야 없어집니다. 사람이 죄를 없애려고 노력해 보면 죄가 얼마나 질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사람들이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보았습니다. 죄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정죄와 형벌이 따릅니다. 죄는 저주와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0년 전의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 지금의 내 죄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고 간다는 동사는 현재 분사로서 현재에도 계속해서 지고 간다는 역동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번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속죄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0). 또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처음에는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을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요한은 그 말씀대로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 세례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교만을 떠는 죄,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판단의 죄, 따스한 봄바람과 함께 부는 음란의 죄, 안일과 게으름, 사랑없는 죄,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죄를 지고 예수님은 가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유월절 제사를 지낼 때 어린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는 함께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속죄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예수님의 살을 기념하여 빵을 먹고, 죄사함을 얻게 하는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살을 먹을 때 영혼의 양식이 되어 주시고, 피를 마실 때 우리의 죄를 씻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통한 죄 사함의 역사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35-42) : 35,36절을 봅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그들이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과 동기를 분명히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주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는 스승과 함께 살면서 그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알기를 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았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친밀히 배우기를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와서 체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소감 모임을 통해서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나누고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듣다 보면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 학교나 수련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듣는 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진실되게 소감을 쓰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학생들은 믿는 형제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섬기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서로의 모난 부분들이 부딪치면서 깎이게 됩니다. 또한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안드레에게 어떤 일어났습니까? 41절을 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는 형 시몬을 찾아가서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왕’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그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는 이 일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받는 종으로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감당하십니다. 안드레는 그 동안 죄로 인한 괴로움과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절망감이 컸을 것입니다. 또 메시야가 오셔서 그의 민족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그가 진실로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실 메시야요 구원자이신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달려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은 소중합니다. 만남은 때로 역사를 바꾸어 놓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만남으로써 서양 철학의 토대가 섰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아스리토텔레스가 만남으로 그리스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사라 배리 선교사님과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만남으로서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만남이 나와 메시야의 만남입니다. 메시야와 만날 때 우리는 죄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습니다. 메시야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새롭고 참된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역사에 빛을 남기는 사람들이 됩니다. 마틴 루터가 메시야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서양사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케리는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지만 그가 메시야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인도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으며 세계 선교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이 될지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 감격 때문에 예수님을 좇았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형 시몬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는데. 시몬이 나중에 예수님의 수제자요,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베드로라는 인물을 예수님에게 인도한 역사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지금의 러시아 지방의 선교사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고 거기서 순교했습니다. 러시아에 가면 사도 중에서 안드레를 가장 높이 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가 그들의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내가 만만 메시야를 형제들에게, 친구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3-51) : 43,44절을 봅시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친히 빌립에게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나를 좇으라.” 빌립은 즉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그는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사실 이 말은 나사렛 사람을 비웃는 당시의 속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출신으로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십니다. 그는 지역 차별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각종 차별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무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47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바로 빌립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와 보라고 할 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합니까? 말구유 같은 센타 건물은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여 줄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모습, 서로 격려하고 부족함을 도와주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즉시로 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와 보라!”고 하는데 다음에, 나중에 하다가 대부분 때를 놓칩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있는 ‘바이블 까페’에 양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함께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자 칭찬을 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나다나엘은 고백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0,51) 제자들의 공통된 고백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곧 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는 사랑과 평화와 진리로 다스려 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구원자이십니다.
맺는 말 :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오 메시야이십니다. 이 시대 우리의 죄가 넘쳐나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슬픔에 빠집니다. 우리 모두 죄가 세상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아프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예수님을 배우는 데 시간을 드림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죄로부터의 구원과 자유를 맛보며 장차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기초를 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간 우리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시고 이 백성을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6jn2.hwp (0byte)
68회 다운로드 | DATE : 2006-04-30 10:49:5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