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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1(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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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92회 작성일 06-04-2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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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 강                                                                       
말씀/요한복음 1:1-18
요절/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밤에 성당 앞을 지나는데 한 학생이 "I believe me."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I believe in myself."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가 종교적인 신념을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고 했다면 이는 정말 교만한 말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너는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한 말에 아담과 같이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 자신을 믿는다.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뜻으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인데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단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이신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3년 반 동안 함께 살았고 그가 행하신 일들의 일부를 기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자 할 때 순서에 따라서 마태복음을 읽습니다. 마음먹고 읽는데 낳고 낳고 낳고 라는 족보이야기를 보면서 졸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요한복음을 읽도록 권합니다. 요한복음은 가장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은 쉬운데 깊다는 점입니다. 사실 저도 수없이 요한복음을 공부했지만 공부할수록 놀라는  것이 그 풍성함과 웅장함과 생명력이 끝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물기 위해서 성육신하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말은 무엇을 설명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고, 보여주실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2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2). 여기서 함께 계셨다는 것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보는’ 아주 친밀한 관계와 교제 가운데 계셨음을 나타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공동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심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질서를 세우시고 겸손하고 서로를 세워줌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3).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생명을 보전하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 각자의 생명을 책임지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서 이 빛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소는 주인을 알고 개도 그 주인을 알지만 사람들은 그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주인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11).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습니다.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38선을 기점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인해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보수와 진보의 높은 벽이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간에도 오해와 불신의 골이 깊습니다. 같은 한글을 쓰는데 오해가 생깁니다. 이는 똑 같은 말을 갖고도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상처를 주고받고 싸우고 울고불고 합니다. 

  ‘건축’이란 제목의 스킷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어떤 미지의 섬에 조난당한 배로부터 한 무리의 청년들이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섬의 한 모퉁이에는 건축자재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이 자재를 가지고 무엇을 건축할 것인가를 놓고 토의하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은 당연히 숙소를 짓자고 주장합니다. 한 청년은 배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둘 창고를 먼저 짓자고 주장합니다. 그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이 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섬이 보인다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이 이곳으로 헤엄쳐 오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장내는 긴장되기 시작하고 그 청년은 그 자재로 우선 벽을 쌓자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일단의 청년들은 경계를 섭니다. 벽을 쌓는 건축이 얼마 진행되지 않았을 때 한 청년이 저쪽 섬에서 도착해오자 그들은 이 청년을 붙들고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 섬과 저 쪽 섬을 함께 소유한 주인의 아들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 섬과 저 섬을 연결하고자 다리를 놓을 자재를 준비해 놓았는데 당신들은 이 자재로 다리가 아닌 벽을 쌓고 계시는군요.” 누군가가 소리칩니다. “저 놈이 수상하다.” “맞다, 죽여라 죽요!”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고 천둥 뇌성이 울리고 불이 꺼집니다. 잠시 후 무대에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거기에는 그 섬의 주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고 이런 멘트가 무대를 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리를 놓고자 했는데 당신들은 벽을 쌓았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며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4a). 그는 진실로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오늘도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해의 사람이 되라고 부탁하십니다.

둘째, 긍휼을 베풀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로 올라가기는 좋아하지만 내려가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힘들어 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세우기를 원하지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33년간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사시면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자 바리새인들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7:34).”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그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심으로 그 문둥병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시면서 그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3년 반 동안 그와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상처와 한으로 얼룩진  우리 민족 사회는 이런 긍휼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영성작가요 사제인 헨리 나우엔이 들려주는 ‘바보들의 마을에 들어선 수박 사냥꾼’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바보들의 마을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복판에 있는 밀밭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밀밭에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니 그 괴물의 정체는 수박이었습니다. 그는 괴물을 처치하겠다고 선언하고 수박을 줄기째 잘라 조각을 낸 후 한 쪽을 먹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우리도 저렇게 난도질 할 것이라”고 소리치며 건초 갈퀴를 들고 그에게 대들어 그를 마을에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 마을에 또 한 사람이 도착했는데 그는 전 사람과 달리 마을 사람들이 괴물로 인해 놀라면 같이 놀라고 도망치면 같이 도망치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르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수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고 수박을 재배하는 마을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나우엔은 이런 사람을 ‘긍휼의 지도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목자이셨습니다. 우리 시대는 양들과 함께 하면서 긍휼을 베푸는 목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셋째, 생명을 주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로서 하나님의 생명, 본질적인 생명,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계속되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하나님의 생명력을 충만히 누리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는 즐거움, 평화, 만족, 의미, 열정, 행복 등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0:10, 20:31).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생명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의 삶은 이 생명을 찾아 헤매는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돈에 생명이 있는 줄 알고 돈을 찾다가 돌아버립니다. 학생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학점, 어학,  취업 등에 매달립니다. 직장인들은 노후 보장이 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명보험, 연금에 투자를 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 생명은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안에, 말씀 안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요5:39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할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6). 12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은 줄 믿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요한일서 5:11,12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5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십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생명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에게 밥이 되시고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영적인 힘을 얻고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이 어둡고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형제님은 UBF에서 매주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하고 주일 예배에서 메시지를 듣고 소감을 쓰면서도 생명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목자를 비판하고 원망했습니다. 홍수 속에서 먹을 물이 없는 것처럼 그는 말씀의 홍수 속에서 목이 말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믿으면서 살 때 그 영혼은 곤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우리의 인생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형제님은 힘든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삶이 피곤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그는 늘 푸른 소나무와 같이 생기가 넘칩니다. 새롭게 피어난 형제로 인하여 그 요회뿐만 아니라 센타가 환해지고 활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형제에게 공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공급받으면 누구나 이처럼 피어날 수 있습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외쳐 증거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8:58).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또 우리 육안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맨눈으로 태양조차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딤전 6:16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빌립도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14:8).”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9-11).”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행하신 일과 그의 인격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에게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믿는 자 속에 내주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 속에 있는 사람은 그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를 걸어다니는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제 아들 엘리야를 보고 있으면 저를 보는 것 같다고 말씀을 합니다. 걷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똑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물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둘째,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셋째,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나타내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깊이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 다가가 전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캠퍼스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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