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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목적40일 제 6 강/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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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45회 작성일 06-04-1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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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목적 40일 제 6 강                                                       
말씀 / 요한복음 20:1 - 31
요절 / 요한복음 20:2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살아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사함을 받았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지난 40일 동안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바른 대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서 훈련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그의 몸된 교회를 섬깁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들은 무엇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있었는데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부활의 첫 목격자이고 다른 여자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였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증거한 첫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그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 주셔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귀신이 들리는 것은 병의 일반적인 원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큰 병에 걸려 고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으로 심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눅7:36).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죄사함을 받고 영육간에 온전함을 회복하게 되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소유로 섬겼습니다(눅8: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것과 매장되기 까지 지켜보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옮겨지고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요한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어요(2b).” 그녀는 예수님의 원수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서 백성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두려워 힘대로 파수꾼들을 데려다가 굳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습니다(마27:62-66).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무덤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째 되던 이른 아침에 큰 지진과 함께 주의 천사를 보내어 무덤에서 돌을 굴려 내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나가서 무덤으로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달리기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제자인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젊기 때문에 달리기도 더 잘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나이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몸을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지만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 머뭇거리지 않고 무덤 문을 통과하여 시체를 뉘었던 곳에서야 멈추어 섰습니다. 입만 클 뿐 아니라 간덩이도 큰 베드로가 달리기 시합에서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이 두 사람의 성격이 대조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의 기록이 얼마나 진실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도 그때서야 무덤에 들어가 보니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7).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는 공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푹 꺼져 있었고 머리를 쌌던 세마포는 잘 개켜 있었습니다. 이 상황은 누가 시체를 훔쳐 갔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떤 도둑놈이 시체를 몸뚱이만 빼내서 가져가고 또 얼마나 여유가 있다고 머리를 쌌던 수건을 잘 개켜놓고 가겠습니까? 빈 무덤과 세마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9). 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영적인 눈이 감겨서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고도 해석하지를 못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눈뜬 봉사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두 제자는 계속해서 이상한 일만 생기는 현실을 답답해하면서 쓸쓸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도 혹시 무덤 속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생각하여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를 위로하였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들이 볼 때 지금은 기뻐해야 할 때인데 울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는 말이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14). 예수님은 슬퍼하고 있는 마리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리아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이라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생각에 꽉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서 예수님이 죽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자기 손으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힌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 고정 관념에서 나오기가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마리아를 볼 때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본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죽은 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무거운 시체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만 주신다면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름 그대로 시체를 ‘막달라’기만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시신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로마인들이 뺏어갈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한계지어 생각하기 때문에 우상과 같이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막달라 마리아는 슬퍼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더 이상 울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계19:16).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너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계속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헌신했던 예수님이 없어졌을 때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습니다. 시체라도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텐데 시체마저 없어졌으니 더욱 허망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헌신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미련이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끔찍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고 살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빨리 죽어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현실이 주는 무게 때문에 울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예수님께서는 깊이 이해하시고 인격적으로 찾아오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 상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했지만 알아보지 못하다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아 사울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빛 가운데서 들었을 때에야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야! 이는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소리를 듣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소음이 많은 세상이지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면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의 소리로 충만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인격적으로 도우셨듯이 우리 각자를 그렇게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임했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죽음 자체보다 그 영향력이 주는 죽음의 요소들이 우리를 못쓰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죽음의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할 것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세 글자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평강이 있어야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삯인 사망을 깨뜨림으로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죄의 사슬을 깨뜨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에 기초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의식과 정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을 때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며 영적 성장을 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환란 가운데서 강 같은 평화를 누리고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환희를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줍니다. 우리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런 의미를 다 몰랐다 할지라도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니 너무나 기쁘고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꽉 붙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변화산 상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꼭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붙잡아 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승천하셔야합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구별된 거룩한 분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사람에 의해서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라 경배 받아야 할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마리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더 이상 형제 목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오 주의 주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권세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눈을 죄인인 우리가 아니라 자기에게 향하게 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심으로 비참한 죄인들이 공포로 가득 차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보좌를 은혜와 관대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요16:7)”고 격려하셨습니다. 그가 승천하시므로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우리의 육안에서 거두어 갔지만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들과 얼마나 더 친밀하게 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과 성령으로 연합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가 승천하심으로 날마다 그 택한 백성들에게 신령한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 주십니다. 그는 높이 하늘에 앉으사 우리를 그의 권능으로 변화시키고, 생기를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필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가 승천하심으로 원수들을 그 손의 강력으로 견제하시고 교회를 보호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일일이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때부터 계속 닫혀 있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길을 개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우리는 사명인 살면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충성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상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또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증거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빛이 났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녀는 살 맛이 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의 삶은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활의 증인은 자기가 본대로 증언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내게 역사하신 것을 증거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허무로 인해 무기력하고 죄만 짓던 저를 찾아오사 죄사함을 주시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해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아가(Go, God, Good News, Gospel) 부활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었지만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자신들을 잡아서 족칠 것만 같았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자매님들은 슬픔에, 형제들은 두려움에 종노릇합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죽음의 권세입니다. 남자의 상징은 용감무쌍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때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용감하게 맹세했습니다(13:37). 그러나 지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두려움으로 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크 소리만 나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손발이 굳어 버리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쓸모없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길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단절하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심할 경우에 대인공포증, 광장공포증, 자폐증이 일어납니다.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심하고 의욕상실에 걸려서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용기를 상실하고 다 죽어가는 노인네처럼 힘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불면증과 악령에 시달립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닫힌 문들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일곱 겹으로 된 철갑문이라 할지라도 뚫고 들어와 우리 가운데 서서 평강을 주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문들을 닫고 주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이 자리에도 오셔서 가운데 서서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의 중심에 있을 때 평강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 후에 그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상흔을 볼 때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상흔을 볼 때 내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고 기뻤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새 소망이 움텄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 힘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인시킨 후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두려움 많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통해서 세상의 죄를 용서하고 섬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들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미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보낸다(sending)”는 라틴어에서 “사명(mission)"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다섯 번째 목적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어디서부터 이 복음을 나누어야 할까요? 우리의 형제들에게 먼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캠퍼스와 직장에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도행전1:8절에서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오순절에 받게 될 성령의 첫 단비였으며 오순절 이후 일어날 풍성한 역사를 예표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을 비관한 나머지 홀로 어디 가서 우수에 잠겨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오니 제자들이 하나같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도마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그는 나도 보아야 믿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이 정신이 나가서 허깨비나 환영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부활하셨다는 주님이 같은 분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고 완고하게 말하였습니다.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3년동안 함께 했던 친구들의 증거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였습니다.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도마에게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불신의 말을 할 때 없었지만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만나자 마자 “너 끝까지 그렇게 의심할래”하며 군밤을 한대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병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도마의 회의와 불신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의가 변하여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었을까요? 도마는 자신이 그렇게 한다면 더 깊은 불신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불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위엄에 압도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일, 물위를 걸으셨던 일, 나사로를 살리셨던 일 등이 스쳐지나가면서 그 의미들이 비로소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말했으며, 시35:23절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라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지칭했습니다. 도마도 그런 표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인 그가 하나님으로 여겨지지 않는 어떤 자에게도 이런 표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요한복음의 결론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경배 받으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본 고로 믿었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습니다. 이제 눈으로 목격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고후5:7).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우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30,3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빈 무덤, 세마포, 수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슬픔과 두려움을 이기고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가운데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은 빛과 사랑과 생명의 복음이요 믿음의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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